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인정한 우수한 문자 ‘한글’을 기리다
상태바
세계가 인정한 우수한 문자 ‘한글’을 기리다
  • 신혜영 기자
  • 승인 2009.10.15 09: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 ‘한글’, 무한수에 가까운 소리를 표현하다

소설 「대지」의 작가 펄벅은 한글에 대해 “24개의 단순한 알파벳과 몇 가지 조합 규칙만으로 무한수에 가까운 소리를 표현해낼 수 있는 놀라운 언어”라고 극찬했다.
영국의 존 맨이라는 역사 다큐멘터리 작가는 그의 저서 ‘알파 베타(Alpha Beta)’라는 책에서 한글을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라고 소개했으며 미국의 과학전문지 ‘디스커버리’ 1994년 6월호에서는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라고 극찬한 바 있다.
한글은 탄생 기록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문자로 제자원리가 매우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문자다. 자음 17자는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ㄱ, ㄴ, ㅁ, ㅅ, o’의 기본자 다섯 자를 만들고, 이 기본자에 획을 더해 나머지 자음을 만들었는데, 이는 한글이 치밀한 관찰과 분석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 준다. 모음 11자 역시 천(天), 지(地), 인(人)을 본떠서 ‘·, ㅡ, ㅣ’의 기본자 세 자를 만든 다음, 나머지는 그것들을 조합해서 만들었다. 또한 한글은 문자의 활용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음소 문자로 초성, 중성, 종성을 모아쓰는 음절 방식의 표기 체제를 가지며 한글의 모음은 언제나 일정한 소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외국인이 우리 글자를 배울 때 쉽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 같은 한글의 과학적이고 간결한 체계 덕분에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1%에도 못 미친다. 때문에 유네스코는 세종대왕의 탄신일인 9월8일을 ‘세계 문맹 퇴치의 날’로 정하고 문맹 퇴치에 기여를 한 개인·단체에 ‘세종대왕 문해(文解)상’을 수여하고 있으며 언어 연구학의 세계최고인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언어학 대학에서는 세계 모든 문자 순위를 매겼는데 그 1위로 한글을 지정했다.


10월9일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 ‘한글’을 기념
10월9일은 세종대왕의 한글 반포를 기념하고 한글의 연구 보급을 장려하기 위해 정한 날로 대한민국에서는 10월9일로 기념하고 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1월15일에 ‘조선글날’이라 하여 기념하고 있다.
1926년 11월4일(음력 9월29일), 당시 민족주의 국어학자들의 단체인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가 주동이 되어 세종대왕의 훈민정음(訓民正音) 반포 48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식을 가지고, 이날을 제1회 ‘가갸날’로 정하였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1446년(세종 28년) 음력 9월 훈민정음이 반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음력 9월의 마지막 날인 29일을 한글이 반포된 날로 추정했다. 1926년 11월4일(음력 9월29일) 당시 민족주의 국어학자들의 단체인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가 주동이 되어 세종대왕의 훈민정음(訓民正音) 반포 48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식을 가지고, 이날을 제1회 ‘가갸날’로 정하였다. 이듬해인 1927년 조선어연구회 기관지 ‘한글’이 창간되고부터 이날을 ‘한글날’로 고치고 계속 음력으로 기념하다가, 1932년 양력 날짜로 환산, 10월29일에 기념행사를 가졌다. 다시 1934년 정확한 양력 환산법을 적용하여 10월28일로 정정하였고, 1940년 7월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이 발견되어 정인지(鄭麟趾) 서문에 반포일이 9월 ‘상한(上澣)’으로 나타났다. 상순의 끝날인 9월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9일을 한글날로 확정하였던 것이다.
1970년 6월15일, 대통령령으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제정·공포하여 공휴일로 정했다. 그러나 1990년 법정 공휴일인 기념일에서 법정 공휴일이 아닌 기념일로 바뀌었고, 2006년부터 법정 공휴일이 아닌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한글날을 전후한 주간에 정부·학교·민간단체 등에서 세종대왕의 높은 뜻과 업적을 기리고 한글의 제정을 경축하는 각종 기념행사를 거행한다.

1949년 10월1일 마오쩌둥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People`s Republic of China) 수립. 1949년 1월 공산당 세력에 패배한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 1887~1975)가 총통직을 사임하고, 곧 이어 마오쩌둥(毛澤東, Mao Zedong, 1893~1976)의 인민해방군이 베이징과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까지 점령함으로써 일본 패망 후 본격화되었던 국·공 내전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로써 공산당이 새로운 패자(覇者)가 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각계 대표를 소집하고 9월21일부터 열흘간 베이징에서 인민정치협상회의를 열어 국기·국가를 제정하고 신정부의 요직을 구성했다. 마오쩌둥과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주더(朱德)와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가 핵심인사였다. 1949년 10월1일 쾌청했던 하루, 북경 천안문 누상(樓上)에는 마오쩌둥의 거대한 사진이 걸려 있었고 군중들로 가득한 광장 곳곳에는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오후 3시, 마오쩌둥이 누상 위로 오르자, 오성홍기가 게양되고 의용군 행진곡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 이윽고 마오쩌둥이 입을 열어, “중화인민공화국이 오늘 여기에 수립됐다”라고 선언, 이 순간부터 중국대륙에는 새로운 정치실험이 시작되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존 핸콕 1793년 10월 8일 사망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으며 미국 독립선언문의 첫 번째 서명자인 존 핸콕(John Hancock, 1737~1793) 이 1973년 10월8일 세상을 떠났다.
매사추세츠주 출생으로 1754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보스턴에서 사업을 하던 삼촌의 한 상점에서 일하였는데 후에 그의 재산과 사업을 상속받았다. 그는 무역상인으로서 ‘인지조례’를 비롯한 영국의 중상주의적 식민지정책에 반대, 정계에서 급진파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765년 보스턴시(市) 행정위원, 1769∼1774년 매사추세츠 주의회 의원, 1775∼1780년 대륙회의 대표, 1775~1777년 대륙회의 의장, 1780∼1785년, 1787∼1793년 매사추세츠 주지사를 역임하였다. S.애덤스와 함께 매사추세츠 애국보수파 지도자로서 ‘독립선언서’에 최초로 서명하였다. 그는 1793년 10월8일 자손을 남기지 못한 채 56세로 사망, 소설가 헤밍웨이를 포함한 무수한 사람들이 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나섰지만, 확인된 바 없다. 오늘날 미국 보험회사 중 하나와 한 뉴욕 건물에 그의 이름이 붙여져 있으며, 미국 구축함에도 그의 이름이 걸려 있다.


1945년 10월 16일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 발족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國際聯合食糧農業機構, 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 of the United Nations, 약칭 FAO)는 1943년 5월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의 제창에 의해 개최된 식량농업회의를 모체로 하여, 1945년 10월 캐나다 퀘벡에서 소집된 제1회 총회에서 34개국의 헌장서명으로 발족했다. 모든 사람의 영양기준 및 생활향상, 식량과 농산물의 생산 및 분배 능률증진, 개발도상국 농민의 생활상태 개선, 이를 통한 세계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주요 활동은 세계농업발전 전망에 관한 연구와 각종 기술원조 계획을 이행하고 식량농업, 임산물, 어업 등에 관한 통계연감을 발행하며, 식량의 부족과 잉여에 관해 세계적 규모면에서 조정한다. 이를 위해 국제연합과 더불어 식량이 풍부한 지역의 과잉식량을 모아서 기아와 빈곤에 시달리는 지역에 분배하는 WFP(World Food Program:세계식량계획)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관련 정보를 수집 분석확산하며 정책과 기획에 관해 각국 정부에 자문하고, 정부와 전문가들이 만나서 식량과 농업문제를 논의하는 중립적인 장을 제공한다.
국제연합 전문기구 중 가장 큰 기구로서, 본부 인원 2,300명 외에도 세계 각지의 현장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2,000명의 스태프가 있으며 최고집행기관인 총회 아래 이사회와 사무국이 있으며 계획 재정 헌장 및 법률문제 상품문제 수산 임업 농업 세계식량안보 등 8개 위원회가 있다. 모든 회원국으로 구성되는 총회는 2년마다 소집되는데, 식량과 농업상태와 FAO의 업무를 점검하고 계획과 예산을 승인하며, 3년 임기로 순환되는 49개 회원국으로 구성되는 이사회와 사무총장을 선출한다. 부설기관으로 IPC(International Popular Com-mission: 국제포퓰러위원회), IPFC(Indo-Pacific Fisheries Commission: 인도태평양수산위원회), IRC(Inter-national Rice Commission: 국제미곡위원회) 등이 있다.
2008년 현재 193개의 회원국이 있으며 한국은 지난 1949년에 가입했다. 1953년에 ‘FAO와 대한민국 간의 기술원조에 관한 기본협정’을 체결했고, 동시에 ‘FAO 국제식물보호협정’에 가입했으며 총본부는 워싱턴 D.C.에서 1951년에 현재의 로마로 옮겼다.

항일 민중 봉기 제2차 동학농민운동
전라도에서 집강소(執綱所)를 각 읍 소재지에 설치하고 개혁정치의 실현을 꾀하던 전봉준(全琫準, 1854~1895)은 대원군이 섭정하고, 청·일 양국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폐정개혁을 논할 때가 아니라 항일투쟁을 벌일 때가 왔다고 판단하였다. 신곡(新穀)이 여무는 시기를 기다렸다가 9월에 접어들자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孫華中)은 광주에서 궐기하였으며, 호남 호서의 동학교도와 농민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전봉준은 전주 삼례(參禮)를 동학군의 근거지로 삼고 대군을 인솔, 일단 논산에 집결한 뒤 3방향으로 나누어 공주(公州)로 향하였으며, 각지의 수령들도 수원 옥천 등 요지를 점거하여 동학군을 원호하였다.
한편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관군과 일본군은 급히 증원부대를 요청, 동학군이 공주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만반의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1894년 10월21일 전봉준의 10만 호남군과 손병희의 10만 호서군은 관군과 일본 연합군을 공격, 혈전을 거듭하였으나 상대방의 막강한 근대적 무기와 화력으로 인해 우금치(于金峙)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하여 논산 금구 태인 등으로 퇴각하였다. 그 무렵 전봉준은 순창(淳昌)에서 재기할 채비를 하고 있었는데, 같은 해 11월 내부 배반자의 밀고로 관군에 체포되어 1895년 3월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이로써 한국 역사 이래 최초로 일어난 민중의 무장봉기인 동학농민운동(第二次東學農民運動)은 1년 동안에 걸쳐 30~40여만 명의 희생자를 낸 채 마무리되었고, 이들의 개혁의지는 이후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쳐 위정자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게 되었으며, 갑오개혁(甲午改革) 등 정치적 혁신을 가져왔다.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 도래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은 1929년 10월 뉴욕증권시장에서 일어난 일련의 주가 대폭락 사건으로 10월24일 목요일과 10월29일(일명 ‘검은 화요일’)의 주가 대폭락을 가리킨다. 1929년 9월3일 다우존스 공업 평균지수는 당시 신기록이던 381.17이었으나 10월24일 장이 마감될 시점에 이 지수는 299.47로, 20% 이상 하락하였고, 이 날 하루 동안 1,290만 주가 팔리면서 종전의 400만 주 기록이 깨졌다.
오후 12시30분에 시카고와 버팔로 거래소가 문을 닫았지만 이미 11명의 투기가가 자살한 뒤였다. 오후 1시에 월 가의 중개인들이 유에스 스틸을 비롯한 여러 상장사의 주식을 훨씬 높은 값에 매입하는 데 합의하면서 폭락은 잠시 진정되었지만, 이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10월29일에 다우 지수는 230.07을 기록했으며, 하루 동안 무려 1,640만 주가 팔렸다. 이로써 증권시장은 완전히 붕괴되었는데 그 원인은 투기의 만연, 본질상 부채를 창출할 수밖에 없는 지주회사와 투자신탁회사의 확산, 그리고 청산이 불가능한 대규모 은행대부의 증가 등이었다.
주식시장의 붕괴로 경기는 계속 후퇴를 거듭해 1932년까지 미국 노동자의 1/4이 실직했으며(1932년 7월8일의 다우지수는 41.22, 지수가 발표되기 시작한 1896년부터 2007년까지의 기간 동안 가장 낮은 값임) 불황은 정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쳐 극단세력이 확산되고 자유민주주의의 위신이 떨어지는 중대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1933년 3월에 행정부의 수반으로 취임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을 내세워 공황에 대한 대책을 강구했으나, 경제가 완전한 회복기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제2차 세계대전까지 기다려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력 및 군수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기술진보가 촉진되자 경기회복의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나주역 사건 ‘광주 항거’ 시작
1929년 10월30일 광주발 통학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한 오후 5시30분쯤 기차에서 내린 일본인 중학생들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인 박기옥, 암성금자, 이광춘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는 분노하여 항의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난투극이 벌어졌는데, 박준채는 후에 일본인 중학생 후쿠다가 ‘조센징’이라는 인종 비하 발언을 하는 무례함에 격분했다고 회상하였다. 이를 본 일본 경찰들이 일본인 학생 편을 들자 광주고보 학생들은 차별에 대해 집단 항의하였다. 다음 날부터 며칠 동안 광주 시내 분위기는 살벌해졌고 11월3일에는 마침내 억눌렸던 민족감정까지 폭발해 광주 전역의 학생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지로 진출했던 것이다. 하루 동안 40여 명의 학생들이 체포됐으나 이날은 시작일 뿐이었고, 이듬해 3월까지 전국적으로 194개 학교 5만 4,000여 명이 시위에 참가, 퇴학 582명, 무기정학 2,330명, 검거 1,462명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은 3·1운동 후 국내에서 일어난 최대 규모 항일운동으로 후에 광주학생독립운동(光州學生獨立運動) 또는 광주학생항일운동(光州學生抗日運動)이라 불렸다. 이 사건은 나주역 사건이 시발이 되어 1929년 11월3일 광주에서 일어나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학생독립운동이다. 현재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는 단체인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가 있으며, 오늘날 11월3일을 ‘학생독립운동기념일’, 통칭 ‘학생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