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J 공격적 드리블, 2012 ‘차기’ 겨냥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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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J 공격적 드리블, 2012 ‘차기’ 겨냥하나
  • 신현희 차장
  • 승인 2009.04.15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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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밀을 찾는 소망’ ‘아산정책연구소’ 등 대권 향한 물밑작업
MJ 측 “우리나라도 순수한 정책연구소 필요하다.”

한나라당 정몽준 최고위원이 지난 2월 6일 여의도 한서빌딩 4층에 ‘해밀을 찾는 소망’이란 이름의 정책연구소를 개소했다. ‘해밀’이란 ‘비가 온 뒤에 맑게 개인 하늘’이란 뜻의 순수 우리말로, 국가적인 어려움을 극복해가고자 하는 바람을 담은 것으로 해석된다. 활발한 입법활동과 정책 어젠더 개발을 위한 정책연구소답게 개소식에 이어 김용호 인하대 교수의 발제(주제: 글로벌 경제위기 속 정치의 역할)로 토론회를 열었으며, 각 분야별 자문교수단 30여 명을 위촉, 정례 세미나와 토론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대권과는 무관, 순수한 정책 활동 강조
정 최고위원은 인사말에서 “책임있게 일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준비가 필요하다는 아쉬움이 늘 있었다”며 “정치인에게 가장 바람직한 것은 정쟁과 정책 수립하는 일의 균형을 맞추는 것인데, 앞으로 이 사무실이 순수한 사람들이 모여 순수한 정책연구를 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박희태 대표는 축사를 통해 “정몽준 최고위원께서 우리 한나라당으로 온 이래 큰 행보를 그리면서 확실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며 “나라를 살리는 꿈, 또 이 겨레를 구하는 꿈, 우리 한민족을 주역으로 만드는 꿈 등 많은 꿈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고 정 최고위원을 칭찬했다.
이윤성 국회 부의장도 “정 최고위원은 선이 굵은 것 같으면서도 아주 섬세한 사람”이라며 “어느 순간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연구소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과거, 현재, 미래를 창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한편 이날 개소식과 토론회에는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를 비롯, 홍준표 원내대표, 이윤성 국회부의장,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 안경률, 주호영, 전여옥, 김효재, 고승덕, 김소남, 조해진, 주광덕, 조진래, 안효대, 이은재, 김성태, 조윤선, 정두언, 손숙미, 원희목 등 40여 명의 의원과 400여 명의 참석자들이 함께 했다. 또한 지난 2월 11일에는 정몽준 최고위원의 싱크탱크가 될 ‘아산정책연구원’ 기공식이 있었다. 오는 11월 경 완공예정인 이곳은 광화문 인근에 지상 3층, 지하 3층 규모의 새 건물에 입주하는 동시에 연구 인력을 대거 확충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외교안보 및 민간안보 분야 종합싱크탱크를 지향하고 있으며 신임 원장으로는 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인 송영식 씨가 선임됐다. 정 최고위원의 이 같은 활발한 행보에 대해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서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물밑작업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정 최고위원 측은 정책연구소 설립이 대권과는 무관하다며 순수한 정책 활동임을 강조했다. 정 최고위원 측은 “아산정책연구원의 경우 한승주 전 외무장관이 이사장을 맡는 등 정치권과는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다”며 “6일 설립된 정책연구소인 ‘해밀을 찾는 소망’도 본인과 당 소속 의원들의 입법 활동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일 뿐 대권과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정몽준 최고위원은 “미국 상원의원의 경우 보좌관이 60여 명, 하원의원도 20여 명이 있는데 초선 때부터 이 정도 수준의 의정활동 보조기구가 있었으면 했다”고 말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아산정책연구원이 이러한 활동을 대신해 줄 것이라고 했다.

당내 대표적 ‘미국통(通)’으로 향후 대미 외교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란 시각 지배적
정몽준 최고위원은 14대와 17대에 이어 18대에서도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국회 한미의원외교협의회 회장인 그는 미국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 후보가 당선된 직후 한나라당이 설치한 한미관계특위 위원장을 맡았다. 우리나라에서 오바마 대통령 측과 직접적인 핫라인이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당내 대표적 ‘미국통(通)’으로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시절 대미 특사로 워싱턴에 다녀오기도 한 그가 오바마 정부 핵심 인사들과의 인맥을 바탕으로 향후 대미 외교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란 시각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러한 정 최고위원을 가리켜 오바마 정권 최대 수혜자라고도 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미국 유력 정치인 모임인 ‘알팔파(Alfalfa) 클럽 만찬’에 참석, 오바마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축하한다”면서 “전세계는 성공하는 미국대통령을 필요로 한다. 잘 하길 바란다(The whole world needs successful American President. Good luck!)”라고 인사말을 전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오바마 대통령은 “고맙다”고 감사의 뜻을 밝혔다. 알팔파 클럽은 미국의 정·재계 고위인사 200여 명으로 구성된 모임으로, 1913년 발족된 이래 부시 대통령을 포함해 여러 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다. 매년 1월에 열리는 연례 만찬에서는 대통령에게 만찬사를 요청하는 전통이 있어 부시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 매년 만찬사를 했다. 이날 만찬에는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해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존 로버츠 대법원장, 티모시 가이트너 재무장관, 힐다 솔리스 노동장관, 조지 부시(아버지) 전 대통령, 존 매케인 전 공화당대통령 후보, 사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 등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의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만찬에는 이밖에도 조셉 리버만, 키트 본드, 제이 록펠러, 다이앤 파인슈타인 상원의원과 마이클 브룸버그 뉴욕시장, 존 손튼 브루킹스연구소 이사장, 에드 퓰너 해리티지재단 이사장, 월스트리트 저널과 폭스채널 대주주인 루퍼트 머독 회장 등 700여 명의 미국 정·재계 지도급에서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참석했다.
정몽준 최고위원의 알팔파 클럽 참석은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초청으로 이루어졌으며, 한국 정치인으로는 처음 참석한 것이다. 이에 앞서 정몽준 최고위원은 미국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주최 오찬에 참석해, 제임스 존스 국가안보보좌관, 사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 다이앤 파인슈타인 상원의원(민주당, 캘리포니아),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등과 환담했다. 이 자리에서 정몽준 최고위원은 제임스 존스 신임 국가안보 보좌관과 새로운 국제안보환경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고, 사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와는 한국-알래스카 경제협력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정몽준 최고위원은 지난 30년간 한국-알래스카 경제협력위원장을 역임한바 있다. 샌프란시스코 시장을 지낸 파인슈타인 상원의원과는 20년 전 시장 재직 시절 만났던 추억담을 나누며 한미경제협력 증진방안에 대해 협의했다.
이렇듯 대외적으로는 대통령보다 그가 더 유명하다. 이러한 이점을 십분 활용한다면 향후 대미외교에서도 무언가 가시적인 성과를 이끌어 낼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국내외에서의 거대한 존재감 발휘
정몽준 최고위원이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임에는 틀림없다. 1988년 5월 제13대 총선을 통해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정 최고위원이 요즘처럼 활발히 여의도식 정치를 한 적이 없다. 2002년 대선 출마 후 2007년은 건너뛰었지만 2012년을 겨냥한 꾸준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 4·9 총선 때 지역구를 울산 동구에서 서울 동작을로 옮기고, 전당대회에서 대표경선에 출마하는 승부수를 띄운 것도 대권도전에의 의지를 피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차기 대권에 대해 인정하든 아니든 간에 국민의 눈에 이미 그는 유력한 대권주자로 보여지는 것이 어쩌면 그에게는 유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론에서 정 최고위원을 ‘차기’ 반열에 올려놓고 물을 때마다 그가 하는 말은 이런 내용이다. “우리가 등산을 할 때 산꼭대기만 보고 갈 수는 없고, 실제로 꼭대기가 잘 보이지도 않는다. 과정이 중요한데 그 과정을 가다 보면 정상에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 한마디가 그의 모든 의중을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제가 6선 의원인데, 처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때 정치를 한다기보다 공직에 몸담는다는 생각을 했어요. 2002년 어려운 시간이 있었을 때는 정치를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도 했어요. 무기력감, 자책감도 많이 느꼈고. 어쨌든 무소속 의원을 오래했는데 한나라당에 와서도 대의원과 국민이 잘 봐주시니 능력이 부족하지만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정 최고위원이 2012년에 대선고지 등정에 나설 경우 ‘대권 재수(再修)’다. 그는 2002년 대선 때 ‘국민통합 21’을 창당해 대권에 도전했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로의 후보단일화에 합의한 뒤 투표 전날 노 후보 지지를 철회한 바 있다. 그가 당시에 느꼈다는 ‘무기력감’은 정치권에서의 세(勢) 불리를, ‘자책감’은 노무현 후보와의 섣부른 후보단일화를 의미하는 것 같았다.
정 최고위원은 그동안 무소속으로 활동하다 대선 직전인 97년 12월 3일 이명박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오랫동안 ‘친정’없이 지냈기 때문에 당내 기반이 약한 것도 사실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현대 패밀리’라는 점도,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라는 점도 그에게는 플러스 요인이 아니다. 본격적인 대권레이스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까마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의 이름이 ‘포스트MB’로 거론되는 것은, 조용한 정치적 행보를 시작했지만 어쩔 수 없는 그의 거대한 존재감 때문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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