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36년의 역사, 나라의 ‘빛’을 되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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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36년의 역사, 나라의 ‘빛’을 되찾다
  • 신혜영 기자
  • 승인 2009.08.10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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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식민통치에서 해방, 대한민국 정부 수립… 잃었던 국권 회복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는 2시간 29분19초 2라는 당시로는 경이적인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면서 우승했다. 손기정 선수에 이어 남승룡 선수도 3위로 입상하며 마라톤 한국의 위세를 전 세계에 과시했다.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제패는 전 한국인의 가슴마다에 민족얼을 일깨우고 조국광복의 열망을 일게 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동아일보가 일장기를 지워 내보내자 ‘일장기 말소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격분한 일본 총독부는 기자 8명을 구속하고 동아일보는 8월27일자로 4번째의 무기정간을 당하는 진통을 겪었다.

 

한국의 국호마저 박탈한 ‘한일병합조약’
통감정치(統監政治) 이후 실질적인 통치권을 모두 일본에 빼앗겨 형해화(形骸化)한 한국을 국호마저 박탈하려던 ‘한일병합조약(한일합방조약)은 1909년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죽인 이후에 표면화하였다. 1910년 6월30일 일본은 한국의 경찰권을 빼앗은 다음, 7월12일 ‘병합 후의 대한(對韓) 통치방침’을 마련해서 조선통감으로 임명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이를 휴대하여 부임케 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한일병합 공작을 전개하였다.
 

8월16일 데라우치는 총리대신 이완용과 농상공대신 조중응(趙重應)을 통감관저로 불러 병합조약의 구체안을 밀의(密議)하고, 18일 각의(閣議)에서 합의를 보게 한 다음 22일 순종황제 앞에서 형식만의 어전회의를 거치게 하고 그날로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조인을 완료하였다. 조약의 조인 사실은 1주일간 비밀에 부쳐졌다가 1910년 8월29일 이완용이 윤덕영(尹德榮)을 시켜 황제의 어새(御璽)를 날인하여 이른바 칙유(勅諭)와 함께 병합조약을 반포(頒布)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27대 519년 만에 멸망하고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편, 서울대 이태진 교수(국사학)에 의해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대한제국의 국새가 찍혀 있지 않고 황제 순종의 친필 서명이 없어 국제법적으로 무효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태진 교수는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중인 1910년 8월29일자 순종 황제의 칙유문등 일한병합조약과 관련된 문서들을 분석한 결과 칙유문에는 국새가 찍혀있지 않고 모든 법령에 들어가는 황제의 친필 서명이 없는 대신 행정적 결재에만 사용한 어새만이 찍혀 있어 국제법적으로 무효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이를 입증하는 칙유문 등 4건의 문서사본을 공개했다.

 

8월15일 잃어버린 나라의 ‘빛’을 되찾다
진주만 공격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이 미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의 반격으로 수세에 몰리다가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투하된 사상 최초의 원자탄으로 전의를 상실하고 소련의 대일참전으로 마침내 포츠담선언의 수락의사를 연합국에 통보, 1945년 8월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1910년 8월부터 시작된 36년간의 식민통치의 막을 내렸다.

그 동안 대한제국민은 끊임없는 저항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1919년 중국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며 국내·외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일본은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벌여 패색이 짙어지자 항복하였고, 식민지 통치 하에 있던 대한민국도 해방되었다. 그리고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난 날과 독립국으로서 정부가 수립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 10월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매년 8월15일을 ‘광복절’이라 하고 국경일로 지정하였다. ‘광복’이란 ‘빛을 되찾다’는 뜻으로서 잃었던 국권의 회복을 의미한다. 이 날은 대통령이 참석하는 독립기념관의 경축식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기념행사를 거행한다. 전국의 모든 가정에서 태극기를 게양하도록 권장하고, 정부는 저녁에 외교사절 등을 초청하여 경축연회를 베푼다. 기념식에서는 정인보가 작사하고, 윤용하가 작곡한 ‘광복절의 노래’가 연주되며 광복회원 및 그 가족에 대한 우대조치로 8월14~16일까지 전국의 철도·시내버스 및 수도권 지하철을 무임승차하게 하고, 고궁 및 공원도 무료입장하도록 하고 있다.

한편, 한국을 통치하였던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接收)하기 위해 미·소 양군이 38도선을 경계로 분할 진주함으로써 국토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할 민족적 비운이 8.15광복의 환희와 더불어 또 다시 이 땅에 그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최고의 한방의서 ‘동의보감’ 완성
‘동의보감’은 선조 30년(1597) 임금의 병과 건강을 돌보는 어의 허준(1546∼1615) 선생이 선조의 명을 받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의학서적을 하나로 모아 편집에 착수하여 광해군 3년(1611년 8월6일)에 완성하고 광해군 5년(1613)에 간행한 의학서적이다. 이는 총 25권25책으로 금속활자로 발행하였다. 허준은 선조 7년(1574) 의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내의원의 의관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임금을 모시고 의주까지 피난을 갔으며, 그 공을 인정받아 공신으로 추대되었으나 중인신분에 과하다는 여론이 일자 취소되었다. ‘동의보감’은 그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 16년간의 연구 끝에 완성한 한의학의 백과사전격인 책이며, 허준 선생은 이외에도 중국의 의학서적을 국역하는 데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동의보감’은 모두 23편으로 내과학인 ‘내경편’ ‘외형편’ 4편, 유행병·곽란·부인병·소아병 관계의 ‘자편’ 11편, ‘탕액편’ 3편, ‘침구편’ 1편과 이외에 목록 2편으로 되어있고, 각 병마다 처방을 풀이한 체제정연한 서적이다. 이를 허준은 우리 실정에 맞는 의서라 하여 ‘동의보감’이라 이름하였으며, 훈련도감자본으로 발행되었다. 이 책은 중국과 일본에도 소개되었고, 현재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한방의서로 인정받고 있다. 보물 제1085호로 지정된 동의보감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 1614년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에 보관되어 있다.

허준은 조선 중기의 의학자로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岩),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1574년(선조 7) 의과(醫科)에 급제하여 이듬해 내의원의 의관(醫官)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어의(御醫)로 의주(義州)까지 왕을 호종(扈從)하고 돌아와 그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록된 뒤 양평군(陽平君)에 봉해지고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으나 대간(臺諫)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치료를 소홀히 했다는 죄로 한때 파직되었다. 1610년 16년 동안의 연구로 ‘동의보감’을 완성하였다. 감교관(監校官)은 내의원 직장(直長) 이희헌(李希憲), 부봉사(副奉事) 윤지미(尹知微)였으며, 서문은 이정구(李廷龜)가 썼다.

 

‘전환국’ 조선사회 근대적 화폐제도 도입의 선구적 역할
1883년 8월10일 당면한 재정위기를 보완하고 문란해진 통화정책을 정비할 목적에서 독립된 상설조폐기관인 전환국을 서울에 설치하였다가, 1892년 인천으로 이전하였다. 여기에는 일본인의 영향력이 강한 인천에서 자본과 기술을 미끼로 조선의 화폐권을 침탈하려는 일본의 속셈이 있었다.

그러나 1900년 전환국이 다시 용산으로 옮기게 되면서 일본의 속셈은 좌절되었다. 1898년을 앞뒤로 자주 독립에 대한 자강의지가 사회적으로 팽배하였으며, 일본과 대립하던 러시아를 배경으로 일본의 침탈을 저지하려고 광무정권이 조치를 취한 것이다.

1883년 이후 1904년에 이르는 21년 동안 전환국에서 주조한 화폐총액은 18,960,658원 87전인데 그 중 백동화는 16,743,522원 65전으로서 주조총액의 88%를 차지하였다. 백동화의 남발과 위조, 일본에서의 밀수입 등으로 국내의 통화량이 급증, 화폐가치가 폭락하고 물가가 폭등하는 등 국가재정과 경제를 병들게 하였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환국의 설립은 조선사회에 근대적 화폐제도를 도입하는데 선구적 역할을 하였지만, 1904년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에 의해 폐지되고 말았다.

 

민족지 ‘제국신문’ 창간, 자주독립 사상 고취
개화기에 있어서 신문의 중요성을 깨달은 선구자들은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신문발간을 추진하였다. 1883년 한성순보를 효시로 1896년 4월7일에는 독립신문이, 1898년에는 매일신문이 창간되었고 이어 같은 해 8월10일 제국신문이 창간되고 9월5일에는 황성신문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1898년 8월10일 이종일(李鍾一)에 의해 제국신문(帝國新聞)이 창간하였다. ‘제국신문’은 창간호부터 1910년에 폐간될 때까지 한말의 대표적 민족지로서 ‘황성신문(皇城新聞)’과 함께 가장 오랜 발행실적을 기록하였으며, 특히 한글전용을 고수하여 일반 서민층과 부녀자들 간에 독자가 많았다. 제국신문은 순국문판 신문으로 제호를 이라 하였고, 서민층과 부녀자를 대상으로 자주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데 주력했으며 황성신문과 더불어 양대 민족지로서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 신문에는 이종일을 비롯하여 이승만(李承晩)도 초기에는 논설을 집필하였고, 최강(崔岡)·장효근(張孝根)·정운복(鄭雲復)·이인직(李人稙)·이해조(李海朝)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폐간될 때까지 경영의 어려움과 일제의 탄압으로 인한 필화사건 때문에 여러 차례 정간당하기도 하였으나, 국민의 문명개화와 자주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경영난으로 휴간하려고 할 때마다 국내외 유지들의 도움을 받았다. 또, 처음에는 제호도 ‘뎨국신문’으로 한글을 사용하였으나, 1903년 7월7일부터는 한자로 바꾸었고, 본문은 한글을 전용하여 국한문을 혼용하던 ‘황성신문’과는 색다른 특징을 보여주었으며, 한글의 보급과 대중화에 큰 업적을 남겼다. ‘제국신문’에는 이인직의 신소설 ‘혈(血)의 누(淚)’ 속편과 이해조의 ‘고목화(古木花)’ 등이 연재되기도 하였다.

 

풀턴, 최초의 첫 정기기선 실험 성공
미국의 발명가인 로버트 풀턴(Robert Fulton/1765년 11월14일~1815년 2월24일)이 리빙스턴과 공동으로 150t급 외륜기선(外輪汽船) 클러몬트호를 건조하여 1807년 8월17일 세계 최초로 허드슨강의 뉴욕~올버니 간 150마일 처녀항해에 성공하였다. 이 배의 기관은 버밍엄의 볼튼와트 상회 제품이었다. 최초 기선 발명자는 아니었지만 이것은 경제적으로 성공한 세계 최초의 정기기선으로 미국정부는 풀턴에게 기선항해의 독점권을 줌으로써 그의 사업을 보호해 주었다.

폴턴은 펜실베이니아주(州) 리틀 브리튼 출생으로 3살 때 아버지를 잃고 독학으로 그림을 배우다가 기계학과 수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1786년 런던으로 건너가 1793년경까지 벤자민 웨스트의 제자로 그림을 공부하다가 브리지워터 공작, 스터냅 백작 등을 알게 되어, 운하와 선박을 개량하는 문제에 대한 의논에 응하였다. 특히, ‘운하항행의 개선에 대하여 Treatise on the Improvement of Canal Navigation’(1793)을 저술, 그 계획을 데이강(江)에 실현시켰다. 그 후 이 계획을 파리~디에프 간 운하에 적용하기 위하여 1797∼1806년까지 프랑스에 체재하였는데, 그 동안에 잠수정(潛水艇)·수뢰정(水雷艇)의 실험을 하였다. 그리고 기선항행에 관심을 가진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 리빙스턴의 원조를 받으며, 1803년 센강에서 기선의 실험을 시도하였다.

 

러시아의 항해가 베링, 현재의 알래스카 발견
18세기 러시아의 탐험가 베링(Vitus Jonassen Bering/1681~1741년 12월19일)은 표트르 1세를 알게 되어 러시아 해군에 근무하였다. 아시아(시베리아)와 아메리카가 육지로 연결되었는지를 조사하기 위하여 1725∼1730년 제1회 캄차카 탐험을 행하였다. 1728년 7월13일 대원 44명과 함께 북위 67°18´, 서경 167°지점까지 가서 두 대륙 사이에 해협이 존재함을 확인하였다(뒷날 그의 이름을 따서 베링해협이라 하였다). 1733∼1743년 제2차 캄차카 탐험대를 조직하여 1741년 8월20일 북아메리카 해안과 알류샨 열도 일부(현재의 알래스카)를 발견하였다. 지세적(地勢的)으로는 북변(北邊)에 브룩스산맥이 동서로 뻗어 있고, 태평양쪽으로는 알래스카산맥이 부채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이 두 산맥 사이를 거의 병행하며 유콘강이 알래스카 중앙부를 가로질러 베링해협으로 흘러든다. 남쪽 연안에는 랭겔산맥·추가츠산맥이 있고, 알류샨산맥이 알래스카반도와 알류샨열도의 등뼈를 형성하며 서쪽으로 뻗어, 그 끝은 애투섬과 키스카섬에서 동경 172°30´에 달한다.

한편, 베링은 괴혈병에 걸려 돌아오는 길에 캄차카반도 부근 코만도르 제도 아바차섬(베링섬)에서 난파하여(11월 초) 그 섬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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