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박연차’를 잘못 마셔서 탈이 났다고 한다. 너무 많이 마셔서 그렇다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봉하마을에서 연예인보다 더 큰 인기를 누리며 평생을 살 줄 알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연차 게이트’에 발목이 잡힌 것이다. 아내, 조카, 아들이 검찰에 소환될 때도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진실을 피력했던 노 전 대통령. 이제는 자신이 직접 나서 진실여부를 밝혀야 할 때다.
우리나라에는 퇴임 후 조용한 대통령 왜 없나
국민들뿐 아니라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이 박연차 회장의 거침없는 폭로에 그로기 상태가 되었다. 참여정부가 뭐 볼게 있었나. 386 젊은 피, 도덕적·윤리적으로 다른 정부를 표방하던 당당한 목소리에 국민들은 그런가 보다 했다. 정치뻘에 지친 국민들은 크게 능력은 없어도 깨끗하려나 보다 생각하고 지지한 것이다. 국민들 중에는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한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도 눈물로 노무현 사단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오히려 욕을 하고 돌을 던지면 좋으련만… 아직도 실낱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검찰 수사가 마무리 됐을 때, 이 모든 오해가 풀리고 그가 다시 웃는 모습으로 봉하마을로 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을 위해서라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초심으로 돌아가 진실을 밝히고 죄가 있다면 떳떳하게 죄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왜 퇴임 후에 조용한 사람이 없는지, 자식들은 왜 덩달아 비리에 연루되는지 의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 씨는 재임 시절인 1997년 한보 비리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데 이어, 퇴임 후 2004년 조동만 전 한솔 부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는 일을 겪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임기 말 차남 홍업 씨와 3남 홍걸 씨가 기업체로부터 청탁 명목으로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 기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두 아들이 한달 새 잇따라 구속되자 대국민 사과를 했다. 노 전 대통령 역시 후원자였던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사건에 휘말려 형 건평 씨가 구속되고 부인 권양숙 여사, 아들 건호 씨가 소환되어 검찰과의 악연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됐다.
시트콤같은 일이다. 역대에 그런 일이 있었으면 더이상 반복하지 않을 법도 한데, 학습의 효과를 찾을 수 없는 권력이 ‘대통령’이라는 자리인가 보다.
노 전 대통령 가족을 비롯한 최측근들 추풍낙엽 신세
‘박연차 쓰나미’에 노 전 대통령 주변의 인물들이 예외없이 몰락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소환까지 이뤄지면서 사실상 ‘노무현 패밀리’의 수난사가 클라이막스에 치닫았다. ‘좌(左) 희정’으로 불린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은 대기업에서 불법 대선자금 65억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 1년을 선고받아 2004년 12월 만기 출소했지만, 박 회장에게서 상품권 5천만 원 어치를 받은 사실이 드러나고 강 회장에게서 불법 자금을 받은 의혹이 불거지면서 다시 검찰의 수사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우(右) 광재’로 널리 알려진 민주당 이광재 의원은 박 회장 등으로부터 2억 원이 넘는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지난 3월26일 구속됐다. 청와대에서 노 전 대통령을 보좌했던 이강철 전 청와대 수석도 참여정부 시절 각종 이권에 개입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가 결국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지난달 구속됐다. 노 전 대통령을 보좌했던 박정규 전 민정수석은 박 회장에게서 상품권 1억 원 어치를 받아 쓴 사실이 드러나 지난달 재판에 넘겨졌다.
노 전 대통령의 가족도 예외가 아니다. 노 전 대통령의 친형 건평 씨는 세종증권 매각 로비 대가로 돈을 받은 혐의로, 부산상고 동창인 정화삼 씨가 같은 혐의로 지난해 말 구속기소됐다. 건평 씨의 사위이자 노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인 연철호 씨도 박 회장으로부터 500만 달러를 받은 의혹과 관련해 지난 10일 검찰에 체포된데 이어 검찰 청사를 수시로 드나들었고, 아들 건호 씨는 이 자금에 관여한 정황이 포착돼 수차례 소환조사를 받고 있다.검찰은 노 전 대통령의 딸 정연 씨와 사위의 계좌도 추적 중이다. 더욱이 정 전 비서관을 통해 박 회장의 돈 100만 달러를 부인 권양숙 여사가 받았다고 밝힌 노 전 대통령은 이제 자신이 그 진실을 밝혀야 할 것이다.
정 전 비서관 차명계좌에 보관된 3억 원은 무슨 돈?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촉발된 검찰의 칼바람이 결국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환함으로써 종착역에 다다랐다는 것이 일각의 평가다. 예측된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어떤 답변을 이끌어 낼 지와 처리공방에 촉각이 세워지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끝까지 지켜내고 싶었던 ‘盧의 남자’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은 구속되는 그 순간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께 죄송스럽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전혀 모르는 상황입니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말 충신인가.
검찰은 정 전 비서관의 진술이 신빙성이 없다고 보고 강도 높은 수사를 하고 있다.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구속영장 재청구 끝에 구속되면서 소위 ‘노무현의 남자들’이라고 불렸던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정 전 비서관 등 측근 3인방이 모두 차례로 철창신세를 지게 됐다. 이들 모두 검찰의 참여정부에 대한 사정수사로 구속되는 처지가 돼 노 전 대통령을 지원했던 이들의 행보가 불행으로 마무리된 셈이다.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의 차명계좌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에게 전달됐다던 3억 원의 꼬리를 찾아낸 것이 사실이라면 노 전 대통령 측이 왜 권 여사를 내세워 ‘거짓진술’을 했는지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정 전 비서관이 체포되던 날, 노 전 대통령이 홈페이지를 통해 권 여사를 앞세웠을 때, 검찰 안팎에선 이 글의 목적이 자신의 최측근인 정 전 비서관의 구속을 일단 막고 그의 혐의를 무력화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권 여사가 방패막이가 되는 논리가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노 전 대통령은 모르는 돈이 돼 뇌물죄에서 빠져나갈 수 있고 정 전 비서관은 단순 전달자로 혐의를 벗을 수 있다는 치밀한 시나리오 일 수도 있다. 비록 떳떳하지 못한 돈을 받긴 했지만 사용처의 흔적이 남지 않는 현금이므로 개인적인 채무를 갚는 데 썼다고 일관되게 진술하면 권 여사도 처벌을 면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법조계 안팎의 시각이었다.
그간 정 전 비서관과 긴밀히 연락을 취했을 노 전 대통령 측이 검찰의 이날 발표 전까지 차명계좌에 3억 원을 보관했던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는 것도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박 회장에게 돈 가방에 든 현금으로 받았으면서 즉시 차명계좌에 넣은 정 전 비서관의 행동도 의문이 남기는 마찬가지. 노 전 대통령 측도 언론사와의 통화에서 “검찰 발표를 이해할 수 없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권 여사가 근거 없이 ‘내가 받았다’고 말하진 않았을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따라서 검찰은 정 전 비서관의 차명계좌에 2년 반 동안 보관된 3억 원이 권 여사가 썼다는 돈과 같은 돈인지, 그렇지 않다면 왜 권 여사가 자신의 몫이었다고 주장했는지를 우선 밝혀야 하는 골치 아픈 과제를 떠안게 됐다.
노무현, 돈의 행방 몰랐다는 것 상식적으로 이해 안 가
박연차 회장과 노무현 전 대통령 측 사이에서 오고 간 것으로 확인된 뇌물의혹 중 이번 검찰 조사의 핵심은 미화 600만 달러에 대한 노 전 대통령의 인지여부이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해 2월 박 회장이 조카사위 연 씨에게 송금한 500만 달러의 수혜자라는 의심을 받고 있으며, 검찰은 연 씨와 아들 건호 씨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500만 달러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건호 씨였음을 밝혀 냈다. 검찰은 아들이 실질적으로 500만 달러에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 상식적으로 노 전 대통령이 이를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 이를 입증할 증거 확보에 주력해왔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500만 달러에 대해 지속적으로 ‘정상적 투자금’이라고 주장해 왔기 때문에 사실관계를 둘러싼 검찰과 노 전 대통령 사이의 치열한 공방이 예상된다. 또한 노 전 대통령은 이번 수사에서 2007년 6월 박 회장 측 인사가 청와대를 방문해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에게 100만 달러를 전달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해명해야 한다. 검찰 조사 과정에서 정 전 비서관은 이 돈을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에게 전달했다고 진술했으며, 권 여사는 노 전 대통령 몰래 개인 빚을 갚는 데 썼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것 또한 거짓말로 드러났다. 검찰은 이 부분 역시 노 전 대통령이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이 상식적인 차원에서 납득되기 어렵다고 판단, 정황 증거 및 관련 수사 자료를 정리해 노 전 대통령을 압박하고 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밝힌 것처럼 ‘퇴임 이후에 알았다’고 진술할 것으로 예상되어 수사가 쉽지 않을 것이다.
노무현 사단 시련 ‘현재진행형’, 친노인사들도 고통 호소
‘노무현 사람들’의 수난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측근들이 줄줄이 사법 처리 대상에 오르면서 친노 진영 전체가 극심한 침체에 빠져들었다. “너무 지독하고 힘들다”라는 말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번 사건과 무관한 친노 인사들도 고통을 호소하기는 마찬가지. 민주당 지도부조차 노 전 대통령과 거리 두기에 나서고 있지만 이들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이른바 ‘노무현 패밀리’는 한때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했다. 2002년 대선에서 패한 이회창 후보 캠프에서 그 위력을 인정할 정도였다. 그 중심에 ‘386 참모들’이 있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이다. ‘좌희정, 우광재’로 불리는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과 이광재 의원이 대표 격이다. 안 최고위원은 집권 이후 불법 대선 자금을 받은 혐의로 1년간 옥살이를 치르면서 정계 복귀의 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지난해 7월 민주당 최고위원에 당선되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17대 국회에서 ‘실세 의원’으로 불렸지만 각종 비리 의혹으로 검찰의 수사 대상에 10여 차례나 올랐던 이광재 의원도 지난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하면서 강원 지역을 대표하는 젊은 정치인으로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시련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안 최고위원은 노 전 대통령의 후원자인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에게서 10억 원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 의원은 박연차 회장과 정대근 전 농협회장으로부터 2억2천만 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다. 특히 이 의원은 “결과에 상관없이 의원직을 사퇴하겠다”라고 밝혀 사실상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노 전 대통령의 두 팔이 잘려나간 셈이다.
현재 노 전 대통령의 곁에는 문재인 전 비서실장이 지키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변호사 동료로서 법무법인 ‘부산’을 운영 중인 문 전 실장은 이번 사건이 불거지자 대책회의를 주재하며 법률적 지원에 나서는 한편, 언론과의 대화 창구 역할도 맡고 있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도 지난 4월23일 봉하마을을 방문해 노 전 대통령 내외와 오찬을 함께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검찰 수사는 현 정권의 공작”이라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몸통인 노 전 대통령의 수사가 마무리 되면 사실상 ‘박연차 게이트’가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다. 하지만 박 회장이 현 여권 인사로 분류된 사람들과도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현 여권 실세에 대한 수사도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