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를 앞세우고 순항하던 세계 경제가 최근 들어 지뢰밭을 걷는 듯한 모습이다. 국제 원자재 가격 폭등, 테러 발생 등과 같은 지뢰가 터질 때마다 주요국의 주가와 환율이 요동을 치고 있다. 이 와중에 우리 경제는 계속되는 내수 침체에다 탄핵 같은 정치불안이 겹치면서 1997년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세계 경제 환경의 불안정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지표는 금값. 2001년 초반만 해도 온스당 250달러대였던 금값은 같은 해 9월 11일 미국에서의 테러 사태 이후 수직상승하기 시작, 최근에는 온스당 400달러를 웃돌고 있다. 1996년 이후 8년 만에 최고치다. 특히 7대 국회에 입성한 민주노동당은 분배론을 주장하고 나서 재계를 긴장시키며 상생의 여야가 술렁거리고 있다.
세계 경제가 요동치고 있다.
통상 인플레이션이 지속될 때 오르던 금값이 물가가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는데도 급등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경우다. 투자자들이 그만큼 불안해한다는 뜻이다. 이같은 금값 상승의 원인, 즉 세계 경제의 지뢰를 하나씩 살펴보자.
미국인들이 요즘 가장 즐기는 스포츠는 무엇일까? 미식축구, 야구, 아니면 섹스? 정답은 ‘개인 파산’이다. 최근 수년 간 한 해 150만명이 넘는 미국인들이 빚을 갚지 못해 법원으로부터 파산선고를 받았다. 또 작년 4분기 미국인들의 신용카드 연체율은 4.4%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 일본·독일·홍콩·싱가포르 등에서도 개인 및 기업 파산이 급증하는 상태이다. 특히 경기침체가 계속되고 있는 우리나라와 독일의 경우, 수많은 개인들이 신용위기에 빠져들면서 향후 경기회복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 로이터 국제상품지수(원유·천연가스·금·구리·밀·콩 등 17개 주요 원자재 품목의 가격지수)는 20년 만에 최고치를 연일 경신하고 있다. 세계 경제의 동반 회복, 중국의 원자재 수요 급증, 자원개발 투자부진으로 인한 수급 불균형, 달러화 약세 등에다 투기세력이 원자재 시장에 유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작년에 비해 20% 정도 오른 국제 원자재 가격이 앞으로도 5∼20%는 더 오를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전세계적인 저금리 현상은 부동산 시장 과열이라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미국의 주택가격은 작년까지 4년 연속 매년 7.5% 이상의 상승률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과 독일을 제외한 영국·호주·홍콩 등 대부분의 선진국들도 비슷한 상황이다. 중국의 경우에도 작년 4분기 상하이 지역의 부동산 가격이 전년대비 29.1% 오르는 등 과열 징후를 보이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부동산 가격이 급격히 떨어질 경우, 거품붕괴에 따른 후유증은 일본과 홍콩에서 보는 것처럼 악영향이 경제 전체로 파급될 것이다. 이를 우려한 영국과 호주는 이미 작년 하반기부터 금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환율과 주가의 급등락도 내로라하는 불안 요인이다. 세계 3대 통화인 달러·엔·유로 간의 기(氣) 싸움이 작년 초 이후 계속되고 있다. 서로 자국 통화를 약세로 가져감으로써 수출증가를 통해 경기를 부양하려는 속셈이 있기 때문이다. 작년 한 해 유로가 달러에 대해 17%나 강세를 보인 유로지역(유로를 사용하는 12개 회원국)의 경우, 작년 수출이 전년대비 -2.9%로 부진했다. 이 바람에 유로지역의 성장률은 2002년 0.9%에서 작년에 0.4%로 떨어졌다.
여기에다 1994년부터 달러당 8.28위안에 고정시키고 있는 중국에 대한 위안화 절상압력도 만만찮은 변수다. 절상 여부는 물론 절상폭(5~30%)에 대한 추측이 분분할 뿐만 아니라 위안화의 평가절상(환율 인하)이 중국은 물론 미국과 한국 등 주변 국가에 미칠 영향 또한 논란거리다.
올 들어 주요국 주가의 특징은 널뛰기 장세. 테러 소식은 물론이고 소비자 신뢰지수나 고용지표의 발표에 따라 급등락을 계속하고 있다. 주가가 작은(?) 뉴스에도 급등락한다는 것은 그만큼 투자자들이 불안한 상태라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신용불량자 400만명 시대’
한국은 경제 사각지대
이같은 세계 경제의 지뢰들을 우리 경제는 몇 개나 피해갈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모든 것이 해당된다. 우리나라는 작년 한 해 동안 110만명이 늘어나면서’신용불량자 400만명 시대’를 맞고 있다. 최근 정부가 부랴부랴 대책을 내놓았지만 선거용 선심정책이라는 비판에다 효과를 보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국제 원자재 가격의 폭등은 거의 모든 원자재를 수입해다 쓰는 우리 입장에서는 가히 메가톤급 폭탄 테러라고 할 수 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원자재를 구하지 못해 가동을 중단하는 공장들이 늘어나고 있다. 수출입 물가의 상승에 이어 생산자 물가가 전년 동기대비 4%대로 뛰어올랐다.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도 4%를 넘어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여기다 부동산 시장은 서울 용산의 시티파크 분양에서 본 것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와 같은 상태가 계속되고 있고, 주가와 환율도 어느 나라 못지 않게 요동치고 있다. 게다가 중국 위안화의 평가절상 여부는 직접적인 영향권에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 중의 하나다.
이런 지뢰밭 속에서 속이 썩을 대로 썩고 있는 게 우리 기업과 소비자들이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선뜻 투자와 소비에 나설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작년 한 해 민간소비와 설비투자가 각각 -1.4%, -1.5%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그나마 수출이 15.7% 증가하면서 호조를 지속했기 때문에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3.1%나마 건질 수 있었다.
올해 우리 경제는 4∼5%대의 성장률을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수출과 내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가 지속될 경우, 올해 체감경기는 작년보다 더 나빠질 것이다. 특히 삼성과 LG 등 일부 잘나가는 그룹을 제외하면 나머지 기업들의 체감경기는 더 차가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지난 3월 16일 독일의 한 경제일간지가’국제통화기금(IMF)이 올해 세계 성장률을 작년 9월의 추정치 4.1%에서 4.6%로 올릴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IMF 측은 공식 확인을 거부했지만 상당히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IMF가 세계 성장률을 상향조정한 배경이 무엇일까?
한마디로 세계 2대 경제권인 미국과 일본 경제의 호조 지속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IMF는 미국의 올해 성장률을 당초 3.9%에서 4.6%로, 일본의 성장률을 1.4%에서 3.1%로 올려잡았다. 올해 미국과 일본은 지뢰밭을 무사히 피해갈 것으로 본 것이다. 세계 경제규모의 40%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과 일본이 이처럼 호조를 보인다면 다른 나라들도 덕을 볼 수밖에 없다. 지난 2월 말 방한한 호르스트 쾰러 IMF총재는 올해 우리나라 성장률도 당초 4.7%에서 5.5%로 상향조정했다고 밝혔다.
이같은 IMF의 전망이 맞아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나 전망은 전망일 뿐이다. 우리 정부는 물론이고 기업과 국민들은 최악의 경우에도 대비해야 한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삼성’빼면 한국의 수출은 사실상 제자리걸음
“중국 성장 멈추면 한국 수출도 스톱 가능성”
지난해 우리나라 수출(통관기준)이 1943억 3,000만달러(약 233조 2,000억원)로 사상 최대였다. 전년보다도 19.6%가 늘어난 수치다. 올 들어서도 2월 수출증가율은 월별 증가율로는 15년 6개월 만에 최고치인 45.9%(전년대비)가 늘면서 신기록 행진은 이어지고 있다. “한국 경제는 수출이 먹여살린다”는 말이 수치상으로는 전혀 과장이 아니다.
하지만’수출 대호황’의 분위기에서도 수출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쏟아진다. 우선 단기간으로 원화 가치 상승과 각국의 수입규제 강화, 원자재 가격 폭등이 예고돼 있어 올해 수출 증가율 둔화와 무역수지 흑자규모 감소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지난 3월 28일 발표한’2003년 중 무역수지 및 교역조건 동향’에 따르면 교역조건은 1988년 이후 최악이었다. 이번 조사에서 작년도 순상품 교역조건지수는 89.0으로 2002년의 95.0에 비해 6.3%가 하락했다. 수출단가지수를 수입단가지수로 나눈 순상품 교역조건지수(2000년=100)는 수출 1단위로 가능한 수입량을 의미하며, 이 지수가 떨어지면 수출업체들의 채산성이 악화됐음을 의미한다.
단순한 교역조건의 악화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가 구조적으로 안고 있는 수출 건강성 전반에 대한 각종 적신호들이다. 우선 5∼10개의 극소수 품목에 전체 수출의 절반 안팎을 의존하는 수출 편중성이다. 음식도 편식하면 엄청난 부작용이 생기듯 수출 구조도 마찬가지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반도체, 자동차, 무선통신기기(휴대전화), 컴퓨터, 선박 등 5대 품목의 수출 비중이 2001년 38.9%, 2002년 42.4%에 이어 2003년 43.2%로 계속 높아지고 있다. 올 들어선 2월까지 46.1%를 차지할 정도다. 석유제품, 합성수지, 철강판, 영상기기, 자동차부품 등을 추가한 10대 품목 비중도 같은 기간 54.8%, 56.6%, 57.9%로 주요 품목에 대한 편중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이같은 편중성에서 주목되는 부분은’삼성전자 착시(錯視)현상’이다. 지난 2월 한국기업은 193억달러어치를 수출했다. 작년 2월보다 무려 45% 급증, 월간 기준 사상 최대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하지만 수출 1등 공신의 대부분은 삼성전자 제품이다. 수출 상위 10개 종목 중 자동차와 화물선을 빼면 LCD 컴퓨터부품 집적회로 등 대부분이 삼성의 주력 제품이기 때문이다. 실제 삼성전자의 수출 비중은 2001년 10.9%에서 지난해에 14.8%로 확대됐으며 올해는 15%를 훨씬 웃돌 전망이다.
품목이나 특정업체에 대한 편중 못잖게 특정 국가나 지역에 편중되는 현상도 간과할 수 없다. 그동안 한국 수출의 최대 시장이었던 미국은 이미 지난해 우리 수출 비중에서 17.7%를 기록, 중국(18.1%)에 밀렸다. 최근 한국의 수출시장에서 미국 대신 중화권(중국, 홍콩, 대만)에 대한 의존도가 급격히 늘어 2002년 전체 수출에서 중화권 시장의 비중이 24.9%에서 지난해 29.3%, 올들어선 30.6%로 3분의 1에 육박했다. 전문가들은 중국의 성장이 멈추면 한국 수출도, 한국 경제도 따라 망할 수 있다는 점을 늘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중소기업 한달에 400곳 문닫는다
中企人 64%“정부 안이한 인식이 문제”
경영난으로 경매로 넘어가는 중소기업 공장들도 속출, 올해 수도권지역 공장 경매 건물은 월평균 160건으로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50% 급증했다. 현재 전국에서는 매월 400개 안팎의 중소기업들이 문을 닫고 있다. 이미 3만여개의 중소업체들이 중국으로 떠난 데 이어 남은 업체들도 고임금에 내수 부진, 원자재 가격 상승 등 삼중고(三重苦)에 시달리고 있다.
본지 산업부가 중소기업인 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현재 경제 상황이 위기가 아니다’고 응답한 CEO(최고경영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응답자의 62%가 ‘회사 경영을 그만두고 싶다’고 답했다. 또 응답자의 60%가 외상대금을 제때 지급하지 못하고 있으며, 16%는 ‘외상대금 지급이 한 달 이상 늦어진다’고 답했다.
설문에 응한 중소기업 CEO들은 경제 회복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요인으로’정부의 안이한 경제 인식’(64%)과 노사 갈등(26%)을 가장 많이 꼽았다. 주방기기 제조업체 대양에스티 강정구(57·경기도 광주) 사장은“원자재가격은 작년보다 36% 이상 올랐는데도 대기업 납품가는 오히려 5%나 깎여 도저히 지탱하기 힘들다”면서“그런데도 인건비 상승이 불가피한 주5일제까지 하겠다고 하니 정말 답답하다”고 말했다.
민간연구기관 잇달아 하향 검토
유가폭등과 차이나 쇼크, 국제금리 상승 등 대외경제여건이 잿빛으로 변한 가운데 경제정책까지 혼미를 거듭하면서 민간연구기관들이 잇따라 경제성장률 전망을 하향 조정할 뜻을 비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일부 연구기관에서는 고유가 상황이 장기간 지속될 경우를 상정해’경기침체 속 물가앙등’을 뜻하는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까지 경고하고 나섰다. 여기에 우리 경제를 지탱해온 수출마저 위축될 기미를 보이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은’총선 이후 한국경제 전망 및 과제’라는 주제의 포럼에서“지난달 말 경제성장률을 5.0%로 상향조정했으나 대(對)중국수출 둔화분이 내수 쪽에서 채워질 가능성이 작아 이를 반영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며“대내외 악재들을 모두 고려하면 성장률이 최악의 경우 3.5%까지 곤두박질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허찬국 한경연 거시경제연구센터 소장은“여러 요인을 담아 오는 6월 공식 리포트를 낼 계획인데 현실적으로 하향 조정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LG투자증권도 지난 11일 올 성장률 전망치를 종전의 4.6%에서 4.4%로 내렸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본부장은 “얼마 전 성장률 전망치를 상향 조정한것은 수출이 받쳐주고 하반기 이후 투자가 살아날 것이라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당장 전망을 수정할 필요는 없지만 미국 금리인상의 여파로 투기자금 이탈이 급속히 진행될 경우 결국 하향 조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달 들어 11일까지의 수출액은 55억3,100만달러로 전월 같은 기간의 60억 5,300만달러보다 5억달러 가까이 감소, 수출증가세가 한풀 꺾이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올 성장률에 경고등이 켜진 가운데 일부에서는 최악의 대내외 상황을 상정해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까지 내놓고 있다. 이 같은 전망은 고유가 등 대외여건 악화 물가상승 구매력 저하 소비위축 내수침체 장기화, 수출하강이라는 시나리오를 염두에 둔 것이다.
허찬국 소장은“현재는 분명히 위기상황”이라고 진단한 뒤“고유가 지속은 실물경제 악화와 더불어 물가상승을 유발해 스태그플레이션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정문건 삼성경제연구소 전무는“성장률 조정 여부는 6월에 결정할 방침”이라면서도“대외여건이 악화하는 시점에 정책 불확실성이 지속되면 경기가 하반기에 꺾일 수 있다”며 정부 사이드의 마찰요인을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