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본부를 둔 골드만 삭스는 전 세계에 포진되어 있는 지사를 통해 기업의 인수합병과 채권발행 등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런던과 프랑크푸르트, 동경, 홍콩과 같은 주요 거점을 포함해 24개국 40개가 넘는 도시에 1만 9,476명의 임직원이 일하고 있으며 총 자산은 724조 원, 2006년 26조 원의 이익을 냈다. 특히 지난해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으로 인한 세계적인 금융위기에서 살아남은 투자은행 중 하나이기도 하다.
사실 골드만 삭스 역시 심각한 타격을 받긴 했지만 다른 투자은행들처럼 허망하게 망하거나 투자 은행 구조의 심각한 손상을 입지는 않았다. 미국 정부 금융 정책 당국자 중 골드만 삭스 출신이 많아서 골드만 삭스가 도움을 받았다는 등의 루머도 있지만 골드만 삭스는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 제대로 판단된 투자 헤지와 석유, 원유, 선물 투기를 통해서 견조한 수익을 달성했다. 물론 2008년에 1999년 이후 최초로 적자를 봤지만 다른 투자은행과 다른 점이 있었다.

뉴욕 맨해튼 월스트리트 남쪽에 있는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아래로 100m가량 내려가면 브라운색 고층 건물이 나온다. 이곳은 다름 아닌 세계 최대 투자은행인 골드만 삭스의 본사다. 그러나 건물 어디에도 골드만 삭스란 간판이 없다. 두 개의 성조기 아래 ‘브로드 스트리트(Broad Street) 85’라는 주소만 달랑 쓰여 있을 뿐이다. 은행 간판도 걸리지 않은 세계 최대 투자은행 건물. 오늘의 골드만 삭스를 있게 한 비결을 그대로 나타낸다.
고객 및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겸손함과 나보다 우리를 내세우는 끈끈한 기업문화, 헌신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세계 최고의 인재들 그리고 이들을 하나로 묶어 정도로 이끄는 우수한 경영진, 이것이 바로 자본시장 통합법으로 투자은행을 육성하려는 한국은 물론 대부분 국가 금융회사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된 골드만 삭스의 성공 비결이다.
특히 이곳의 기업문화는 ‘나’보다는 ‘우리’를 강조한다. 보통 투자은행 직원들은 ‘나’를 강조한다. ‘성과가 곧 보수’인 만큼 지나칠 정도로 자신의 업무 기여도를 내세운다. 그러나 골드만 삭스 직원들은 다르다. ‘나’보다는 ‘우리’가 먼저다. ‘내가 이런 거래를 했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가 혼쭐이 난 신입사원이 한둘이 아니다. 그보다는 팀워크를 강조한다. 자랑보다는 겸손이 미덕이다. 본사 건물에 아무 간판이 없는 것도 이런 이유다. 가장 비인간적인 ‘돈장사’를 다루면서도 인간적인 유대와 신뢰를 중시하며, 인화단결, 공동책임, 무한성실, 평생직장 등 동양적인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가장 서구적인 일, 세계에서 가장 잘하는 회사인 것을 감안하면 어쩌면 아이러니한 기업문화 일수도 있다.
또한 부서의 책임자가 퇴근하지 않으면 아래 직원들은 집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분위기도 남아 있다. 1초에도 수백만 달러가 오고가는 트레이딩룸에는 선배가 후배를 혼쭐내는 ‘야구방망이 군기’도 존재한다. 호출을 받으면 새벽에도 달려나와야 하며, 휴가 반납은 거의 일상화돼 있다. 그런데도 직원들은 이를 싫어하지 않는다. 천문학적인 보수(1인당 평균 62만 2,000달러·약 5억 7,000만 원)로 보상을 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특유의 기업문화가 그들의 회사와 그들을 ‘세계 최고’로 만든 비결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골드만 삭스는 미국 50대 경영대학원 졸업생들이 가장 들어가고 싶어 하는 직장이다. 또 그만큼 모든 금융인들이 선망하는 인기 기업이다. 그러다보니 입사 과정은 하늘의 별따기 보다 어려운 곳이기도 하다. 입사를 하기 위해서는 대학이나 대학원(MBA)을 졸업한 신입사원이나 경력사원 할 것 없이 마찬가지다. 일단 지원서를 내면 줄잡아 20~30명과 인터뷰를 해야 한다. 경력사원의 경우에도 자기의 전공 분야 상급자, 그 위 상급자들을 차례로 만나야 하며, 일할 지역의 책임자들과도 인터뷰해야 한다.
이것은 골드만 삭스의 우수인력채용과 체계적인 인재양성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인데, 수십번의 면접뿐만 아니라 상황적응 능력, 팀워크 능력, 순발력, 창의력 등도 평가한다. 또한, 면접을 진행한 상급자 중 단 한명이라도 부정적인 의견을 제출하게 되면, 그 응시자에 대해서는 여러 번의 재고 과정을 거치게 된다. 즉 골드만 삭스는 재산이나 인종 등이 아닌 철저한 능력 중심의 인재 채용을 실시하여 최고로 우수한 사람만을 골드만 삭스의 가족으로 인정한다. 또한 매년 이러한 채용 과정에 모든 임원이 참여하게 되며, 만약 임원들이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다면, CEO가 직접 전화를 걸어서라도 꼭 채용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단, 사원들은 높은 수준의 업무능력과 성실, 열정 또한 요구 받는다. 그리고 골드만 삭스는 내부훈련을 전담하는 부서가 따로 존재하기 때문에 사원들은 입사 후에도 2,000여 가지가 넘는 교육을 통해 골드만 삭스에 어울리는 인재로 다듬어지게 된다. 이렇게 뽑은 인재는 헌신적이며 창의성 있는 전문가로 양성되는데, 신입사원 교육의 경우 8명으로 구성된 팀별로 과제가 주어지며, 이들은 이 과제를 위해 며칠 밤을 새워 가며 발표 내용을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발표 30분전 과제는 일순간 변경된다. 회사는 “고객의 요구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만큼 고객이 원하는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라며 창의성과 순발력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평균 연봉 5억 7,000만 원, 8년 연속 미국 금융계 종사자들이 가장 일하고 싶은 직장 1위(인력전문회사 볼트·Vault 집계), 입사하려면 면접관 30여 명 전원의 ‘OK’ 사인이 필요’ 한 기업. 이곳이 바로 월스트리트의 인재 사관학교로 불리는 미국계 투자은행 골드만 삭스이다. 경쟁사들은 ‘골드만 삭스’ 브랜드가 붙은 인재를 빼가기 위해 더 높은 연봉과 직급을 제시하며 사활을 건 구애 작전을 펼치고 있지만 이런 집중 포화 속에서도 골드만 삭스는 지금까지 이직률이 가장 낮은 곳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또 금융위기의 포화 속에서 비난을 받았던 인물들 역시 골드만 삭스의 임원들이었다. 그만큼 그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렇듯 골드만 삭스 출신들이 미국의 금융계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양성’이라는 특유의 인재경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양성이란 성(性), 종교, 국적, 문화 등에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채용, 아주 사적인 문제까지 세심하게 배려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 회사의 인사부에는 ‘다양성 향상’ 만을 책임지는 전문 인력들이 있을 정도다. 특이한 점은‘여성 위원회’와 ‘아시아인 위원회’등 일반적인 위원회뿐 아니라 ‘게이&레즈비언 위원회’ 등 직원들 머리 숫자와 취향만큼 다양한 위원회를 두고 있다. 이곳에서는 거창한 정책이 아니라 출근 시간, 근무 장소, 휴가 쓰는 방법 등 아주 사소한 일들에 대해 논의한다. 또 임신한 동료를 위해 전 직원이 필수적으로 교육 받아야 하는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이라는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골드만 삭스의 인재양성 프로그램들은‘세계 최초’란 수식어가 붙은 신상품과 금융기업을 개발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할 뿐 아니라 월가에서는 골드만 삭스 출신의 경력 사원들을 무조건적으로 데려가는 관행을 만들게 했다.

골드만 삭스는 1869년 독일 출신 유태인 마르쿠스 골드만과 사위 샘 삭스가 맨해튼에 차린 허름한 어음할인 가게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1999년 기업공개 때까지 철저히 보수적 가족주의를 고수했다. 1970∼80년대 적대적 인수합병이 성행할 당시 공격당하는 기업의 방어를 대행해주는 등의 ‘고객 우선’과 ‘신의 원칙’도 이 과정에서 형성됐다.
이런 가족적 끈끈함은 지금도 남아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파트너’라는 제도로 전 세계 2만 6,000여 명의 직원 중 300여 명만이 파트너로서 이들은 말 그대로 회사의 주인이다. 기업공개를 하기 전만 해도 이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모든 것이 결정됐다. 그러다보니 이들의 자세는 사뭇 헌신적이다. 자다가도 달려 나오는 게 이들이며, 직원들을 독려해가며 헌신적으로 만드는 사람들도 이들이다. 그러나 이들만으로 오늘날의 골드만 삭스가 만들어진 건 물론 아니다.
이들을 엮어내고 방향을 제시하는 뛰어난 경영진을 골드만 삭스는 가졌다. 대표적인 인물이 현대 골드만 삭스의 기틀을 닦은 시드니 와인버그이다. 그는 대공황으로 회사가 흔들리던 1930년 경영권을 장악하면서 골드만 삭스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된다. 와인버그는 특히 골드만 삭스에서 사환부터 시작해 30년간 일하며 최고경영자(CEO)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 ‘골드만 삭스의 아버지’로 불린다. 이밖에도 골드만엔 우수한 경영진들이 많다. 특이한 건 최근 수십 년간 리더 2명의 공동 체제가 형성됐다는 점으로 1976년엔 존 와인버그와 존 화이트헤드가 공동 대표로 선임돼 8년간 회사를 함께 이끌었다.
또 전 재무장관인 헨리 폴슨도 골드만 삭스 출신이다. 8년 동안 회장 겸 CEO를 지내다 부시 행정부의 구원투수로 발탁되었다. 또한 미 역사상 최고의 명재상으로 꼽히는 클린턴 행정부 시절의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도 역시 골드만 삭스 CEO 출신이다.
뿐만 아니다. 조슈아 볼턴 백악관 비서실장,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 총재, 스티븐 프리드먼 국가경제자문위원회 의장 등이 골드만 삭스에서 실력을 갈고닦은 사람들이다. 위기에 처한 뉴욕증권거래소를 구원하기 위해 CEO로 임명된 존 테인도 골드만 삭스의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지냈다. 1998년 폴슨 재무장관과 공동 회장을 역임했던 존 코자인은 뉴저지 주지사로 변신했다. 골드만 삭스 출신 인사들의 워싱턴 진출은 최근 일이 아니다. 포드 및 카터 행정부에서 국무차관을 지낸 로버트 호매츠는 골드만 삭스 부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이처럼 골드만 삭스 출신들이 정·재계의 요직에 두루 포진하고 있는 것은 골드만 삭스의 성공 전략과 소속 인물의 능력에 대한 높은 신뢰 때문이다. 여기에 ‘한식구’라는 동질감을 강요하는 기업문화가 작용해 끌어주고 밀어주는 인간관계도 한몫 하고 있다. 이런 엄청난 네크워크가 골드만 삭스를 최고로 만든 요인임은 말할 것도 없다.

골드만 삭스 출신은 대통령들에게 조언하고 각료직에 진출하는가 하면 대기업을 경영하고 거액의 자선 활동에 관여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골드만 삭스가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으로 인한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승자만을 길러낸다는 통념에 반하는 모습을 보이며, 은행 구제금융의 초기 단계에서 처리가 미숙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헨리 폴슨 전 재무장관이나 메릴린치를 매각하기 직전에 수십억 달러의 보너스를 임직원들에게 서둘러 지급한 존 테인은 대표적인 골드만 삭스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 재무장관을 지낸 로버트 루빈 역시 골드만 삭스에 몸담았던 인물로 지난해 초 금융위기의 경고신호를 놓쳤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자 씨티그룹 선임고문직을 사임하고 말았다. 이른바‘월가의 뉴욕 양키스’로 불렸던 최고의 정예들이 골드만 삭스에 보기 드문 오점을 안겨준 것이다.
골드만 삭스는 최고의 대학과 MBA스쿨에서 최상위 학생들을 선발한다. 또한 이들은 양키스의 선수들처럼 엄청난 대우를 받는다. 지난해 골드만 삭스의 3만 명이 넘는 직원들은 봉급과 보너스, 기타 수당을 합해 평균 35만 5,000 달러를 받았다. 경쟁사인 모건 스탠리의 25만 달러를 훨씬 상회하는 것이다. 더구나 골드만 삭스의 간부급인 파트너가 되면 7자리의 급여를 챙길 수도 있다.
이러한 골드만 삭스의 맨파워는 지난해 가을 발생한 금융 시스템의 붕괴의 파도를 이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외부의 도움이 없이 생존한 것은 아니다. 골드만 삭스는 정부로부터 10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았고, 워런 버핏의 회사인 버크셔 해서웨이로부터도 50억 달러의 투자를 유치했다. 덕분에 안정을 기할 수 있었지만, 당시 골드만 삭스는 4분기 23억 달러의 손실을 보아야만 했다. 분기 손실이 발생한 것은 지난 1999년 기업 공개를 단행한 이후 처음이었다. 물론 리먼 브러더스나 베어 스턴스, 메릴린치가 금융 위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진 것을 감안한다면 골드만 삭스의 생존은 대단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 월가의 최고 경영자들에게 골드만 삭스의 맨파워를 자랑했던 인물들은 비난의 화살을 맞고 있다.
리먼 브러더스가 지난해 9월 파산할 당시 메릴린치를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매각하는 협상을 주도한 사람은 골드만 삭스의 CEO를 지낸 존 테인이었다. 그 무렵의 존 테인은 멋진 사나이로 보였지만, 지금 그는 월 스트리트의 탐욕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전락했다. 협상이 타결되기 직전 대대적인 보너스 잔치를 벌인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또 그가 100만 달러를 들여 메릴린치 본사내의 사무실을 호화롭게 꾸몄다는 것도 구설수에 올랐다. 존 테인은 나중에 이 돈을 상환했다. 루빈도 골드만 삭스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그는 1999년 씨티그룹의 선임 고문으로 자리를 옮길 당시 내부에서는 이를 쿠데타로 간주하는 분위기였다. 루빈은 씨티그룹이 지난해 187억 달러의 손실을 낸데 책임을 지고 올해 1월 사임할 수 밖에 없었다.
로이드 블랭크페인, 월가의 보수기준 확립 강조
전 세계 3만명이 넘는 정예요원을 보유하고 있는 골드만 삭스는 2006 회계연도 순익이 전년보다 70% 늘어난 94억 4,000만 달러(약 8조 8,000억 원)에 달했다. 4년 연속 최대 순익 행진을 계속한 것이다. 이는 지난 2005년 증시가 호황을 누릴 당시 국내 40개 증권회사가 올린 사상 최대 규모 순익(3조 1,890억 원)의 3배 가까운 순익을 1개의 투자은행이 올린 셈이다.
하지만 지난해 불어 닥친 금융위기 한파를 겪은 골드만 삭스는 다른 투자은행들과 마찬가지로 위기를 겪을 수 밖에 없었고, 골드만 삭스의 CEO 로이드 블랭크페인(Lloyd Blankfein)과 6명의 고위간부가 보너스를 받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블랭크페인과 6명의 고위급 인사는 보너스 지급을 담당하는 중앙위원회에 악화된 회사 실적을 고려해 자발적으로 본인들에게 보너스를 제공하지 말 것을 요청했으며, 회사측은 이를 수락했다.
이와 함께 그는 기관투자가협의회 모임에 참석하여 월가 기업들의 보수기준이 새롭게 확립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은행과 증권사들이 회사의 경영성과에 따라 보수를 정하는 기본적인 보수 개혁안을 제시했다. 블랭크페인은 “특히 주주가치를 많이 떨어뜨린 기업의 경우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태도가 배제된 보수 체계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며 “직원 전체가 사장처럼 강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강조했다.
1%의 위험까지 따지는 치밀한 투자의 원칙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메이도프 금융사기 등 국제적인 금융위기를 피할 수 있었던 골드만 삭스의 비결은 그동안 습관처럼 몸에 밴 팀워크를 통한 리스크 관리가 실천되어 왔기 때문이다.
2006년 골드만 삭스에서는 서브 프라임 모기지 관련 자산에 대한 쟁점이 떠올랐다. 당시 트레이더들은 모기지 관련 상품에 매수 포지션을 취했고, 증권 인수인들 역시 관련 증권을 보유하고 있던 때였다. 하지만 골드만 삭스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위험성 문제를 제기하자 최고재무책임자(CFO)는 트레이더들과 함께 특유의 팀워크 문화 속에 난상토론을 벌였고 포지션 정리를 결정했다. 즉 모기지 자산 헤지를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골드만 삭스는 1999년 상장 후 처음으로 71억 달러라는 손해를 보기는 했지만, 627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한 씨티그룹과 559억 원의 적자를 기록한 메릴린치와 비교한다면 그 손실은 경미하다 하겠다.
골드만 삭스는 공격적인 트레이더보다 보수적인 가격산정 실무자 의견을 더 중시할 정도로 리스크관리 절차가 엄격하다. 매일 회사 자산의 포지션을 체크하고 밸류에이션을 측정하는 것은 기본이며, 개인보다 팀워크 중심으로 의사결정이 이뤄진다. 또한 장기전략에 따라 사업전략이 확정되면 유기적으로 대응하고 있으며, 특히 수년 전에 주식 트레이딩과 채권 트레이딩을 합친 것은 금융위기 상황에서 기업을 균형감 있게 평가하는 데 유리했다.
이러한 골드만 삭스 팀워크 문화는 해당 팀 내부뿐만 아니라 팀 간에도 적용된다. 금융자문은 자본 없이 서비스를 제공해 구조조정 대상이 아니라는 반발도 있었으나 10% 감원을 단행할 때에도 예외가 없었다. 트레이딩과 IB는 분리된 조직이 아니며 좋은 시절을 함께 했듯이 나쁜 시절 고통도 함께 분담한다는 원칙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골드만 삭스가 세계적인 금융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으며, 위기 상황에서도 이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