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매거진/전북] 전북도가 지난달 15일, 「도 문화재 보호조례」 제8조, 제9조, 제10조, 제11조, 제19조에 따라 전북도 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 및 보호구역 지정, 관리단체 지정을 위해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63번지 1필지 2,813㎡의 면적을 문화재 구역으로 등록한다고 예고한 가운데, 천안전씨 중앙종친회(전세환 회장)가 전북도에 “해당 지역은 전봉준 생가터라고 특정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천안전씨 중앙종친회 전세환 회장은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63번지 녹두장군 전봉준 생가터는 이곳이 부모와 함께 또는 조상 대대로 뿌리를 두고 살았다는 증거로 족보나 가문의 세거지 또는 함께 살았던 주변 사람의 명확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야 하지만,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이나 지역 촌로들의 증언만으로 해당 지역을 생가터라고 특정하고 있어 이것이 사실이라고 확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반면, 고창군은 전봉준 생가터는 천안전씨 파(派)보인 1886년 『병술보(丙戌譜)』에 대한 학술 고증을 통해 전봉준(全琫準, 1855∼1895) 장군이 1855년 12월 3일 죽림리 당촌 마을에서 태어나 13세까지 살았던 곳으로 확인된 바 있으며, 촌로들의 증언 내용과도 일치하는 장소로,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최고 지도자가 태어나고 유년기를 보낸 상징적인 장소라며 해당 지역을 전라북도 기념물로의 지정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천안전씨 중앙종친회는 “보내드리는 족보 자료를 다시 한번 검토하라”는 권고와 함께 고창의 주된 천안전씨 세거지는 당촌 주변의 집성촌과 아산, 벽송에 있는 집성촌 등을 들 수 있지만, 천안전씨 누구도 고창읍 죽림리 63번지가 전봉준 생가터란 사실을 인정한 바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전세환 회장은 또, “녹두장군에 대하여 명확히 알려면 백제부터 이어져 온 천안전씨 문중의 뿌리를 알아야 하고, 다양한 분야로 이어져 온 가문의 내력을 알아야 한다”며 “녹두장군 출생지와 관련하여서는 전라북도 기념물 등록 예고 이후 문중 차원의 자체 현장 조사계획이 있었지만, 현재의 코로나19 상황으로 보류가 된 상태”라고 밝혔다.
덧붙여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도록 전봉준 장군이 족보에서 나타나기 이전의 1674년 『갑인 대동보』부터 2013년 『계사 대동보』까지 천안전씨 족보의 변천사를 모두 엿볼 수 있는 족보의 기록들에 설명을 붙여 고창읍 죽림리 63번지는 녹두장군 전봉준 생가터가 될 수 없다고 판단돼 지난 10일, 전북도에 공문으로 천안전씨 종친회의 이런 입장을 보냈다”고 말했다.

실제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천안전씨 문중의 족보는 ①1~2회 동안 서문만 전해오고 ②1674년 『갑인 대동보』가 나왔고, ③1704년 『갑신 대동보』, ④1768년 『무자 대동보』, ⑤1800년 『경신 대동보』, ⑥1831년 『신묘 대동보』, ⑦1862년 『임술 대동보』에 ‘철로’, ▲1886년 『병술 파보』에 ‘병호’, ▲1887년 『정해 파보』에 다시 ‘무후(无后)’, ⑧1914년 『갑인 대동보』까지 ‘무후(无后)’로 이어진다.
이후 ▲1923년(癸亥年) 『전씨종약휘보』에 ‘갑오혁신 운동의 선구자요 중심인 전봉준의 위대함을 인정코자 한다며 민중적 자유와 사회적 평등을 위한 위인(甲午革新運動의 先驅요 中心인 全琫準 위대함을 認定코자 한다. … 歷史的 偉人 …)’이라는 기록과 함께 전봉준 장군을 우리 민족의 영도자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⑨1931년 『신미 대동보』부터 공식적인 ‘봉준’으로 등장하고, ⑩1953년 『계사 파보』에서는 다시 ‘영준’으로 기록되었다가 ⑪1968년 『무신인 대동보』, ⑫1986년 『병인 대동보』, ⑬2013년 『계사 대동보』 등에 그의 이름이 지속해서 기록되어 왔다.
이들 족보 중, ①~⑥까지의 천안전씨 언국(彦國)의 후손 중 녹두장군 전봉준의 조부인 ‘석풍’에 대한 기록이 족보에서도 확인되어야 하지만, 무후(无后)라는 기록과 함께 자손이 없다고 표기했다. 이후 ⑦1862년 『임술 대동보』에서 언국(彦國) 이하의 계보를 등재하게 된 이유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기영(基永)’으로 등장하고 ▲1886년 『병술 파보』부터는 이 ‘기영(基永)이 → ‘기창(基昶)’으로 바뀌고 ‘철로(鐵爐)’는 ‘병호(炳鎬)’로 바뀌어 표기된다.
하지만 ▲1887년 파보부터는 다시 무후(无后)로 기록되며 ⑨1931년 『신미 대동보』에서 느닷없이 ‘봉준’이란 인물이 등장한 후, 다시 ⑩1953년 『계사 파보』에는 ‘영준’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어 이후의 ⑪~⑬의 무신·병인·계사 『대동보』로 이어져 왔다.

이에 따라 천안전씨 문중은 ▲1862년 『임술보』와 ▲1886년 『병술보』에 전봉준이 등재되어 있었다면 문제가 없지만, 1886년 『병술보(丙戌譜)』에 계보 정리를 표시하면서도 특별한 수정내용 근거제시 없이 내용만 변경 등재한 점과, 처음으로 1931년 『신미 대동보』에 이전의 이름이 봉준으로 이름 바뀌고 내용을 등재한 것 등, ‘족보의 이름이 변동 없이 이어지는 원칙’이 깨진 기록이라는 점 등등의 문제를 지적해 온 바 있다.
또한, 기존의 문중에서 정식 발행한 『대동보』가 아니라는 점과 ▲1886년 파보(派譜) 형태로 발간된 『병술보(丙戌譜)』의 기록 등으로 볼 때, 일부 지역 향토사가들이 녹두장군의 고창 출생설을 애써 증명하려고 일부러 끼워 넣은 기록일 수 있다는 견해를 수차례 밝혀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세환 회장은 “본래 정읍 이평면 조소리가 녹두장군 생가터로 지정된 후 상량문이 발견돼 기존의 생가터가 고택으로 바꾸는 사례도 있었듯이 생가터와 출생지를 찾는 목적은 녹두장군이 추구했던 평등사회를 위한 혁신과 애민정신을 일깨우는 교육현장이 되어야 한다”며 “현재 행정이 명확한 고증 없이 밀어붙이기식으로 전라북도 기념물을 추진하고 있지만 여간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녹두장군 생가터는 부모와 자녀 모두가 함께 미래 대한민국을 위한 희망과 꿈을 키우는 곳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마디로 동학농민혁명 ‘총서(시작 ~ 사망까지)’를 만들어 명칭과 전개과정에 대한 제대로 된 고증이 필요한 상태”라며 “녹두장군 생가터는 지자체 창원의 성과나 전시성 행정이 아니라 명확한 고증을 통해서 진정한 교육장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명확한 고증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전세환 회장은 “현존하는 국내 성씨 중 백제 성씨로 금석문에 나타나는 성씨는 천안전씨의 기록이 최초이고, 그다음이 682년 백제 문무왕비에 경주김씨가 있으며, 당시의 백제 성씨로는 유일하게 대성을 이루어왔고 후백제, 고려, 조선, 현재까지도 천안전씨 문중은 과거의 고부군을 중심으로 부안, 태인에 세거지를 형성하여 현재까지도 그 뿌리가 이어져 오고 있다”며 고창 출생설을 부인했다.
한편 이와 관련해 전라북도 문화재계 이민석 학예연구사는 “현재 제기되고 있는 문제들은 추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통해서 해당 지역에 대해 전라북도 기념물로의 지정 여부가 결정될 것”이라며 “천안전씨 문중의 족보와 여러 의견도 심의 과정에서 심도 있게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고 밝혀 향후 문화재심의위원회의 결정에 귀추가 주목된다.
이용찬 기자 chans0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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