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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가 자신감 가져야 가정도 편하고 나라도 편해" |
1992년 클린턴이 대통령이 된 후, 그 부인인 힐러리가 새로운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제시한 이래 영국에서도, 유럽에서도 종전의 전통적인 내조와 구분되는 새로운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이 부각되고 있다. 클린턴은 1992년 선거에서 “한명 값으로 두명을”(two for one price)이라는 구호로 부인인 힐러리를 정치적 파트너로 인정, 힐러리는 대통령 부인이 된 후 내조자에 그치지 않고 ‘부부대통령’이라는 말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정치활동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경험은 실제로 자신이 대통령으로 가기 위한 초석이 되었고, 현재는 선의의 경쟁 끝에 오바마 대통령의 최측근인 국무장관의 위치에 있다. 이러한 퍼스트레이디 역할의 세계적인 추세와 함께 ‘대통령 부인의 역할’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한 정치적 시점에 와 있기도 하다.
대통령 부인이라는 자리는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최측근으로서의 권력을 가지며 대통령의 동반자로서의 정치적 지위를 갖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대통령 부인은 가능성과 제약 사이에서 자신의 역할을 적절하게 설정해야 한다. 남편이 대통령이 되는 순간 대통령 부인은 공인이 되며 온갖 잡지, 신문, 방송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개인생활이 사라져 버린다. 그러한 상황에서 대통령 부인이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고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설정한 목표와 성향, 당대의 정치적 사회적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대통령보다 더 강해야 하는 자리 ‘영부인’
최근 정부 출범 1주년이 지나면서 조용한 듯 강한 김윤옥 여사(62)의 삶에 대해 국민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통령보다 더 강한 심장을 가져야 하는 자리. 나랏일을 하면서 시시때때로 욕을 먹는 남편의 모든 것을 감싸안아야 하기에 더욱 그렇다. 대통령이 웃으면 경기가 이 모양인데 웃음이 나느냐고 욕먹고, 인상쓰면 잘한 게 뭐 있다고 인상까지 쓰냐고 욕먹고… 힘들 것을 예상치 못한 바는 아니겠지만 그런 남편을 바라보기가 마냥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청와대 안방마님 김윤옥 여사는 1년이 된 시점에서야 정부의 정책정보지 ‘위클리 공감’ 창간호에서 ‘청와대 내조 1년’의 소회를 처음으로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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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와대에 들어오기 전부터 김윤옥 여사가 자원 봉사 활동을 꾸준히 했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 영부인이 된 후에도 그녀의 봉사 활동은 계속됐다. |
복지의 사각지대 찾아 봉사하는 것이 행복한 김윤옥 여사
그녀는 “대통령께서 어릴 때 어렵게 생활한 건 다 아시잖아요. 시어머님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는 게 봉사다’고 늘 말씀하셨답니다. 그 영향으로 대통령께서 서울시장은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겠다고 하시는 바람에 월급을 구경도 못했죠. 대학시절 환경미화원으로 일한 경험이 사무쳤는지 환경미화원 자녀들의 장학금으로 다 내놓으셨지요. 그때는 저도 기꺼이 따랐는데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월급을 다 내놓겠다고 하셔서 처음엔 반대했습니다. ‘대통령이라도 돈이 있어야 손자 손녀들이 오면 용돈이라도 주지 않겠느냐, 재산도 내놓고 월급도 내놓으면 무슨 수로 사느냐고요. 저한테 묻지도 않고 결정하셨으니 기자회견 해야겠다’고 농담으로 했더니, 월급을 전부 제 통장으로 옮겨 ‘마음대로 쓰라’고 하시더군요. 어리둥절했는데 그날 저녁 하시는 말씀이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들 찾아다니는 일을 많이 할테니, 그 때 적절히 쓰면 좋긴 하지’ 하시는 겁니다. 덕분에 지금은 많은 보람을 느끼고 있지요. 대통령께서 일일이 다 못 챙기는 서민들을 살피고 보듬는 것이 부족하지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와대에 들어오기 전부터 김 여사가 자원 봉사 활동을 꾸준히 했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영부인이 된 후에도 그녀의 봉사 활동은 계속됐다.
“모시는 사람들이 대통령께 잘한다, 못한다고 말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제가 쓴소리하는 역할을 하지요. 항상 세상 돌아가는 일에 귀를 열어놓고 대통령이 미처 챙기지 못한 사안에 대해 조언을 드립니다. 그렇다고 잔소리만 하면 역효과가 나요. 저도 젊을 땐 잔소리를 곧잘 했는데 살다보니 지혜가 생기더라고요. 사실 한 번만 얘기해도 알아듣거든요. 심한 말을 하면 다크 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온다는 말도 있잖아요. 좋은 말만 하면서 긍정적으로 사는 것은 남을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좋아요.” 그녀는 삶에서 묻어난 지혜를 소개했다. 김 여사는 대통령에게 어떤 말을 전할 땐 편지를 자주 쓴다고 했다. 오가는말들 중에서 새겨들었으면 하는 것들을 모아 편지를 쓰는데, 잔소리처럼 들리지 않게 좋은 이야기를 많이 쓰고 나중에 꼭 하고 싶은 말을 두세 번 반복해서 쓴다고 했다. 상대방의 입장을 최대한 배려한 편지가 가장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했다.
가끔 기념일 같은 때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손수 카드를 준다고 했다. “카드에는 꼭 ‘사랑하는 윤옥에게’로 시작해 ‘명박으로부터’라고 끝나요.” 이는 TV 인터뷰를 통해서도 꽤 유명해진 말이다. 바쁘고 힘든 와중에도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있기에 많은 고비를 넘어설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어려워지면서 부쩍 주부들이 일자리를 찾아 나서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어요. 경제가 어렵다는 걸 저도 많이 체감합니다. 국민의 기대에는 못 미치더라도 연말쯤엔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어요. 우리나라를 훌륭하게 키워낸 건 여성이자 어머니입니다. 여성은 사회 변화와 발전을 주도하며 21세기를 이끌어가는 힘입니다. 여성이 가정의 주체로, 사회의 주체로 인정받게 된 데는 많은 여성들의 노력과 보이지 않는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은 모두가 힘든 시기입니다. 이럴 때 어머니들께서 사랑과 믿음의 힘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지치고 힘들 때라도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김윤옥 여사는 부드러움과 강함, 단아함과 소탈함, 지혜와 능력을 두루 겸비한 퍼스트레이디였다.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도 읽고 국민이 즐기는 TV드라마도 본다는 그녀. 대통령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으로 때로는 쓴소리도 아끼지 않지만, 대통령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보듬어 안을 줄 아는 현명함이 그녀의 삶을 더욱 값지게 만들었다.
우리나라 영부인의 유형은 각기 다르다. 전통적인 내조형이 있는가 하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영부인도 있다. 물론 이들에 대한 평가는 각기 다르지만 국민들은 시대가 변해갈수록 숨어있는 영부인보다는 참여형 영부인의 모습을 기대한다.
“전통적 내조형에서 적극적 개입형까지 다양한 유형” | | 프란체스카 도너 대한민국의 제1,2,3대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으로, 대한민국 첫번째 영부인이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업가 루돌프 도너의 세 명의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34년 제네바에서 이승만을 처음 만났고 같은 해 10월 8일 미국 뉴욕에서 결혼했다. 1945년 10월 이승만과 함께 귀국하였다. 이후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을 따라 경무대로 이주하여 살았다. 1960년 이승만이 자진 사퇴하고 하와이로 휴양차 출국하자 함께 하와이로 떠났다.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이 사망하고 그 뒤로도 하와이에서 거주하다가 오스트리아로 갔다가 1970년 5월 16일 귀국하였다. 1992년 3월 19일 사망하여 부군 이승만의 묘소 옆에 합장되었다. 공덕귀 여사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의 부인으로 1년 8개월간 영부인의 삶을 살았다. 공덕귀 여사의 자서전 출간에 깊이 관여했던 이현숙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는 “영부인 이후의 삶이야말로 본래의 리더십을 충분히 발휘한 삶”이라 요약했다. 이 부총재에 따르면 “교회 활동과 해위(윤보선 대통령의 호)의 반독재 투쟁으로 투사가 될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민주화 인권운동의 리더십을 한껏 발휘했다”고 했다. 여사와 운동을 함께 한 박영숙 한국여성재단 이사장도 “공 선생 말씀에 따르면 자신이 영부인이었다는 게 (소외되고 억눌린) 이들에게 힘이 되기 때문에, 또 그것이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자신이 안 나설 수 없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1년 8개월은 아주 조용한 영부인으로 지냈다. 정치에 참견도 하지 않았고 일체의 봉사활동도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와 남편, 그리고 아이들을 보살피는 주부의 자세를 가졌다. 육영수 여사 과거는 잊혀지기 마련인데 영원한 국모 육영수 여사는 시대가 지날수록 더 생생히 기억되는 인물이다. 1963년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영부인으로서 각종 사회활동, 육영사업, 적십자활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육영수 여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의도와 다른 견해일지라도 이를 정확히 전달하고, 시중의 여론을 대통령에 전하는 투명한 언론창구역할을 해 ‘청와대내 제1야당’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육 여사는 많은 봉사활동과 경제재건사업을 실시했고, 재산욕·권력욕 등 사리사욕에 빠져들지 않으며 권력주변부의 역학관계를 명확하게 인지, 사리판단을 함으로써 역대 영부인 가운데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육 여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시절 장녀였던 박근혜 의원이 어머니를 대신하여 22살의 나이로 영부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홍 기 여사 제10대 최규하 대통령 부인 홍기 여사는 한일병합 6년 후인 1916년에 충북 충주에서 한학자 홍병순씨와 안동 권씨 사이에서 3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성균관 박사인 최규하의 할아버지 최재민씨와 교류하던 한학자인 홍기 할아버지가 중매하여 19살 되던 1935년에 연하의 최규하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홍기 여사에게 영부인으로서의 8개월은 가혹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박정희 대통령 피살, 대통령 권한대행, 12·12사태, 최규하 대통령 취임과 사임까지 숨 가쁘게 달려가는 국가 혼란 시기에 최고 통치자의 아내로서 말 못할 심적 고통을 겪었고, 그 응어리가 마음 속 깊이 남은 것 같다. 홍 부인의 생활은 현모양처와 여필종부란 말로 표현되는 전통적인 한국 여인의 부덕(婦德)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평이 적절하다. 이순자 여사 제11대, 12대 전두환 대통령 부인 이순자 여사는 고등학교 졸업 후 이화여대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이 여사는 의사가 되려고 했던 자신의 꿈도 포기하고 대학을 자퇴한 후 전 전 대통령과 결혼했다. 결혼을 하면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을 염려한 전 전 대통령이 이별을 통보한 것 때문에 오히려 결혼을 서두른 것이다. 영부인이 된 이후 이 여사는 화려한 한복 의상으로, 국민의 정서와는 다소 대치되는 유별난 영부인으로 인식된다. 이 여사는 70년대 전 전 대통령이 연대장 시절 악착같이 집과 땅을 팔고 샀으며 후에 부동산 투기설 등에 휘말리며 ‘빨간바지 복부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새세대 육영회’, ‘새세대 심장재단’ 등 활발한 대외활동을 펼쳤으나,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김옥숙 여사 제13대 노태우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는 대선 때의 잠행 스타일을 5년 내내 유지했다. 그녀는 재임 중 모든 행사를 비밀에 부쳤고, 일절 대중매체에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 여성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석하지 않았고, 모임에서의 발언도 극구 삼갔다. 20여 년간 소년소녀가장 10가구와 결연관계를 맺고 남몰래 인간적 금전적 도움을 줬다는 사실이 퇴임 직전에 밝혀졌을 뿐이다. 보좌진의 주요 미션이 ‘영부인의 활동이 언론에 보도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 여사는 영향력 행사 면에서는 역대 어느 영부인 못지않은 파워를 구사했던 것으로 뒤늦게 알려지고 있다. 김 여사는 수천억 원대에 달하는 노태우 비자금 사건만 아니었으면 비교적 좋은 이미지의 영부인으로 남았을 것이다. 손명순 여사 제14대 김영삼 대통령 부인 손명순 여사는 40여년 야당 정치인 아내 생활을 끝내고 65살 때인 93년 2월25일, 대통령 영부인이 되었다. 영부인이 된 후 적극적 역할이 기대되었으나 손 여사는 의례적이고 공식적 역할만 수행했다. 측근들에 따르면 손 여사는 YS 대권가도의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손 여사는 YS가 신한국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후에는 사당동에 별도 사무실을 차리고 선거운동에 나섰다. 손 여사의 사람관리 비결은 ‘끊임없는 스킨십’으로 알려졌다. 92년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 때 민정계 인사 집을 찾아다녔는데, 당시 손 여사의 방문을 받았던 청와대 수석 출신 모 민정계 의원은 “손 여사가 직접 집으로 찾아와 지지를 부탁하는 바람에 마음이 YS로 기울었다”고 고백했을 정도다. 이희호 여사 97년 12월 DJ는 4수 끝에 드디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여사의 나이 75살 때다. 여성·사회 운동가였던 이 여사가 퍼스트레이디가 되자 행정부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여성가족부의 모태가 되는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가 출범했고, 장관들 임명장 수여식 때는 부부가 동반해서 임명장을 받는 새로운 관행이 생겨났다. 남편에 대한 기나긴 옥바라지와 내조로 일생을 보냈고, 대통령의 아내이기 전에 민주화투쟁의 동지이며, 대통령의 가장 엄격한 비판자,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이희호 여사는 노령의 나이에도 역대 영부인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소외된 계층의 복지와 정책감시 등에 적극적 역할을 했으나 정책적 역할 수행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권양숙 여사 퇴임 후 고향 봉화마을에서 생활하고 있어 더 큰 화제가 된 노무현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 경상남도 김해시 대창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 있는 혜화여자중학교, 계성여자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영부인 최초 고졸이라는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정치에 소극적이라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여성의 자아실현과 유아보육 및 교육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방침 아래 참여형 영부인으로 기억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