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 붕괴, 독일 통일의 길이 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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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붕괴, 독일 통일의 길이 열리다
  • 신혜영 기자
  • 승인 2009.11.06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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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분단 44년, 동서냉전의 상징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화해 모드

1989년 11월9일 동독의 동베를린 지역 책임자 귄터 샤보브스키는 베를린 장벽을 비롯해 동독의 모든 국경을 개방한다고 발표한다. 당시 권터 샤보브스키는 “동독시민은 외국으로 여행해도 좋고 여권은 즉시 발급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경이 개방되자 수백 만 명의 동독인들이 서독과 서베를린을 방문했다. 베를린의 브란텐부르크문은 연일 역사의 현장을 보려는 사람들로 붐볐으며 동서냉전 완화에 크게 기여했던 빌리 브란트 전 서독총리도 브란텐부르크문을 방문했다. 베를린 장벽 개방과 함께 동독의 개혁은 더욱 가속화된다.

베를린 장벽 28년만에 화해의 장벽으로
1945년 5월8일 나치스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그해 2월에 있은 미국·영국·소련의 3국 정상 얄타회담에서 독일의 처리방법을 결정한다. 그 결정 대로 프랑스까지 합세, 4개국이 분할 점령해 최고통치권을 이어받았고, 동독 안에 있는 수도 베를린도 4개국이 분할 점거하게 된다. 이 분할 독일에 대한 처리방침은 그해 8월 포츠담에서 열린 미·영·소 3국 수뇌회담에서 나온 ‘포츠담선언’으로 보다 구체화되었다. 이 의정서에 따르면 독일에 당분간은 중앙 정부를 두지 않는다고 하면서 정치·경제적 통일성의 유지에 관한 것은 명문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非)나치화, 즉 민주화에 있어서는 4개국이 제각각 그 해석을 달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국의 점령지역에서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군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1946년 12월 미·영 양국의 점령지구가 경제적 통합을 이룩함으로써 동서 분열의 빌미를 제공하였으며, 그것이 베를린봉쇄 이후 최대 현안이 된 ‘독일문제’의 실마리가 되었다. 이후 ‘독일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4개국 외무장관 회의가 종종 열렸으나, 사사건건 미국과 소련측의 의견이 대립하여 충돌, 결국 1947년 4개국 외무장관 회의가 결렬되고, 이듬해 소련측이 독일관리이사회에서 탈퇴함에 따라 그 기능도 정지되고 말았다.
이후 동·서독의 분단이 완전히 고착되자 동독에서 서독으로 월경해 오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다. 동독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동·서 베를린 사이에 40여㎞에 이르는 길고도 두꺼운 콘크리트 담장을 쌓게 되었는데, 이것은 곧 동서 냉전의 상징물이기도 하였다. 이 장벽을 쌓은 후로는 브란덴부르크문을 통해서만 허가를 받아 왕래가 허용되었다.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 붕괴에 잇따라 독일 통일이 추진되면서 1989년에 이 장벽도 다 철거되고 브란덴부르크문을 중심으로 한 약간의 부분만 기념물로 남겨졌다.

광주학생 의거, 전국적으로 6만여 명의 학생이 가담
1929년에 발생하여 전국적으로 확대된 ‘광주 학생운동’의 발단은 의외로 단순했다. 1929년 10월30일, 광주-나주 간 통학열차에서 일본인 학생 후쿠다 스에요시, 다나카 등이 한국인 여학생 박기옥, 이광춘 등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자 박기옥의 사촌동생인 박춘재가 이 일본인 학생을 폭행했다.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 사이의 패싸움과 대치는 11월3일까지 계속되었다. 문제는 11월3일이 일본의 4대 명절 중의 하나인 메이지절(明治節)이라는 것. 그날 일본인들은 대대적인 축하행사를 개최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마침 그 날은 우리의 개천절인 음력 10월3일이기도 했다. 그들은 메이지절 기념식장에서 기미가요 제창을 거부하고 침묵으로 저항하였으며 신사참배마저 거부했다.
이에 일본인 학생과 한국인 학생들은 기념식이 끝난 후 시내 곳곳에서 충돌했으며 칼로 한국 학생의 얼굴을 찌르는 등 잔혹한 폭력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경찰이 개입하여 강제로 해산시켜 더 이상의 충돌을 막았는데, 그것이 극렬한 저항을 불렀다. 일본 경찰이 가해자인 일본인 학생들을 무혐의로 방면하거나 오히려 피해를 당한 한국인 학생들을 처벌하는 등 지극히 편파적으로 사건을 처리했다. 게다가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병원까지 차별하자 한국인 학생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이에 끝내지 않고 한국 학생들의 퇴학과 무기정학의 중징계가 남발되자 마침내 학생들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시위는 단순한 폭력사태에서 벗어나 정치적 성향을 띄게 된다. 광주에서 촉발된 반체제 시위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전국적으로 6만 여명의 학생들이 일제에 맞서 시위를 벌였다. 다른 지역의 학생과 지식인들은 물론, 평범한 시민과 노동자들까지 시위에 가담했다. 나라를 강탈당하고 차별당하는 울분이 임계(臨界)치로 누적된 상태에서 광주의 학생시위가 뇌관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20세기 세계사에 폭넓은 영향을 미친 ‘러시아 혁명’
일반적으로는 1905년의 제1차 러시아혁명과 1917년의 3월 혁명(구력 2월)을 포함하는 러시아의 사회변력 혁명을 일컫는다. 1905년부터 1907년의 혁명을 소련에서는 제1차 러시아 혁명이라고 하였으며 1917년 3월(구력 2월)과 11월(구력10월)의 혁명을 소련에서는 전자를 ‘2월 혁명’ 또는 ‘2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후자를 대(大)10월 사회주의혁명‘이라고 하였다. 1905년부터 시작된 러시아 혁명이 불길이 1917년 11월7일 절정에 이른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7년 2월22일, 러시아의 수도 페프로그라드에서는 영하 20도의 강추위 속에서 빵 배급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배급품은 떨어지고 없다는 사실을 알자 굶주림과 분노에 사로잡힌 이들은 빵가게, 식료품점을 습격했다. 대부분 여성들인 이들은 가난한 병사의 아내, 그리고 여공들이었다. 이날은 10만 여 명의 노동자가 시위에 참여했고 다음날인 2월24일엔 20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그리고 2월25일, 총 파업이 일어났다. 학생들도 시위에 가담하자 황제 니콜라스 2세는 내일까지 모든 환란을 정지시키라고 명령했지만 시위대는 자꾸 불어나기만 했다. 그러나 시위대에 가담한 사람들이 대부분 병사들의 가족들이었던 탓에 진압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2월27일 마침내 병사들은 총부리를 장교들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병사들과 함께 동궁으로 몰려간 시위대는 동궁 꼭대기에 올라가 붉은 깃발을 꽂았다. 당시 시위를 주도한 병사와 노동자들은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 임시집행위원회’를 결성, 병사는 1개 중대당 1명, 노동자는 1,000명당 1명 씩 대표를 선출했다.
한편 의회는 혁명의 급진화를 막기 위해 황제를 퇴위시키고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이로써 300여 년에 걸친 로마노프 왕조는 멸망했다. 이것이 3월 혁명이다. 그리고 4월3일 레닌이 망명지 독일로부터 도착, 1917년 2월 혁명 직후 오랜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레닌은 ‘4월 테제’를 발표하며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고 외쳤다. 그가 주장한 것은 ‘의회제 공화국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전국적으로 솟아오르는 노동자, 농님의 소비에이트공화국이었다. 볼셰비키의 지도자는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으로 뛰어난 조직력과 지도력으로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켰다. 혁명임시정부인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취임한 레닌은 밖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의 교전국이었던 독일에 대해 휴전을 선포하고 안으로는 대대적인 사회주의 개혁정책을 폈다. 11월7일(구력 10월25일) 새벽, 적위대와 페트로그라드 수비대는 시가를 재빨리 장악했다. 그리고 오전 10시 볼셰비키 군사혁명위원회(위원장 트로츠키)가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1,000여 명의 적위대를 이끌고 급습함으로써 케렌스키 임시정부 타도에 성공하고,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됐음을 선언한다.
그날 밤 제2차 전 러시아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 대회는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선언, 당시 노동자와 농님의 정부인 인민위원회가 구성되고 레닌이 의장, 트로츠키가 외무위원, 루이코프가 내무위원, 스탈린이 민족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제국주의 세계질서 속에서 식민지의 민족해방 운동을 부추기기도 했던 러시아 혁명은 볼셰비키 혁명이라고 부르는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혁명이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망명지 스위스에서 급거 귀국한 지 6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결국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20세기 공산권과 자본주의권의 대립이라는 세계의 큰 틀을 만들어 냈다. 이것이 11월 혁명 ‘볼세비키 혁명’이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전 세계를 전쟁으로 끌어들인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 11월11일 미국과 독일이 휴전협정에 서명함에 따라 마침내 막을 내렸다. 제1차 세계대전은 시대적으로 슬라브족의 중심인 로마노프왕실과 독일과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함스부르크왕실과 영국프랑스 스페인 등 브르봉왕조가 지역패권과 식민지 영토 확장 등에 혈안이 되어 있고 프러시아(프로이센)를 주축으로 대독일제국을 건설한 빌헤름2세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유럽을 뒤흔들고 있을 때, 1914년 6월28일 Austro-Hungarian Emperor Franz Josef(오스트리아-항거리안 황제 프란츠 조셉) 황태자 부처( Franz Ferdinand)가 세르비아(전 유고 현재세르비아)에 군대 열병식 참가하는 길에 Sarajevo에서 한 세르비아 청년에 의해 권총으로 암살된 계기로 1차 대전이 발발하였다. 이 사라예보의 한발의 총성으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1개월만에 선전포고 곧이어 독일은 러시아에게 선전포고 영국 프랑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게 선전포고 전 유럽이 3일 만에 전쟁의 도가니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1914년 발발 이래 4년 동안 무려 2,000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다. 이 전쟁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협상국(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운 전쟁으로서, 그 배경은 1900년경의 ‘제국주의’ 개막의 시기부터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링컨, 미국 16대 대통령에 당선
켄터키주(州) 호젠빌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링컨은 어려서부터 노동을 하였기 때문에 학교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지만 독학하여 1837년 변호사가 되어 스프링필드에서 개업하였으며, 1834년부터 1841년 일리노이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847년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미국멕시코전쟁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인기가 떨어져 하원의원직은 1기로 끝나고 변호사 생활로 돌아갔다. 1850년대를 통하여 노예문제가 전국적인 문제로 크게 고조되자 정계로 복귀하기로 결심하고, 1856년 노예반대를 표방하여 결성된 미국 공화당에 입당하여, 그해 대통령선거전의 공화당후보 플레먼트를 응원함으로써 자신의 웅변이 알려지게 되었다.
1858년 일리노이주(州) 선출의 상원의원선거에 입후보하여 재선을 노리는 민주당의 S.A.더글러스와 치열한 논전을 전개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선거결과에서는 패하였으나, 7회에 걸친 공개토론으로 그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고, 1860년 대통령선거에서는 공화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 당선되었다.
1861년 3월4일 대통령에 취임하자 링컨은 “나의 최고의 목적은 연방을 유지하여 이를 구제하는 것이지, 노예제도의 문제는 아니다”라고 주장하였으나, 4월 섬터 요새에 대한 남군의 공격으로 마침내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중 그는 의회에 대하여 대통령의 권한 강화를 요청하고, 독재적 권한을 행사하여 인신보호령장의 정지, 언론집회의 자유의 제한을 강행, 반대당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여러 세력을 조정하여, 북부의 강경론자들을 누르면서 노예해방을 점진적으로 단행하는 것이었다. 전황은 처음에는 북군에게 불리하였으나, 1862년 9월 남군이 수세로 몰린 때를 노려 노예제 폐지를 예고하고 외국의 남부연합국 승인을 저지함으로써, 북부와 해외여론을 자기편으로 유도하여 전황을 일거에 유리하게 전개하는 데 성공하였다.
1863년 11월 게티즈버그국립묘지 설립 기념식 연설에서 유명한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는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불멸의 말을 남겼다. 전쟁 중인 1864년의 대통령선거에서는, 재선 전망이 불투명하였으나, U.S.그랜트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승리가 계속된 것이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해서 재선에 성공하였다. 1865년 4월9일 남군사령관 R.E.리가 애포매턱스에서 그랜트에게 항복함으로써 남북전쟁은 종막을 고하였다. 전쟁이 종막에 가까워짐에 따라 관대한 조치를 베풀어 남부의 조기 연방 복귀를 바랐으나, 남군 항복 2일 후인 4월14일 워싱턴의 포드극장에서 연극관람 중남부인 배우 J.부스에게 피격, 이튿날 아침 사망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지도 동국지도(東國地圖) 완성
동국지도는 1463년(세조 9) 정척과 양성지가 만들어 조정에 바친 지도이다. 당시의 원도는 전하지 않으나 조선전기 지도 제작기술 발달의 성과를 종합한 지도로서 의의가 있다. 1436년 세종은 정척에게 상지관(相地官)과 화공들을 데리고 함길도와 평안도 등을 자세히 살펴서 산천형세를 그려오게 하여, 정척은 1451년(문종 1)에 양계 지방을 그린 대도(大圖)와 소도(小圖)를 바쳤다.
양성지도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으로부터 조선전도, 팔도도, 각 주현도(州縣圖) 등을 만들라는 명령을 받고 화공과 상지관을 데리고 하삼도의 산천형세를 조사하였다. 세조 즉위 후 다시 양성지에게 지리지 편찬과 지도 제작을 명한 지 10년 만에 완성된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지도이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팔도지도(朝鮮八道地圖)’와 ‘조선방역도(朝鮮方域圖)’, 일본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있는 ‘조선국회도(朝鮮國繪圖)’가 이 지도와 같은 유형의 지도로 추정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본은 세로 140㎝, 가로 97㎝의 장지에 채색본이다. 이 지도는 영조대에 만들어진 정상기의 ‘동국지도’의 밑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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