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이 무섭다” 휴대전화 위치추적서비스 요청 폭증
직장인 이미영씨(29. 여)는 최근 인터넷 쇼핑몰에서 호신용 경보기를 구입했다. “딱히 도움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잖아요. 퇴근길에 낯선 남자만 봐도 무섭고, 심지어는 제 그림자보고도 놀란다니까요.”
최근 몇년 사이 10여 명의 부녀자를 살해한 강호순 검거 이후, 그의 범행수법이 낱낱이 밝혀지면서 사회는 두려움과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검거 이후에도 여죄가 속속 밝혀지면서 더 많은 희생자가 추가로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웃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착하고 인사성 바른 아주 평범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내 주위에도 제2의 강호순이 없다는 보장이 없기에 더 두려워진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에만 1,000여 명이 살인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묻지마 범죄’로 희생됐다. 사랑하는 가족이 아무런 이유없이 고통 속에 죽어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은 평생 용서받아서도 용서해서도 안 될 범죄자.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또다시 사형제도와 인권에 관한 내용들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희대의 살인마 지존파, 유영철, 정남규…
1994년 추석 연휴 마지막날. 고향에서 돌아온 국민 앞에 비보가 전달됐다. 김기환(당시 26세) 등 폭력조직 ‘지존파(至尊派)’ 일당 7명이 93년 7월부터 5명을 연쇄살인하고 94년 9월 21일 경찰에 체포된 것. 93년 4월 김기환은 강동은, 김현양 등 학교 후배와 교도소 동기 등을 포섭한 뒤 인기 홍콩 액션영화 ‘지존무상’을 본떠 지존파를 결성했다. 이들은 93년 7월 길 가던 20대 여성을 목졸라 살해하고 그 해 8월에는 조직을 이탈한 송봉호를 살해했다. 이듬해 9월에는 이모 씨를 납치해 살해하고 불과 사흘 뒤 소모 씨 부부를 납치해 9월 15일 살해했다.
범죄 행각은 지존파 일당의 아지트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이모 씨의 신고로 조직원 6명 모두가 체포되면서 일단락됐다. 그 해 10월 재판에서 일당 6명 전원에게 사형이 선고됐고, 95년 11월 2일 사형이 집행됐다.
지존파 사건의 특징은 체포되고 난 다음에도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었고, 살인 이유를 ‘불평등한 사회의 모순’으로 돌렸다는 것. 또 철저히 준비된 비밀 통로와 사체 소각장을 완비한 ‘비트’형의 은신처에 ‘살인공장’을 차리고 살해, 시체 절단과 화장 등 엽기적인 행각을 벌였다. 이들 중 일부는 “살해 후 인육을 먹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들은 탈주범 지강헌을 동경했으며 현장 검증 후 “백번 죽어도 좋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돈많은 사람들을 더 죽이고 싶다”고 말해 국민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지난 2003년부터 2004년까지 발생한 유영철(당시 34세) 사건. 20명을 살해한 그의 범죄는 연쇄살인범의 극악무도함을 그대로 보여줬다.
지난 2003년 9월 7년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자마자 그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모 대학 명예교수 이모(당시 73세) 씨 부부를 둔기로 때려 잔인하게 살해하면서 연쇄살인을 시작했다. 이후 종로구 구기동 강모(81) 씨 일가족 3명 살해사건, 삼성동 유모(69) 씨, 혜화동 김모(87) 씨 등 그는 서울지역 곳곳에서 살인을 이어갔다. 부유층 노인을 범죄 대상으로 삼던 유영철은 2004년부터 직업여성으로 대상을 바꿨다. 출장마사지업소 직업여성 11명을 자신의 오피스텔로 유인해 잔인하게 살해하고 신촌 일대 야산에 암매장하기도 했다. 노인, 여성, 지체장애인 등을 살인 대상으로 삼은 그는 자신의 집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사체를 토막내고 토막낸 사체를 물에 씻는 등 엽기 행각을 서슴지 않았다. 유영철은 검찰에서 “잡히지 않았다면 100명은 더 살해했을 것이다”, “희생자 시신 일부를 먹었다”고 말하는 등 잔인함을 여과없이 드러내 국민을 경악케 했다. 현재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아직 집행되지 않아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다. 총 24건의 강도상해 및 살인 등을 저질러 13명을 숨지게 하고 20명에게 중상을 입혔던 정남규(40). 그는 2004년 1월 경기도 부천에서 윤모(당시 11세) 군과 임모(당시 10세) 군을 납치해 살해한 데 이어 경기도와 서울 일대를 돌아다니며 심야에 귀가하는 여성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거나 거주지에 침입해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는 등 연쇄살인 행각을 벌였다.
2006년 4월 22일 체포된 그의 범행동기는 단순했다. 그저 “세상이 싫다”는 이유로 아무런 원한도 없는 무고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묻지마 살인’을 저질렀던 것. 경찰 수사 결과 정의 노트에는 범죄의 수법이나 검거 경위 등이 자세히 적힌 기사를 스크랩한 자료들이 수두룩했으며, 이를 활용해 범행 때마다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복장을 간편히 했고,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행에 있어서도 성폭행만은 피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사이코패스 강호순 여죄는 ‘현재 진행형’
일대 주민 “무서워서 못살겠다”
강호순이 2007년 1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22개월 ‘범죄 공백기’에 무엇을 했느냐하는 것에 수사의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또 그의 범행으로 추정되는 충남 서천 카센터 여주인 살해사건 등 3건의 강력사건이 그와 연관됐는지도 관심을 끌고 있다. 경찰이 밝힌 대로라면 강호순은 뚜렷한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질렀다. 다른 ‘묻지마 살인’처럼 사회에 대한 반항이나 불만도 아니었다. 그래서 국민들을 더욱 경악하게 만든다.
범죄심리학자들도 강호순의 살인 목적은 ‘살인’ 자체라고 분석한다. 이런 분석은 검거 뒤 그의 행동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끔찍한 범행에 대해 죄책감을 보이거나 후회하는 모습보다는 시종 침착하다는 게 경찰의 설명, 심지어는 농담도 하고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잤다고 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얼굴이 공개된 데 대해 “내 아들들은 어떻게 살라는 것이냐”며 분노했다고 한다. 이어 지난 2월 3일 강호순이 경찰 조사에서 자신의 일대기를 담은 책을 펴내 이에 따른 인세를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입장을 피력했다는 보도가 나와 국민들은 다시한번 분을 참지 못했다.
강호순은 사회 부적응자나 외톨이가 아니었다는 점도 특이하다. 주민들에게 선한 인상의 부지런한 가장으로 기억되는 평범한 이웃이었다는 것이 더욱 세상을 경악하게 만든다.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한 명의 살인마가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사건 현장 주변을 배회하며 버젓이 다음 범죄를 모의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화성연쇄살인처럼 미궁에 빠질 수 있었던 사건이다. 강호순이 극악스런 범죄를 저질렀던 수원시 당수동 축사 일대 도로는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차량 통행이 뜸했다. 경기 서남부 지역 주민들은 연쇄살인처럼 흉악범죄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은 치안력 부재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 2007년 말 경기 지역의 총 범죄 건수는 서울보다 5% 포인트 정도 많은 37만 4,000여 건에 달하지만, 경찰 1명이 맡고 있는 인구수는 705명으로 서울의 511명에 비해 월등히 많다. 이는 전국 평균(507명)의 1.4배나 된다. 경기 지역 인구는 계속 늘고 있는 반면 경찰병력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강호순이 저질렀던 범행의 주 무대인 화성의 경우 매년 7%대의 인구 증가율을 보이고 있지만 치안력은 제자리 걸음. 인구 증가가 두드러지고 흉악 범죄들이 늘어나고 있어 언제 어디서 제2의 강호순이 나타날지 모른다며 주민들은 긴급 예산을 투입해서라도 대책을 세워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경찰 못믿겠다 - 호신용품, 사설 경호업체 의뢰 늘어
‘연쇄살인범’ 강호순 검거 이후, 자녀를 비롯한 가족 등의 위치를 알려주는 이동통신사의 위치찾기 서비스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KTF와 SK텔레콤, LG텔레콤 등 이동통신사에 따르면 휴대전화의 GPS기반 위치정보와 기지국을 이용한 안전·신변보호 관련 부가서비스는 물론이고 이 같은 부가서비스가 포함된 상품(요금제)의 가입자가 최고 30배까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월 평균 신규가입자가 600~700명에 그쳤던 KTF ‘아이러브 요금제’의 경우 강호순이 현장검증을 마친 지난 2월 2일과 검찰로 송치되던 3일 이틀 만에 전국에서 무려 3천600여 명이 신규 가입, 5배가 급증했다. SK텔레콤의 ‘가족안심서비스’와의 ‘자녀위치안심 서비스’도 큰 인기를 끌기는 마찬가지. ‘가족안심서비스’의 경우 강호순이 검거되기 전인 지난 1월까지 매월 평균 500여 명이 가입했지만 지난 2월 1일과 2일 이틀 동안에만 1천여 명이 추가로 가입을 신청했다. 이 서비스는 가족이나 친구 등 원하는 상대방 2명을 지정해 자신의 위치정보를 알려주는 서비스로, SK텔레콤은 향후 비상상황시 휴대전화에 경고음과 함께 112나 가족에게 정확한 GPS 위치정보를 전달하는 서비스도 실시한다는 계획이다.
또한 온라인 쇼핑몰의 호신용품 판매도 덩달아 증가하고 있다. 옥션과 G마켓 등 업계에 따르면 강호순 검거 사실이 알려진 지난 이후 1주일 동안 호신용품 판매량이 앞선 주보다 평균 50% 이상씩 늘어났다고 한다. 특히 여성들의 구매비율이 65%에 달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크게 높아졌다. 가장 많이 판매되는 제품은 주머니에 넣어 다닐 수 있는 크기로 위험상황 발생 시 100㏈ 이상의 경보음을 울려 주변의 이목을 끌 수 있는 경보기. 이 밖에 강철 삼단봉, 가스 스프레이 등도 많이 팔리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렇듯 더 이상 경찰만 믿고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 사회전반적인 분위기다. 내 자신을, 내 자녀를 스스로 보호하고자 사설 경호업체에 대한 의뢰도 대폭 늘어나고 등하굣길 위험지대에 CCTV를 설치해 달라는 요구도 폭주하고 있다.
다시 도마 위에 오른 ‘사형제도 존폐 논란’
국민여론은 강호순에 대해 ‘반드시 사형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사형집행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7년 12월, 23명을 한꺼번에 시행한 뒤로 11년 째 형을 집행하지 않고 있어 국제앰네스티(AI)는 한국을 사실상 ‘사형폐지국’으로 분류하고 있다.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 정남규 등 58명도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현재 수감 중에 있다.
이처럼 유명무실화한 사형제에 대해 박준선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 2월 1일 “최근 연쇄살인범죄에 관한 국민들의 감정과 사회적, 법적 안정성을 고려해 사형수들을 조속히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형제 존폐 논란에 불씨를 당겼다. 이에 앞서 김문수 경기도지사도 공식석상에서 “감옥에서 죄의식으로 눈물을 흘려도 결국 살인범”이라며 정부에 형 집행을 촉구했다. 국민여론도, 인터넷 상에서도 사형제를 적극 부활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사형제도 폐지에 관한 특별법안’은 지난 15대부터 18대 국회까지 사형 폐지 법안이 잇따라 발의돼 왔지만 아직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주무 부처인 법무부도 사형제 존폐와 관련해 아직 명확한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2008년 11월 국회 법제사법심사소위에 출석한 박병대 법원행정처기획조정실장은 “순수한 입법 정책의 문제로서 형 집행은 안 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반면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편에선 “복수와 원한 그리고 앙갚음이라는 부정적 정서의 고리를 끊어줄 수 있고 생명존중 인권존중에 입각한 훨씬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며 “감형이나 가석방 없는 ‘절대적 종신형’으로 사회로부터 영구 격리시키는 절충방안을 법제화 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대환 서울시립대 교수는 “사형제도는 생명권의 본질적인 부분을 침해하는 것으로 위헌이며, 사형제도의 위헌성을 개개의 사건과 연계해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치열한 찬반 논쟁이 오고가는 상황에서 살인마 강호순 사건으로 다시 ‘뜨거운 감자’로 도마 위에 오른 사형제도 존폐여부는 오는 6월에 있을 헌재의 판결에 따라 가려질 전망이다.
흉악범 얼굴공개 찬반논란
강호순의 얼굴이 언론에 공개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멀쩡하게 생겼네”, “순하게 생겼는데, 얼굴만 보고 판단해선 안돼”라는 반응이다. 엽기적인 살인마라 하기에는 너무도 평범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민들은 더 두려움에 떨고 있다. 소위 깍두기 머리나 칼자국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내 이웃조차 못믿게 된 무서운 세상이 된 것이다. 강호순의 얼굴이 일부 언론에 공개된 것과 관련해 법학계에서 찬반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법률신문이 국내 헌법학자 30명을 대상으로 흉악범의 얼굴공개에 대한 찬반을 묻는 긴급 전화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절반을 조금 넘는 16명(53.3%)이 반대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찬성입장을 보인 학자도 14명(46.7%)에 달했다. 반대론자들은 무죄추정원칙과 피의자 인권보호를 논거로 들었다. 또 얼굴공개로 얻을 수 있는 사회적인 실익이 없다는 것과 피의자 가족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등 사실상의 연좌제로 기능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찬성론자들은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준 흉악범의 경우 피의자의 권리보다 공익차원에서 국민의 알권리가 우선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특히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해 공적인물이 된 사람에 대해서는 프라이버시권보다 알권리가 우선된다는 ‘공적인물이론’을 근거로 들었다.
법학계는 얼굴공개와 관련, 무죄추정의 원칙과 알권리를 놓고 서로 상반된 입장을 보였다. 조한상 청주대 교수는 “무죄추정원칙에 따라 유죄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얼굴이 공개돼서는 안된다”며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얼굴공개는 자기책임주의에도 반한다”며 반대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에 반해 민병로 전남대 교수는 “국민의 알권리와 공익성이 우선돼야 하며, 본인이 이미 자백을 했고 증거가 명확하므로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하지 않고 초상권 침해도 아니다”고 말했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앞으로도 묻지마 범죄와 유사한 범죄들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러한 범죄들을 줄일 수 있을지가 가장 큰 숙제다. 사이코패스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분석이 월등하다. 이러한 범죄를 근절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여러 가지 제반 구조의 변화들이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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