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5월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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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5월항쟁
  • 시사매거진
  • 승인 2004.05.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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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여, 아시아의 십자가여
80년 광주에서 98년의 자카르타까지...왜 대표적인 시민항쟁은 모두 5월인가
5월이라는 단어는 한국인들에게 특별한 어감을 주고 있다. 민주화투쟁이니 노동운동이니 혁명과 같은 역동적인 사회학적 용어로 흔히 통용되어 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아시아권의 나라들도 5월이라는 단어는 우리나라의 5월과 같은 의미로 생각되어 지니 말이다.


사회학적 용어처럼 통용되는 ‘5월
1980년 5월이 광주의 것이라면, 1984년 5월은 필리핀의 몫으로, 1990년 5월은 항군의 몫으로, 1992년 5월은 방콕의 몫으로 그리고 1998년 5월은 자카르타의 몫인 것처럼 지난날 식민통치의 경험과 군사독재정권의 출현이라는 공통적인 아시아적 정치현실 곳에서 경제성장에 볼모로 잡혔던 시민들이 스스로 주인임을 선엄한 것이 아시아의 5월이었다면, 그 주인들이 고용한 적도 없는 군사독재자들의 총부리 앞에 죽임을 당했던 것이 또 아시아의 5월이었다.
아시아의 5월에는 피를 먹고 핀 꽃들이 여기저기 만발했고, 그 5월의 꽃들이 아시아 시민들의 품속에서 소중하게 자라나기까지는 ‘광주’의 모진 시련이 길잡이 노릇을 했음을 아시아 시민사회는 부정하지 않는다. 5월은 그렇게 항쟁을 명령했고, 아시아 민주화운동을 주도해온 한국, 필리핀, 미얀마, 타이, 인도네시아는 모두 그 5월을 기꺼이 혁명의 계절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뜨거웠던 5월 아시아의 함성은 이제 시민항쟁사의 한 도도한 장으로 넘어갔다. 주인을 능욕했던 5월의 학살자이자 저격수, 전두환도 마르코스도 수하르토도 수친다도 모두 추악한 군인 독재자로 기록되면서 광주가 끝났다고 믿는 이들이 아무도 없듯이, 필리핀은 지난 1월 부패한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피플파워2’의 힘으로 몰아낸 뒤 빈혈증세를 보이고,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 축출 이후에도 계속되는 정치적 혼란과 기득권층의 반역으로 심장마비 상태다. 타이는 정치의 외형적 민주화와 달리 봉건적인 사회문화가 말기 암처럼 번져 있으며, 버마는 10년이 넘도록 시민들을 가둬버려 사회 전체가 질식상태에 빠져있는 꼴이다보니, 그 5월은 다시 또 5월을 부르고 있다.
“지쳤다. 바뀌어야 할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났다” 말레이시아 건축가 아흐메드의 말이다. “부끄럽다, 변혁의 기운이 없는 허무한 사회에서 산다는 것이...” 일본 기자 요시노리의 말이다. “동남아시아처럼 전면적인 민주화투쟁이 절실한 상태다” 파키스탄 공무원 자히드의 말처럼 아시아는 모두 5월에 대한 동경을 숨기지 않았다. 이게 바로 2001년 아시아 5월의 자화상이다.

다시 ‘5월’을 기다리는 나라들

저번 5월 달에 아시아 네트워크에서 아시아의 민중항쟁과 민주화운동은 어디쯤 와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광주에 외롭게 떠넘겨놓은 5월의 숙제를 다시 끄집어내었다. “또 광주인가?” 아시아 네트워크의 5월을 진부한 화두라 나무라는 이들도 있겠지만, 광주를 보고 5월을 꿈꾸었고 광주를 보면서 5월을 풀어나가는 아시아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담았다.
아시아 네트워크는 저번 기획을 통해 ‘5월학’을 뜻있는 독자들의 몫으로 넘기면서, 아시아 연대의 출발점을 5월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왜 아시아의 대표적인 시민항쟁이 모두 5월이었던가?”


태 국
학살의 원흉들은 안녕하시다
한국처럼 어떤 형태로든 5월 주범들을 손보지 않는 한, 아직은 5월을 미화할 수 없다
1992년 5월 방콕민주항쟁. 30만 명 웃도는 시민들이 모여든 민주광장 사남루앙에서 시민들은 하나둘씩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세계화’와 ‘쿠데타 중단’의
함수관계

세월은 흘러 그날의 ‘저격수’ 수친다 장군은 이제 ‘전설’속으로 묻혀가고 있지만, 타이현대사를 얼룩지게 했던 스물네번의 크고 작은 군사 쿠데타의 역사는 아직도 현실 속에 살아 있다. 학살자 수친다가 아직도 제한없는 풍요로운 삶을 만끽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9년 동안 총리가 몇 번이나 바뀌었지만 5월 학살의 원흉들을 손끝 하나 건드려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화의 논리가 적어도 타이 군인들의 행동양식에는 일정한 영향을 끼쳐왔다는 뜻인데, 군인들이 지나치게 투자에 열을 올린 탓으로 쿠데타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쿠데타, 이것도 이제는 국제시장과 연동되어 있는 사실은 지배당해 있는 탓으로, 발생 즉시 주가가 폭락할 것이고, 군인 투자가들이 신세를 망치게 된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깨닫고 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세계화인가!
5월, 그 피의 대가로 적어도 타이에서 중산층이라 자부하는 시민들과 교육 잘 받은 시민들은 제법 진보적으로 바뀐 신헌법을 즐기고 있다. 정부가 지니니 정보를 열람할 수 있고, 남성과 여성 사이의 평등권을 말할 수 있고, 언론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고 외형상으로 분명 자유다. 정부 기구들은 개선의 길로 들어섰고, 시민들은 정부의 정책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쁨도 일정부분 누리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 어디에도 5월 정신은 없다

그러나 한 움큼만 파고들어가 보면 타이사회가 아직 민주적 문화와는 멀리 떨어져 있음이 쉽게 발견된다. 노동현장을 보자. 타이의 노동조합은 자본가들의 횡포뿐만 아니라 사회의 문화 형태 탓으로도 신음하고 있다. ‘선임자’, ‘고참’, ‘어른’...이런 조건들 아래 노동권이나 인간성 마저 침탈당하고 있다. 타이사회 어디에도 5월의 정신은 없다. “학생과 교수들이 대학의 시 외곽 이전을 반대하면서 시위를 벌이지 않는가”, “여성들도 승려가 될 자격을 요구하는 이 현실은 또 어떤가” 이들이 바로 5월 항쟁을 말할 때마다 ‘무선전화기 혁명’이라는 수사를 즐겨 쓰며 중산층들의 시위 참여에 큰 비중을 실어 온 자들이다.
지난 8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시민들은 화환을 바치고 신문들은 희생당한 영웅들을 추도 할 것이다. 또 각종 사회단체는 5월의 참뜻을 세우겠다고 시끌벅적 회의를 열 것이다. 5월. 그 정의와 민주에 대한 정신을 일년에 한두번 기념식장에서 속삭이면 되는 것이라고 믿어본 적도 없거니와, 마치 살인 사건에 대해 수사 착수도 해보지 않은 채 사건을 종결해버린 것과 같은 현실을 아무도 나무라지도 않는 그 5월을 정상적인 5월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피를 더 요구할 것이라는
끔찍한 예감

5월. 타이의 5월 속에서 아직은 불길한 기운을 완전히 지울 수가 없다. 민주화가 정치와 사회 속에서 완전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그리고 민주화가 말과 행동 속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피를 부를 것이라는 그런 끔찍한 예감이 든다. 타이사회의 민주화 노정에는 앞으로도 수많은 ‘5월’이 필요하고, 그 5월을 향한 노력들의 첫걸음은 누가 뭐라 해도 학살의 주범들을 밝혀내고 처단해야 한다는 게 슬픈 현실이다


필리핀
두 번의 5월, 그 천국과 지옥
‘피플파워 1·2의 자존심’, 2001년 5월 ‘에스트라다 지지 폭동’으로 상처받다
적어도 가난과 불평등으로 치어온 필리핀 시민들에게는 5월이 화려한 축제도 화려한 꽃의 계절도 아님이 분명하다. 5월의 꽃들이 성모 마리아에 대한 축성으로 바쳐지는 계절이다 라고 종교적으로 말할 수 있다.
마오쩌둥식으로 말하라면 “5월의 필리핀 열대기후는 수 백종의 다양한 꽃들을 만발하게 했다”쯤 될까?
선거거부운동과 야당의 분열

필리핀의 5월, 그 5월은 아시아의 5월처럼 필리핀 시민항쟁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그 해 그 뜨거웠던 ‘선거거부운동’은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에게 빼앗긴 자유를 되찾기 위한 시민들의 투쟁을 선도했고, 결국 1986년 2월 혁명의 탄탄한 디딤판이 되었다.
당시 마르코스 대통령은 야당 지도자 베니그노 아키노 암살(1983년 8월21일)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거센 시위가 수그러들지 않자 국가의 안정을 내걸고 ‘국민의회’ 선거 실시를선언했고, 분노한 시민, 사업가, 전문사집단, 종교인을 포함한 반마르코스 진영은 ‘선거거부’로 맞받아쳤다.
5월 선거거부운동의 성과는 이어지는 대통령선거에서 훼손을당하기도 했다. 대통령 선거가 발표되자 야당은 분열되었다. 이렇게 ‘5월’이 곡절을 겪는 동안, 민주화의 성지가 된 에드사(EDSA)에 운집한 수백만 시민들의 기운에 질린 마르코스는 1986년 2월25일 결국 21년간의 독재를 마감하고 사라졌다. 당시 시민들은 대규모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과 마르코스에게 등을 돌린 군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모여들었고, 이 평화적인 반란은 이른바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굳어진 ‘피플파워’로 거룩한 필리핀의 정신이 되었다.

극빈자들이 에스트라다의
방패가 되다니...

그러나 불행하게도-필리핀 시민들은 이렇게 여기고 있다- 1980년대의그 빛났던 ‘5월’은 아무도 원치 않은 2000년대의 ‘5월’을 다시 불러냈다.
‘노동절 대혼란’ ‘5월의 포위공격’ ‘5월1일 대공세’ 이런 고상한 인간적인 제목들이 모두 마약에 중독된 깡패들이 에스트라다의 석방을 외치며 에드사와 말라카냥 대통령궁 앞에서 벌인 시위를 뜻하는 말이 되고 말았으니… 5월의 정신, ‘피플파워1’과 ‘피플파워2’는 이렇게 참담하게 짓밟힌 것이다.
이들이 자신들의 투표가 부유한 엘리트들에 의해 무효가 돼버렸다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국 에스트라다가 가난한 이들에게 약속했던 고급교육, 고용안정, 의료혜택, 안전한 주택 같
은 이른바 ‘말쑥한 삶’이 실현된 적도 없었을 뿐더러, 에스트라다가 자신의 배를 채우는 일에만 급급했음에도 여전히 가난한 이들은 그의 원상회복을 바라고 있다.

진정한 5월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길

가난한 이들은 에스트라다가 써먹은 ‘선동정치’의 진실을 보지 못했고, 이 지점에 바로 후임 아로요 대통령의 도전과 성패가 걸렸다. 7,600만 전체 인구 가운데 40%이상이 빈곤에 허덕이는 필리핀 사회에 진정한 의미의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펼치는 길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만발하는 열대 필리핀 5월의 꽃들은 여전히 가난한 이들의 눈물 너머 아스라한 아지랑이로 피어오르고 있다. 진정한 5월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길은 멀기만 한데.

인도네시아
약탈과 학살, 강간과 반공을 넘어
수하르토의 망령에 짓밟힌 98년 5월정신이 다시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5월 2일 ‘교육의 날’에 동부 자카르타의 사범대학(IKIP)학생들은 수하르토의 부정과 부패를 규탄하며 국민 협의회(MPR)를 향해 교외 진출을 시도했다. 폭동진압 경찰은 공포탄을 쏘아대며 저지하고, 이것은 곧 두 명의 중상자를 발생케하는 사건이 되었다.
5월11일 자카르타 서부의 트리삭티대학, 인도네시아 학생운동사에 정치무풍지대로 기록되었던 트리삭티에서 최초로 수하르토 규탄 집회. 폭동진압군의 발포로 학생 6명 사망.
5월12일 자카르타 전역 무법천지로. 상가 불타고 사망자 속출. 도심에 탱크 진주. 특전사 코파수스 폭동진압 훈련 개시.
5월13일 인도네시아 전역 혼란의 도가니로. 전국적으로 사망자 발생. 화교여성들에 대한 조직적인 성폭행 자행.
5월15일 전략예비사령부에서 정치·군부 비밀회담 개최.
5월16일 5만 여명의 대학생들 국민협의회 점거 시위 돌입. 인도네시아 전역 혼란 상태로.

일찌감치 5월은 ‘혁명의 계절’

마침내 5월21일, 수하르토는 하비비 부통령에게 대통력직을 물려주고 32년 독재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렇게 해서 1998년의 5월은 끝이 났다. 따져보면, 인도네시아 역사에서 일찌감치 5월은 ‘운동성’이 충만한 혁명의 계절로 여겨져 왔다. 네덜란드 시민통치 아래서 민족교육을 주창했던 인도네시아 교육의 아버지 키 하자르 데완타라의 생일인 5월2일이 ‘교육의 날’로 정해지면서 5월은 늘 학생운동의 계절처럼 여겨져왔고, 자바의 7개 학교 학생들이 저항운동단체 보에디오에토모를 조직해 네덜란드 식민통치에 본격적인 항쟁을 시작한 5월20일이 ‘국민각성의 날’로 자리잡으면서 또 5월은 저항의 기운을 북돋워왔다. 그래서 해마다 5월이 오면 위기설이 퍼졌고, 시민들은 뭔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감과 불안감에 사로잡혔던 것이 인도네시아 5월의 현대사였다. 결국 수하르토 철권독재 32년만인 1998년, 5월은 현실로 대답하였다.
그해 인도네시아의 5월은 다른 아시아의 5월과 달리 영광과 능욕이 어우러진, 천국과 지옥이 뒤섞인, 환희의 눈물과 학살의 피가 혼합된 말 그대로 잡탕의 현대사였다. 그로부터 만 3년이 지난 2001년 5월, 민주화투쟁의 장엄한 희생도 달콤한 열매도 아직 인도네시아 시민들의 몫이 아님을 우리는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군부는 여전히 정치판에 한쪽 발을 담그고 있으며, 32년간 기승을 부렸던 음모와 부패와 족벌주의 전통은 지금도 완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추악한 냄새만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정체불명의 군부가 조종하는 정체불명의 사병조직들이 회교주의를 내세우며 활개치고, 협애한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한편의 무리들은 공산주의 박멸을 외치며 진보적인 출판물들을 불태우며 난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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