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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백제 1대조인 온조왕 13년(BC 6)에 산성을 쌓고 남한산성이라 부른 것이 처음’이라고 기록돼 있다. 그 뒤로 신라 문무왕, 조선 선조와 광해군 때에 개축했다고 전해온다.
그러다 인조를 공주 공산성으로 피신하게 만들었던 이괄의 난을 계기로 인조 2년(1624)부터 2년 동안 대대적으로 개수한 것이 오늘날의 남한산성이 되었다.
남한산성은 숲이 좋다. 특히 남문에서 서문을 거쳐 북문에 이르는 탐방로 주변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하다. 서울 근교에 이처럼 아름답고 울창한 소나무 숲이 남아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수령이 70~90년에 이른다는 이곳의 소나무들은 일제강점기에 주민 3백3명이 벌목을 금지하는 금림조합(禁林組合)까지 결성해서 보호한 덕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시원스런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찾아가기도 편리한 남문~서문~북문 구간에는 걷기를 즐기는 트레커(trekker)들보다는 삼삼오오 짝을 이뤄서 놀러 온 행락객들이 많다. 그래서 다소번잡하고 어수선하지만 소나무숲 특유의 청신한 기운이 사람들의 기분을 밝게 만든다. 더욱이 성벽 길 곳곳에 탁 트인 전망터가 형성돼 있어서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상쾌한 조망을 누릴 수 있다.
북문(전승문)을 지나면 성벽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수는 눈에 띄게 줄어든다. 숲도 소나무 일색에서 소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등이 뒤섞인 혼합림으로 슬그머니 달라진다. 그러다 2.9킬로미터에 이르는 북문~동문(좌익문) 간의 중간쯤에 위치한 동장대 암문을 지나서부터 소나무는 찾아보기 어렵고, 단풍나무와 참나무가 주종을 이루는 활엽수림으로 바뀐다.
그 숲을 가로지르는 길은 적막강산처럼 인적이 뜸하다. 덕택에 새소리, 바람소리가 한결 가깝게 들려온다. 녹음 짙은 숲을 쓰다듬듯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유난히 맑고 시원스럽게 느껴지는 구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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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장대 옛터와 동문 사이에는 장경사 신지옹성과 장경사가 자리 잡고 있다. 그중 옹성은 성벽을 기어오르려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해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시설이다.
본성의 성벽 아래에는 옹성으로 통하는 암문이 설치돼 있어서 적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드나들 수 있다.
장경사는 산사다운 고즈넉함과 호젓함이 돋보이는 절집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수할 당시 축성공사에 동원된 승군들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새로 세운 여러 절집 가운데 하나다. 축성공사에 동원된 승군들은 공사가 끝난 뒤에도 성곽 방어에 필요한 훈련을 받으며 계속 주둔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