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예화랑, 이환권 개인전 개최..."실존과 허구의 기묘한 감각을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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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예화랑, 이환권 개인전 개최..."실존과 허구의 기묘한 감각을 깨운다"
  • 오형석 기자
  • 승인 2021.07.02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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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매거진] 사람을 길게 늘리거나 납작하게 만들어 착시를 일으키는 조각으로 유명한 이환권 작가가 이번에는 한 차원 더 새롭게 변화한 신작을 선보인다.

이번에는 '그림자'를 테마로 하여 오랜 시간 작가의 실존과 허구에 대한 고민을 압축하여 담았다. 이차원의 그림자로부터 살아 숨 쉬는 듯한 삼차원의 인물까지 작가만의 고유한 시각으로 재탄생된 여러 인물과 사물은 전시장 안에서 실존과 허구의 경계를 절묘하게 넘나들며 보는 사람에게 기묘한 감각과 호기심을 유발하고, 자신이 바라보는 현실
자체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환권 작가는 동시대의 보통 사람들이 가진 내면을 함께 고민하고 작품으로 풀어내어, 대중들에게는 물론 세계적인 컬렉터들까지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부재, 흔적 그리고 허상 - 이환권의 그림자 미학
                                 임성훈(미학, 미술비평가)

프롤로그

제임스 조이스는 《죽은 사람들(The Dead)》에서 “부재는 현존의 최고 형식(Absence, the highest form of presence)”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의 의미를 여기서 상세하게 논할 수는 없지만, 이환권의 그림자 작업의 지향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현존에서 부재가 현시되기는 하지만, 그렇게 강력하지는 않다. 그런데 부재는 그 무엇보다도 현존을 매우 강력하게 환기시킨다. 
이러한 환기 속에서 예술적 상상력은 고양되고 상승된다. 이환권의 그림자 작업은 부재를 통해 이루어지는 현존의 조형성을 보여준다. 그림자는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엄연히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그림자는 흔적이다. “흔적이 느껴진다”라는 이 익숙한 표현은 부재하지만 현존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이다. 흔적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한 감성의 아우라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러한 흔적 또한 허상으로 돌아간다. 그림자로서의 부재는 현존을 불러오고, 그 현존에서 그림자로서의 흔적으로 남지만 결국 그림자는 허상이다. 이환권의 작업은 부재를 통해 현존을 조형적 흔적으로 보여주면서 허상의 아름다움을 그림자 미학으로 제시한다. 

그림자, 흔적으로 남는 것 흔적에는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애당초 흔적은 경계를 갖고 있지 않다. 마치 수채화 물감이 종이 위에 번져가고 흘러가듯이 말이다. 이환권의 작업에서는 오롯이 흔적만이 제시될 뿐이다. 그러기에 심지어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따져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다. 흔적은 현실적인 것도 아니고 비현실적인 것도 아니다. 흔적은 그저 표면에 긁히거나 남아 잇는 그 무엇처럼 의미와는 부단히 거리를 두고 있는 어떤 것이다. 물론 조각이 아무리 흔적으로 남는다 해도, 그것은 결국 조형적 흔적이다. 조형적 흔적은 현실적인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비현실적인 것이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그림자로서의 흔적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이러한 비현실성의 현실성 또는 현실성의 비현실성은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조각적 공간이나 매스로 포착되기는 어렵다. 흔적에 대한 조형성은 그러기에 껍질에 비유될 수 있을 터이다. 

흔적은 알맹이가 아니라 껍질로 표상된다. 벼이삭을 홀태에 끼워 훑어내고, 절구에 넣어 껍질을 벗겨내면 쌀이 된다. 그런데 작가 이환권은 쌀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탈곡과 도정의 과정에서 분분히 흩날리는 껍질, 마치 중력을 거스르듯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껍질에 관심이 더 있는듯 보인다. 쌀만이 진짜이고 껍질은 가짜일까? 그러나 질이 없었다면 쌀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쌀의 원인은 오히려 껍질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럼 껍질의 원인은 무엇일까? 모른다. 껍질은 껍질일 뿐이다. 껍질은 인과성의 범주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이환권 작가의 조각 연작을 보고 있노라면 평소에 가졌던 가짜와 진짜에 대한 생각이 모호해지고 흔들리게 된다. 사라지는 것을 붙잡기만 하고, 가벼운 것을 견디지 못해 중력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 그런 우리가 이제 부재의 강력한 조형적 힘을 느낀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껍질과도 같은 작품에서 오히려 현실에서 비롯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이 세상을 어쩌면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를 두고 보이는 모든 것이 다 헛것이라는 식의 상투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한 이해는 이환권의 그림자에 대한 오해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그림자, 이환권의 그림자 그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그림자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얼굴에 그림자가 있다’라는 표현이 그 한 예일 터이다. 그림자는 부정의 기호로 오랫동안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림자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이는 플라톤이다. 널리 알려졌듯이, 플라톤은 《국가》 7권 ‘동굴의 비유’에서 그림자를 비판한다. 그림자는 참된 세상, 그러니까 진리의 이데아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어둠 속의 이미지이다. 그림자 이미지는 사람들을 미혹에 빠트린다. 진리의 자리에 허상이 자리를 잡고 사람들을 속인다. 그림자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어리석다. 진짜는 동굴밖에 있는데, 가짜를 진짜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굴 안은 믿을 수 없는 감각의 세계이다. 그러기에 플라톤은 이성(logos)을 따라 가짜 그림자인 감각의 세계에서 벗어나 진짜의 세계, 곧 동굴
밖으로 나가라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플라톤이 현실의 사물 또한 가짜라고 본다는 점이다. 물론 그림자보다는 덜 가짜이지만, 어차피 가짜인 것은 사실이다. 현실의 사물이든 그 사물의 그림자이든 간에 모두 가짜인 것이다. 사실 이런 점에서 역설적이게도 이환권의 작업은 플라톤적이기도 하다. 사물의 형태를 그림자로 보여주고는 결국 이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것이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이환권의 작업은 전혀 플라톤적이지 않다. 플라톤에게 모든 사물은, 그것이 현실의 사물이든 그림자이든 간에 상관없이, 이데아의 에이도스(eidos), 달리 말해 사물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원형의 모방이다. 그런데 이환권의 조각에서는 원인이라는 개념이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그림자의 원인은 현실의 사물도 아니고 에이도스, 곧 이데아의 원형도 아니다. 그림자는 그 자체로 부재하면서 현존하는 흔적으로서만 표상되는 허상이다. 허상은 가짜 이미지이지만 진짜 이미지와의 연관성 속에서 파악되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그냥 허상인 것이다. 허상은 의미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의 긴장 속에서 다양한 상상력을 촉발한다. 허상의 이름은 의미가 아니라 흔적이며, 부재함을 통해 현존함을 기억하고 회상하게 한다. 작가 이환권은 이러한 부재와 현존 사이에 있는 긴장을 감각적으로 포착해 조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림자로서의 허상과 조각의 본질 이환권의 그림자는 원인 없는 결과로 부재하면서 현존한다. 여기서 의미들은 껍질과도 같은 형태속에서 사라진다. 물론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허상이 허상일 수 있는 것은 의미가 가끔씩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 또한 다시 가벼운 껍질처럼 사라질 듯 흩날린다. ‘무엇’이 있기에 그림자는 드리워진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무엇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이다. 무엇이 있기는 하지만, 그 무엇을 경험 속에서 개념적으로만 알 수 있을 뿐, 무엇 그 자체를 알 수는 없다. 칸트는 이러한 무엇을 ‘사물자체(Ding an sich)’라고 불렀다. 이환권의 그림자는 이런 점에서 한편으로 주목할 만한 시각성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 흥미로운 조형적 형이상학을 제시한다. 허상으로서의 그림자는 사물이 사물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강력한 조형적 흔적이기 때문이다. 진짜와 같은 가짜이든, 가짜와 같은 진짜이든 간에 모든 것은 허상으로 귀결된다. 허상이 흔적으로 남겨진 것, 그것이 이환권의 그림자 조각이다. 작품을 두고 단지착시나 착각을 유도하는 기법적인 독창성이나 시각적인 즐거움만을 읽어내서는 안 되는 이유가바로 여기에 있다.

허상은 왜곡과 과장의 형태로 나타난다. 아니 어쩌면 나타나는 그 모든 것, 심지어 작가가 사용하는 재료인 PLA(Poly Lactic Acid)도 왜곡이자 과장이며, 결국 허상이다. 이 모든 것이 다 허상이라면, 허상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그림자로서의 허상은 본질에 대해 비본질인 것이며, 중심에 대해 주변적인 것으로만 간주되곤 한다. 조각사에 등장하는 많은 조각가들은 본질에 중점을 두었기에 인체의 표현에 있어서도 비례와 균형 그리고 조화를 추구한다. 그리스의 조각가 폴리클레이토스의 <카논>이나 르네상스 조각가들이 중시했던 ‘형태가 잘 갖추어진 인간(homo bene figuratus)’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로댕 이후 현대조각에서도 이전과는 그 양상을 달리하긴 하지만 여전히 본질이 중심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현대의 추상조각에서도 조형적 ‘본질’이 그 핵심이 아니던가? 이환권은 언제나 중심에 있었던 본질이라는 조형적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시도는 비본질적이고 주변적인 것으로만 여겨졌던 그림자를 주제로 한 작업에서 이루어진다. 흔히 조각의 본질과 연관해서 공간이나 매스 그리고 구조가 중점적으로 논의되곤 하지만, 그림자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거나 있다하더라도 빛과 연관해서 부수적으로만 다루어질 뿐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림자야 말로 본질적인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림자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유령이듯이 말이다. 물론 작가 이환권은 조각의 본질을 묻는 작업에 천착하는 것이 아니지만, 오히려 그렇게 본질을 묻지 않음으로써 본질을 떠올리게 하는 아이러니한 조형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더 나아가 생각해 보자. 사물의 현실과 그림자로서의 허상은 사뭇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결국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환권은 드물게 형태적으로만 볼 때 극사실주의 조각과도 같은 작업을 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작업이 이를 여실히 반증한다.) 그림자 미학 그림자는 부재의 조형적 힘을 드러낸다. 이환권은 조각에서 오랫동안 소홀히 취급되었던 그림자 미학을 주목할 만한 조형성으로 모색하고 있다. 이환권의 그림자는 실상 그림자가 아니다. 이 세상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그림자는 선이나 색을 갖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입체적이지도 않다. 이에 반해 작가의 그림자는 선에 따른 면과 색 그리고 비록 전통적인 매스와 구조는 아니지만, 어쨌든 매스와 구조를 갖고 있고 공간과 관계하고도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그림자는 허상으로서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고 있다. 이는 곧 사실이나 현실 나아가 본질이 언급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는 아니라는 것’을 조형적으로 말해준다. 이환권의 작업은 추상미술이나 개념미술의 범주에서 파악될 수 없다. 추상과 개념은 본질에 너무 가까이 가고자 하는 경향이있다. 이환권은 오히려 반대다, 그는 본질에서 멀어짐으로써 본질을 묻고 있다. 본질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림자가 본질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이환권은 작업은 인식론적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이다. 그림자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림자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환권의 작품을 보다보면, 본질로 인해 버려지고 상실된 것이 너무 많다는 것도 떠올리게 된다. 본질이라는 알맹이를 얻고자 하는 과정에서 너무도 부당한 방식으로 껍질이 희생되었다. 실상본질과 껍질은 어떤 의미에서 동일한 허상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이환권의 그림자는 완전성의 미학에 저항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완전성이야 말로 허상이 아닌가? 그림자 미학은 또한 시각문화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이환권은 착시나 착각을 주는 기법을 통해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하는 작업에 주안점을 두고 있지는 않다. 그에게 시각은 그림자로서의 허상에서 기억과 감각의 이중주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예술적 표상, 달리 말해 부재, 흔적 그리고 허상으로서의 그림자 미학의 디테일을 보여주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그림자가 흐른다. 내려가기도 하고 올라가기도 한다. 이환권의 그림자는 중력의 무게에서 해방된 그림자이다. 자유롭게 부유하는 그림자는 일상의 모든 곳을 떠돌아다닌다. 일상이 그림자이고, 그림자가 일상이 된다. 이환권의 그림자 미학은 그리하여 일상미학이기도 하고 환경미학이 되기도한다. 하여, 그림자로서의 부재, 흔적 그리고 허상이 아름다움으로 변용되는 그곳에서 특별한 미적 경험을 조우하게 된다.

■ 이 환 권 , Yi Hwan Kwon (b. 1974~)

2001 경원대학교 미술대학 환경조각과 졸업 
2004 동대학원 졸업

▲ 주요 개인전
2021 이환권 개인전, 예화랑, 서울
2018 '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Ⅳ' 롯데월드타워, 서울
2017 야외개인전 '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Ⅲ' 서울시청광장, 서울
2017 'Encounter' 예화랑, 서울
2016 야외개인전 '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Ⅱ' 서울시청광장, 서울
2016 이환권개인전 'SIGHT LINES' CMay Gallery & West Hollywood Park, LA 
2015 야외개인전 '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서울시청광장, 서울
2015 야외개인전 '동네' 낙산스페이스, 서울
2012 ‘Scenes From The Ordinary Days’ 가나, 부산
2011 ‘Beyond Mimesis and Perspective’ Galeri National Indonesia, 자카르타

▲ 주요 그룹전
2019 '한국 현대조각의 단면'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서울
2019 '조각으로 표상된 몸[신체]의 미학' 모란미술관, 경기
2018 ‘Dae-Bak Super Cool’ Torrance Art Museum, LA
2018 경기천년특별전 ‘경기아카이브_지금,’ 경기상상캠퍼스, 경기도
2018 창원조각비엔날레 '불각(不刻)의 균형‘ 성산아트홀 용지공원, 창원
2018 '원더시티' 세화미술관, 서울
2018 포스코 창립 50주년 기념 특별전 - 오마주 투 포스코, 서울
2016 경기아트프로젝트 ‘경기잡가(京畿雜歌)’, 경기도미술관, 경기
2015 '호랑이와 늑대' 한이 교류전展, 페르마넨테 미술관, 밀라노
2014 'Korean Shape' Galerie Paris-Beijing, 브뤼셀
2013 '유연한 사람들' 구 서울역사, 서울
2013 'Illusion' 박선기 이환권展 , 인터알리아 아트스페이스, 서울
▲주요 수상
2017 김세중 청년조각상, 청년조각상
2002 수원 월드컵경기장 청년작가 야외조각공모전-대상 
2001 세계도자기 expo 2001 청년작가 야외조각공모전-우수상 
1999 제10회 한국구상조각대전-우수상

오형석 기자  yonsei686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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