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꺾인 한총련 학생운동의 몰락인가, 개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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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꺾인 한총련 학생운동의 몰락인가, 개혁인가
  • 신혜영
  • 승인 2008.05.13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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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범 16년 만에 의장 선출 실패…이적단체 규정, 탈(脫)한총련 바람으로 위기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대오’를 내걸고 출범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韓國大學總學生會聯合, 약칭 한총련(韓總聯))은 8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를 계승하여 1993년 만들어진 대한민국의 학생운동단체로 대한민국 대법원에 의거 이적단체로 규정된 단체이기도 하다. 한총련은 주한미군철수, 국가보안법철폐, 북미평화협정체결, 6.15 남북 공동선언 이행, 학원자주화 등을 주요 활동목표로 하고 있다.

   

▲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대오’를 내걸고 지난 1993년 출범한 한총련은 8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전대협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학생운동단체로 대한민국 대법원에 의거 이적단체로 규정된 단체이기도 하다.


후보자 없어 출범 16년 만에 의장 선출 실패
한총련이 제 16기 의장 선출에 실패했다. 후보 등록기간인 지난 3월 15일까지 한총련 의장 후보로 출마하겠다는 뜻을 밝힌 대의원이 아무도 없어 올해 한총련 의장 선거가 무산된 것이다. 지난 1993년 4월 전대협의 뒤를 이어 한총련이 출범한 이래 16년 만에 처음이다.
한총련 관계자는 “올해 신임의장 후보로 나설 예정이었던 한 대학교 총학생회장이 가족의 만류로 출마를 포기하면서 후보등록 기간에 아무도 후보로 등록하지 못했다”며 “한총련 출범 이후 처음으로 의장선거가 무산됐다”고 밝혔다.
의장 후보로 나설 예정이었던 최 씨는 “부모님 두 분 다 많이 편찮으시다. 보살펴 드려야 해 최근 한두 달 동안 한총련 활동도 하지 못했다”며 “다시 선거에 나설 계획은 없고 당분간 학내 활동만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에 한총련은 지난 3월 28일 한양대 캠퍼스에서 한총련 소속 전국 30여 개 대학교 총학생 회장과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 등 대의원 70여 명을 포함해 280여 명이 모여 긴급 대의원대회를 개최, 비상대책위원회체제로 가기로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의원대회에서 김현웅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 ‘제 16기 한총련 추대본부장’으로 임시 추대됐다.
김현웅 투쟁본부장은 “올해 광주전남지역총학생회연합(남총련) 의장을 맡게 돼 한총련 의장에 출마하지 않았다”며 “정식으로 선거절차를 밟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투쟁본부장 체제로 운영하는 것일 뿐 한총련 활동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지난 2002년 한총련에서 공식 탈퇴한 한양대 내에서 이번 총학이 한총련에 장소를 제공한 것에 대해 아이디 ‘조금만 더’는 “대학교에서 친북단체가 활개치고 다니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다”며 목소리를 높였고, 아이디 ‘솔로몬대왕’은 “한 번 더 학교에 이적단체인 한총련을 불러오면 국정원에 신고하겠다. 한총련은 엄연히 이적단체이며 한양대 학생들과 교수님들, 학교 관계자의 어떠한 동조와 합의도 없이 캠퍼스를 총학 마음대로 내주는 것을 묵과하지 않겠다”며 이번 일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 학생대중단체의 분화가 잇따르고, 다양한 의견그룹이 수면 위로 떠오른 지금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큰 이슈가 되고 있다.

학생운동 중심에서 몰락의 위기에 처한 한총련
한총련의 뿌리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6월 민주항쟁 때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서대협)를 결성하여 민주화 운동을 하는데, 이것이 서대협 의장 이인영의 주도로 충남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산되어 전대협이 발족되었다. 1987년 민주화 바람으로 탄생한 전대협을 계승해 지난 1993년 발족한 한총련은 각 대학 대표자들의 협의체 형식으로 운영되던 전대협과 달리 각 대학 총학생회장과 단과대학 학생회장까지 포함하는 1,600여 명의 대의원 체제를 구축해 더 강력한 조직체계를 갖췄다. 당시 전국 180여 개 대학총학생회가 참여한 가운데 1기 한총련을 출범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한총련은 학내문제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 빈민 등 사회적 약자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비판세력의 소임을 맡아왔지만 투쟁 위주의 강경 노선을 걸으면서 쇠락의 길로 빠져들었다.

지난 1996년 8월 연세대에서 열린 통일대축전 시위로 연세대 일부 건물이 파손되고 의경 1명이 숨지는 등 강경투쟁으로 5,848명의 대학생이 경찰에 연행되고 470여 명이 구속되는 등 학생운동 중심에 섰던 한총련이 본격적인 몰락의 위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1997년 6월에는 한양대에서 시민 이모(23) 씨가 경찰 프락치로 오해받아 한총련 소속 학생들에게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도덕성에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이후 대법원은 5기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매년 한총련 의장은 물론 각 대학 총학생회장,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이 잇따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고 주요 대학들의 한총련 탈퇴 러시가 이어지면서 이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는 등 조직력의 약화를 가져왔다.

 

이적단체 규정, 잇단 검거 등으로 활동 위축

   
▲ 경찰의 ‘이적단체’ 규정을 바탕으로 한총련 의장을 지낸 대학생들은 매년 사법기관에 의해 실형을 선고받았거나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다. 2007년 15기 의장을 지냈던 학생이 지난 2008년 1월 2일 경찰에 붙잡혔고, 14기 의장은 2008년 3월 20일 폭력시위 주도 혐의로 2심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과거 전대협은 민족주의, 민주주의, 자주평화통일을 외치면서 ‘공정선거감시단활동’을 하는 등 신선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정계상황을 무시하고 북한의 테러활동과 무력도발로 남북관계가 급격히 긴장되어 있는 80년대 말에 정부 허락 없이 몰래 평양에 가서 ‘평양축전’을 참가하거나 폭력시위, 방화 등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큰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전대협의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지양하고 실용주의적 노선을 걷자는 의미에서 재결성한 것이 바로 한총련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한총련은 과거 전대협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곧 지금의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한총련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연세대 통일대축전 점거 시위 이후 한총련 의장을 지낸 대학생들은 매년 사법기관에 의해 실형을 선고받았거나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다. 2007년 15기 의장을 지냈던 학생이 지난 2008년 1월 2일 경찰에 붙잡혔고, 14기 의장은 2008년 3월 20일 폭력시위 주도 혐의로 2심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7기 의장을 지냈던 사람은 10년을 도피해 다니다가 결국 지난 3월 27일 경찰에 검거됐고, 4,5기 의장은 4년여씩 복역했으며 9,10,11기 의장은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이처럼 경찰의 ‘이적단체’ 규정을 바탕으로 한 잇단 의장 검거가 활동 영역의 위축의 원인이 되었고, 학생들의 관심사에서 학생운동이 멀어지면서 각 단과대 학생회에서마저 외면당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연세대 성치훈 총학생회장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일부 단과대 학생회에서는 한총련 활동이 있었지만 올해는 이마저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1998년에서 탈퇴하며 사실상 한총련 활동을 접은 서울대 부총학생회장 박진혁 씨는 “15개 단과대 중 사범대와 농생대 정도를 제외하면 다른 단과대 학생회장들은 한총련과 별 관련이 없다”고 전했다.
현재 한총련에 가입된 30여 대학들도 전체 학생 의사와는 관계없이 소수 총학생회 임원들만 활동하고 있을 뿐이다.

 

시대와 호흡하지 못한 한총련, 새로운 학생운동 전개
한총련의 계속적인 친북·반미 노선의 정치투쟁 등으로 안으로 밖으로 한총련에 대한 불신이 커지자 2001년 9기 한총련은 강령에서 조직을 유연하게 만들고 학생들과 호흡하기 위해 ‘연방제 통일방안’을 삭제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변화가 없자 2003년 거의 절반에 가까운 학교가 탈퇴했다. 우리나라 학생운동의 큰 축이 됐던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역시 2006년 ‘학생회의 주인인 학우가 객체로 변질됐다’며 한총련 탈퇴를 선언했고 연세대, 고려대 등의 주요 학교들도 탈퇴를 선언, 대학가에 ‘탈(脫)한총련’ 바람이 거세졌다. 처음 186개 대학으로 출범해 한 때 230개 가입 대학의 10만 회원을 거느렸던 한총련이 현재는 30여 개 대학의 1,000명 회원도 채 안 되는 상황에 놓였다.

이와 관련, 2004년 대법원은 ‘재차 10기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또한 그 강령 및 규약의 일부 변경에도 불구하고 그 사상과 투쟁목표에 있어서 종전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과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볼 수 없고, 그 지향하는 노선이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통일노선과 그 궤를 같이함으로써 북한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하거나 적어도 이에 동조하는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이적단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라고 판결했다.
김민전 경희대 정치학과 교수는 “한총련은 여전히 북한의 일방적 노선을 따르고 있다”며 “취직이나 학습여건 같은 학생들의 주된 관심사와 거리가 멀어진 것이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한총련은 지난해 4월 이후 1년간 내놓은 34건의 성명 중 친북적인 내용이 11건, 반미 내용이 5건, 반(反)한나라당이 6건, 보안법과 공안당국 비난이 9건일 정도로 정치투쟁에 집중했다. 이처럼 한총련이 정치투쟁에 몰두하면서 한총련 주최의 대규모 집회에 참여하는 대학생도 갈수록 적어지고 있다. 1993년 한총련 출범식에 5만여 명의 대학생들이 참가한 반면 2000년 5,500여 명, 2007년에는 1,000여 명으로 16년 만에 50분의1 수준으로 떨어졌다. 한총련의 최대 행사인 통일축전 참가자 역시 1993년 출범 당시 1만 1,000여 명에서 2000년 9,500여 명, 2006년 2,000여 명으로 계속해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경희대 산업공학과 학생 강경식(27) 씨는 “멀게 느껴지는 정치적 이념, 주장만 내세우는 운동권보다 구체적으로 대학 생활에 도움을 주는 비운동권을 주목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1998년 6기 의장을 지낸 손준혁(당시 영남대) 민주노동당 원내 대표 비서실장은 “노선상의 문제든, 외부 탄압의 문제든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시대에 맞게 자기 변화를 하고 있는지 돌이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연세대 성치훈 총학생회장은 “요즘 시위 문화도 한총련이 주도하던 시절처럼 학생들의 거부감을 일으키는 과격한 방식이 아니라 학생의 흥미를 끌고 참여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며 “지금은 학생운동이 변화하는 과도기”라고 말했다.

보수성향의 시민단체인 바른사회시민회의 전희경 정책실장은 “현재 젊은층의 관심은 취업 등 개개인의 미래 설계에 맞춰져 있다”며 “한총련은 이념에 몰두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대학생의 실생활을 파고드는 이슈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이에 최근 한총련의 위기와 함께 학생운동의 새로운 방향이 모색되어 지고 있다.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은 새로운 학생회 운동을 외치며 등록금 투쟁과 금강산 기행 등의 평화 교류 사업들을 벌이고 있다. 또 저소득층, 장애청소년, 이주노동자 2세 등 한국사회에서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아이들의 학교를 만들어 그들과 함께 연대하려는 ‘대학생 사람연대’의 활동도 주목할 만하다.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안진걸 팀장은 “한총련이 쇠퇴한 것은 맞지만 그것이 곧 학생운동의 퇴조는 아니다”고 강조하며 “요즘 학생들은 NGO활동이나 자원봉사는 물론 한총련을 대체할 새로운 학생단체를 통해 활발한 사회참여를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한총련 역사
▲ 1987년 8월 민주화 열풍을 타고 전국 95개 대학, 400여 명이 참여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발족
▲ 1993년 4월 한총련,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이어 받아 전국 237개 대학이 가입
▲ 1996년 8월 한총련, 연세대에서 열린 ‘통일대축전’ 검거 시위로 경찰과 충돌 대학생 5,848명 연행 462명 구속 ‘도시 게릴라’ ‘김정일의 쇠파이프부대’ 등 부정적적인 여론 형성
▲ 1997년 6월 5기 한총련 출범식 과정에서 경찰 프락치로 알려진 이 석 씨가 한총련 간부들에게 맞아 숨지는 사건 발생. 검·경 ‘한총련 와해’ 전담반 편성, 한총련 소속 대학 학생회장들에게 자진탈퇴 종용
▲ 1998년 5월 대법원 5기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 한총련 소속 대학의 학생 수배자 300명에 달해
▲ 1998년 7월 대법원, ‘한총련은 이적단체’ 확정판결
▲ 2001년 9기 한총련 때부터 ‘연방제 통일방안’ 삭제, ‘6.15남북공동선언 정신’을 강령에 삽입하며 합법화를 위한 유연화 전략 추진
▲ 2003년 2월 한총련, 노무현 대통령에게 이적 단체 규정 철폐 요구
▲ 2003년 한총련에 가입해 있으면서 비운동권 노선 지향하는 전국 19개 대학 총학생회 연합체 ‘학생연대21’ 출범. 2,00여 개에 달하던 참여 대학 중 90여 곳 탈퇴
▲ 2006년 서울대 총학생회 한총련 탈퇴 선언, 동국대, 단국대, 경북대 총학생회도 탈퇴 의사 밝혀
▲ 2004~2008년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 주한미군 철수 투쟁,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투쟁,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투쟁 주도
▲ 2008년 3월 26일 한총련, 16년 만에 의장 선출 실패(의장 후보로 출마 하겠다는 뜻 밝힌 대의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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