2009 노벨상 발표가 모두 끝났다. 지난 10월5일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엘리자베스 블랙번(미국), 캐럴 그라이더(미국), 잭 조스택(미국)의 공동 수상을 발표한 데 이어 6일 노벨 물리학상에 찰스 가오(영국), 윌러드 보일(미국), 조지 E 스미스(미국)가 수상자로 확정되었다. 7일엔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인도의 라마크리시난과 미국의 스타이츠, 이스라엘의 요나스가 공동 수상자로 발표되었으며 8일에 독일의 헤르타 뮐러가 문학상을, 9일에 미국의 버락 오바마가 평화상, 마지막 날인 12일에는 엘리노어 오스트롬(미국), 올리버 윌리엄슨(미국)이 경제학상 수상자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전체 수상자 13명 가운데 11명이 미국 시민권자로 확인되면서 미국의 독식 현상을 질타하며 ‘노벨 아메리카상’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노벨 수상자 발표 첫날 공동 수상자 세 명이 모두 미국인으로 물리학상과 화학상이 발표된 연 사흘 동안 과학 분야 수상자 9명 중 8명이 원래 미국 국적이었거나, 나중에라도 미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이었다. 화학상을 공동 수상한 이스라엘의 아다 요나트와 문학상을 받은 독일 작가 헤르타 뮐러를 제외하고는 모두 미국인 일색이다. 마지막 경제학상까지 전체 수상자 13명 중 미국인이 11명, 85%가 미국인이었다. 노벨상 시상이 시작된 1901년 이후 지금까지 노벨상 수상자 중 미국인이 차지한 38%를 2배 이상 웃도는 결과다. 이에 특혜라는 비판도 있지만 대규모 투자로 월등히 좋은 연구 환경을 제공하고 장기간 고급 인력을 유치한 정책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올해는 노벨상 수상자 가운데 여성은 5명으로 지난 2004년 3명의 여성이 수상한 이래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한 엘리너 오스트롬 인디애나대 교수를 비롯해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한 엘리자베스 블랙번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 교수와 캐럴 그리더 존스홉킨스대 교수,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한 이스라엘의 아다 요나트, 노벨문학상을 받은 독일의 헤르타 뮐러가 그 주인공들이다.
올해까지 여성이 노벨상을 받은 것은 모두 41회로 폴란드 출신 프랑스인 과학자 마리 퀴리(Curie)가 두 차례 수상해 총 40명의 여성이 수상했다.
108년의 역사를 가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노벨상’
‘노벨상(Nobel Prize)’은 인류의 문명 발달에 학문적으로 기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으로 다이너마이트의 발명가 알프레드 베르나르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설립된 기금으로 운영되는 상이다. 노벨은 자신의 유산 약 3,100만 크로네를 스웨덴의 왕립과학아카데미에 기부했고, 아카데미에서는 이 유산을 기금으로 하여 노벨재단을 설립했다. 이 기금에서 나오는 이자를 해마다 상금에 충당하는 방식으로 1901년부터 노벨상을 수여하기 시작했다. 세계에서는 가장 권위 있는 상들 중 하나로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및 평화, 경제학의 6개 부문으로 나누어 해마다 각 선출기관이 결정한 사람에게 상금을 수여한다.
노벨재단은 스웨덴 정부가 임명하는 이사장이 관장하는 이사회에서 관리하며 수상자 심사는 물리학과 화학상은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 생리·의학상은 스톡홀롬에 있는 카롤린의학연구소, 문학상은 스웨덴·프랭스·에스파냐의 세 아카데미, 평화상은 노르웨이 국회가 선출한 5만 위원회가 분담한다. 1969년부터는 새로 경제학상이 추가되었는데 이것은 노벨기금과는 별도로 1968년 스웨덴국립은행의 창립 3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써 제정된 것으로 수상자는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에서 선출한다. 각 선출단체는 소속 의원, 과거의 노벨상 수상자, 각국의 학자·작가에게 후보자 추천을 의뢰하고 추천서를 접수한 각 단체는 극비리에 몇 사람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심사한 후 지명 공시한다. 독창성을 중시하는 노벨상은 인류에 큰 기여를 한 연구 및 발명이 있을 경우 그 아이디어를 맨 처음 만든 사람에게 상을 준다.
수상식은 노벨 사망일인 12월10일에 스톡홀름에서 거행되는데, 소개사는 수상자의 모국어로, 추천사는 스웨덴어로 하며 보통 스웨덴 국왕이 임석하여 시상하도록 되어 있다. 단 평화상은 같은 날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시상된다. 수상자는 그 후 6개월 이내에 수상업적에 관한 강연을 할 의무가 있으며, 강연 내용의 저작권은 노벨재단에 귀속된다. 상은 금메달·상장·상금으로 구성되는데, 상금은 이자율의 변동, 수상 해당자가 없었을 때의 기금의 증가 등으로 매년 그 금액이 다소 다르다.
역대 수상자들, 두 번 수상에서부터 가족 수상까지 이채로워
과거의 수상자들을 살펴보면 노벨상을 두 번 수상한 사람에서부터 가족이 함께 받은 경우까지 그 이력이 다양하다. 노벨상을 두 번 수상한 사람은 모두 네 명으로 마리 퀴리는 1903년 방사선 연구로 물리학상을 수상한데 이어 1911년 라듐과 폴로늄의 발견으로 화학상을 수상했다. 이어 1954년 화학 결합의 성질에 관한 연구로 라이너스 폴링이 화학상과 핵실험 반대 운동으로 1962년 평화상을, 존 바딘이 1956년 반도체 연구와 트랜지스터의 발명으로 물리학상과 1972년 초전도 현상의 연구로 또 한번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상을 가족이 함께 받은 경우도 있다. 1922년 물리학상을 수상한 닐스 보어와 그의 아들 오게 닐스 보어가 1975년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또 칼 만네 예오리 시그반이 1924년 물리학상을 수상한데 이어 그의 아들 카이 만네 뵈리에 시그반이 1981년 물리학상을 수상했으며 1929년 화학상을 수상한 한스 폰 오일러켈핀과 그의 아들 울프 폰 오일러가 1970년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이 밖에도 형제인 얀 틴베르헌이 1969년 경제학상을 그의 동생 니콜라스 틴베르헌이 1973년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가족이 공동으로 수상한 경우도 있다. 윌리엄 헨리 브래그와 그의 아들 윌리엄 로런스 브래그가 1915년 물리학상 공동 수상했고 칼 퍼디낸드 코리·거티 테리사 코리 부부가 1947년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또 1903년 물리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한 피에르 퀴리·마리 퀴리 부부와 그들의 딸과 사위인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이렌 졸리오퀴리 부부가 1935년 화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의 나이대도 다양하다. 1915년 엑스선을 연구한 공로를 인정 받아아버지와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로런스 브래그는 25세의 나이로 최연소 수상자로 기록된다. 최고령 수상자는 2007년, 90세의 나이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레오니트 후르비치이다.
한국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 그는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그리고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인 최초로 수상하였다.
노벨상을 거부한 사람도 있다. 리하르트 쿤, 아돌프 부테난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게르하르트 도마크, 장 폴 사르트르, 르 둑 토(黎德壽) 등 총 6명이다. 이들은 외부 압력에서부터 정치적인 이유, 본인의 의사 등으로 노벨상을 거부했다.
노벨상 후보에 오른 한국의 과학자들은 누구
응용물리학자 이휘소 박사, 조선족 한의사 출신의 유해봉 회장, 서울대 물리학과 임지순·김진의 교수 등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었던 인물들이다. 그 중 지난 1976년 작고한 이휘소 박사는 당시 입자물리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업적을 내고 있었기 때문에 생존했다면 노벨상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자주 거론되고 인물이다. 지난해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네덜란드 토프트 교수는 이휘소 박사와 비슷한 분야를 연구했던 학자로 그는 “이 박사의 이론에서 영감을 얻어 박사학위 논문을 썼으며 이후 이 박사가 이를 재해석해 주었다”며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아주 우수한 물리학자였다”고 술회했다. 이 외에도 미국에서 활동 중인 데니스 최(미 워싱턴대), 승현준(벨연구소) 씨, 김정욱 고등과학원장 등도 노벨상 후보자로 가끔 거론되고 있다.
노벨은 누구인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주인공이자 노벨상이라는 불멸의 유산을 남긴 노벨은 1833년 10월2일 스웨덴 스톡홀름 출생으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1850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4년 동안 기계공학을 배웠다. 크림전쟁 후 스웨덴에서 폭약의 제조와 그 응용에 종사하고 있던 아버지의 사업을 도와 폭약의 개량에 몰두하였다. 1863년 니트로글리세린과 흑색 화약을 혼합한 폭약을 발명하고, 그 이듬해 뇌홍(雷汞)을 기폭제로 사용하는 방법을 고안하여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이의 공업화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공장이 폭파되어 동생과 종업원이 희생되었다.
여기서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이 바로 액체라는 점에 위험의 원인이 있다고 인정하고, 1867년 이것을 규조토에 스며들게 하여 안전하게 만든 고형폭약을 완성하여 이에 다이너마이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 1887년 니트로글리세린·콜로디온면(綿)·장뇌(樟腦)의 혼합물을 주체로 하는 혼합 무연화약을 완성하였다. 어디서든 연구하기를 좋아했던 노벨은 폭약뿐 아니라 광학·기계공학·생리학과 수혈에 이르기까지 모두 355종의 특허를 등록했다.
노벨의 공장은 스웨덴·독일·영국 등에서 연이어 건설되어 1886년 세계 최초의 국제적인 회사 ‘노벨다이너마이트트러스트사’가 창설되기도 하였다. 그 동안 그의 형인 로베르트와 루트비히는 카스피해(海)의 서안에 있는 바쿠의 유전개발에 성공하여 대규모의 정유소를 건설하고 세계 최초의 유조선 조로아스타호(1877년 취항)를 사용하여 세계 최초의 파이프라인(1876)을 채용함으로써 노벨가(家)는 유럽 최대의 부호가 되었다. 그러던 중 노벨은 1888년 대전환의 계기를 맞았다. 바로 윗형의 죽음을 노벨의 사망으로 착각한 파리의 한 신문사가 잘못 내보낸 ‘죽음의 상인 노벨 사망’이라는 부고(訃告) 기사를 보고는 인류를 위해 공헌한 사람들을 위해 재산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것. 이것이 노벨재단과 노벨상이 탄생한 연유다. 평생 독신으로 살다 59세인 1896년 12월10일 세상을 떠났다.
노벨상의 이모저모
■ 노벨 수학상은 왜 없나 노벨상에서 수학분야가 빠진 이유에 대해 여러 주장들이 있으나 수학에 대한 노벨의 관심이 부족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는 노벨의 유언을 집행하고 후에 노벨재단의 책임자가 된 레그나 솔만(Ragnar Sohlman)이 제공한 자료에 근거한 해석인데 발명가이자 기술자였던 노벨은 과학분야 수상자는 반드시 발명이나 발견을 통해 실질적인 인류복지를 위해 공헌한 자라고 명시했는데 학문의 성격상 이론 위주인 수학을 실용성 있는 분야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외에도 노벨이 당대 최고의 수학자였던 마그누스 미탁레플러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수학상을 두면 그에게 첫 수상자의 영예를 안겨 주어야 해서 의도적으로 수학상을 뺐다는 얘기다.
■ 노벨의 재산이 다 떨어지면 노벨상은 사라지나 노벨상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노벨재단이다. 노벨재단은 스웨덴정부, 노르웨이정부에서 관리하는데 스웨덴 왕립과학 아카데미,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서 후원한다. 노벨의 유산을 모두 은행에 저금해서 그 이자로 노벨상의 상금을 주며 또 노벨재단에서는 노벨의 유산뿐만이 아니라 스웨덴과 노르웨이 정부에서 매년 일정 금액을 노벨재단에 기탁한다. 그리고 스웨덴, 노르웨이 외에도 많은 나라의 정부에서 노벨재단에 금액을 기탁하는 경우도 있다.
■ 노벨상의 상금은 얼마나 되나 재단의 기금운용에 따라 매년 조금씩 변한다. 처음 수상한 1901년에 15만 800크로나에서 1981년에는 100만 크로나로 99년에는 790만 크로나(약 12억 원), 2001년에는 1,000만 크로나로 해마다 증가했다. 상금은 2인이 동일 주제로 공동 수상하는 경우와 각각 다른 주제로 2인이 수상하는 경우 3인의 공동수상자가 동일 주제로 수상한 경우 각각 2등분 3등분한다. 아주 드물게 첫째 수상자에게 절반을, 나머지 두 사람에게는 4분의 1씩 나눈다. 3인의 수상자가 두개의 주제로 수상한 경우에는 제 1주제 수상자에게 상금의 절반을 그리고 나머지 절반을 가지고 다음 주제의 2인의 수상자에게 다시 절반씩 나눈다. 제 1주제에 두 사람의 수상자가 있는 경우는 상금의 1/2를 양분하고 나머지 절반을 한사람의 제2주제 수상자에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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