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사정칼날 정치권 정조준 “나오는 대로 다, 갈 데까지 가겠다”
참으로 부끄러운 노릇이다. 박연차 리스트에 떨고있는 정치권 핵심인사가 도대체 얼마나 더 된다는 말인가. 이 검은 돈의 유혹에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민정수석도 넘어갔고,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도 걸려들었다. 박 회장 돈을 받은 혐의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었던 이광재 민주당 의원이 구속된 데 이어 한나라당의 대권 기대주로 꼽히던 박진 의원도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국민들은 그토록 도덕성을 강조했던 참여정부 인사들의 부패에 큰 충격을 받았다. 젊고 도덕적인 그들에게 국민들은 얼마나 열광했었나. 그런 믿음과 신뢰를 깨고, 순하디 순한 웃음으로 국민들의 뒤통수를 때린 셈이다. 그 뿐 아니다. 깨끗한 정치를 다짐했던 이명박 정부 인사들도 딱히 다를 바 없다. 또한 박 회장에게서 돈봉투를 받았다는 검찰·경찰 간부들이 밝혀지면 공권력에 대한 신뢰는 또한번 추락할 것이다. 박연차 리스트의 전모가 드러나면 한국 사회의 권력층의 신뢰는 최악의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까지 됐어야 했나. 특별한 기대도 없었지만 국민들은 그저 부패한 정권에 망연자실할 뿐이다.
박연차 자물통 열려… 전현직 정치인 등 줄소환
이번 사건을 주무르는 첫 번째 핵심 인물은 당연히 박연차 회장이다. 수사 초기 법조계 안팎에서는 그의 입이 ‘자물통’이라는 점 때문에 검찰 수사가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많았다. 게다가 박 회장은 로비 수단으로 항상 현금을 사용했기 때문에 본인의 진술이 없으면 확인되는 바가 없어 수사가 난항을 겪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박 회장은 지난해 말 세종증권ㆍ휴켐스 비리 사건이 불거지며 구속 기소됐을 때 탈세 사실에 대해서는 시인했지만 로비 의혹에 대해서는 완강하게 부인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검찰이 세 딸을 출국금지하고 회사를 경영하는 맏딸을 소환조사하며 공익근무를 하는 외아들까지 수사 선상에 올려놓자 박 회장은 그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잠겼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연루된 정치권 인사가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검찰에 따르면 박 회장은 로비 사실을 먼저 털어놓지는 않지만 현금 뭉치가 빠져나간 흔적 등 증거 자료를 들이밀면 당시 상황을 세밀하게 기억하며 사실 관계를 상세하게 설명한다는 것이다. 또한 돈을 받은 쪽이 혐의를 부인해 대질조사를 하면 박 회장은 금품을 건넨 시점이나 경위 등에 대해 매우 또렷하게 기억해내며 명확하게 진술한다고 했다. 박 회장이 이처럼 검찰 수사에 적극적인 것을 두고 검찰 안팎에선 검찰 수사와 재판 이후 다시 기업인으로 일어서겠다는 의지 때문이라고 한다. 노무현 정부 실세들과의 후원 관계가 정치적 지향에 동조해서라기보다는 안정적인 기업 활동을 위한 ‘투자적’성격이었기 때문에 이번 수사에서도 철저하게 회사를 지키기 위해선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관점에서 입을 열고 있다는 해석이 짙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박 회장은 이번 수사에서도 기업인으로서의 생존 욕구에 따라 움직인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3월26일 이광재 의원을 구속한 중수부는 한나라당 박진, 민주당 서갑원 등 의원 3명을 이달 안에 조사한 뒤 형사처벌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부 의원에 대해서는 이 의원처럼 조사 후 곧장 구속영장을 청구할 가능성이 있다. 검찰은 돈을 준 박 회장의 진술이 일관되고 구체적이어서 혐의를 입증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자신했다.
검찰 4월 임시국회 전 추가소환 예정
검찰은 4월 임시국회 개회를 앞둔 3월 말께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정치인 2∼3명을 추가로 소환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부산과 경남 출신 의원들만 겨냥했던 것으로 보였던 검찰의 사정 칼날이 어느 방향을 향할지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박진 한나라당 의원이 검찰에 소환되자 여야 의원들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특히 박 진 의원에 이어 어떤 의원들이 검찰 소환대상에 오를지에 대해 촉각을 세우는 분위기다. 민주당도 이광재 의원이 구속되고 서갑원 의원이 출석을 요구받는 등 수사가 전방위적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면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일단 검찰은 한나라당 의원을 소환할 것으로 알려졌지만, 결국은 민주당을 겨냥한 작전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민주당 관계자는 “여당 인사는 구색맞추기 차원에서 살살 수사한 뒤 전격적으로 야당 인사를 불러 구속수사 방침을 천명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한편 여야는 4월1일로 예정된 4월 임시국회 개회를 위해 이날부터 본격적인 의사일정 협의에 착수했다. 많은 국회의원들이 참으로 오랜만에 회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임시국회가 시작되면 현역의원들은 국회의 동의없이는 체포되거나 구금되지 않는 혜택을 얻기 때문이다.
박진·서갑원 의원 줄줄이 소환, 검찰 성역없는 수사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나라당 박진 의원이 박 회장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소환돼 약 16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다. 검찰에 따르면 박 의원은 박 회장과의 인연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금품을 전달 받은 사실에 대해서는 강하게 부인했다. 검찰은 이 때문에 두 사람을 대질심문했지만 박 회장은 금품을 전달했다고 시인하는 반면 박 의원이 받지 않았다고 거듭 부인했다. 검찰은 박 의원이 작년 3월경 박 회장이 개최한 행사에서 특강을 하고 수천만 원에 달하는 돈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은 일단 박 의원에 대한 재소환 없이 구속영장 여부를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박연차 리스트’에 거론되지 않았던 박 의원이 소환되자 정치권은 또 다시 충격에 빠졌다. 박 의원의 경우 박 회장의 연고지인 부산·경남지역과도 별 연관이 없기 때문. 비교적 깨끗한 이미지를 고수해 온 박 의원마저 소환되면서 일각에서는 ‘박연차 리스트’가 어느 정도 규모와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지 예상조차 할 수 없다며 한숨을 내쉬고 있다. 도대체 그 끝은 어디인지… 검찰은 현재 민주당 서갑원 의원에 거듭 소환통보를 보냈고, 의혹이 있는 한나라당, 민주당 내 의원 여러 명에 대해서도 소환 조사할 예정이다. 검찰은 세간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표적수사’ 의혹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현 정권과 지난 정권의 주요 인사를 소환하는 데도 형평성을 두고 있는 모습이다.
이광재 의원 구속영장 발부, 정계 떠날 뜻 밝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오른팔인 이광재 의원이 지난 3월26일 밤 10시40분 구속영장을 발부받았다.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그는 지난 5년 여 동안 검찰 수사선상에 10여 차례 이름을 올리고 2번 특검을 받았지만 대부분 무혐의 처리로 처벌을 벗어났다. 하지만 박연차 회장의 정치자금이 결국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이 의원은 이에 앞서 이날 오후 정계를 떠날 뜻을 밝혔다. 26일 정치권과 법조계에 따르면 이 의원은 이날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서 의원직을 사퇴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 의원은 “재판 결과든, 실체적 진실이든,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이 의원직을 사퇴하겠다. 새 인생을 위해 정치를 떠날 것이고 인생을 걸고 정치를 버리겠다”며 정계 은퇴 뜻을 거듭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불어 그는 “박 회장 딸을 비서관으로 데리고 있어 사람들은 내가 박 회장과 친하고 돈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 말을 믿지 않으려 하는 것 같은데, 오히려 이런 점 때문에 더욱 조심을 했고 박 회장과 가까이하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면 박 회장이 수사대상이 될 것이 뻔한데 그런 모험을 하겠느냐”며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민주당 지도부는 이 의원의 사퇴를 적극 만류하기로 했다.
검찰·경찰 간부 연루설, 초긴장 상태
강희락 경찰청장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금품로비를 받은 게 아니냐는 일각의 의혹 제기에 대해 “박 회장과는 일면식도 없다”고 강력 부인했다. 강 청장은 지난 3월26일 해명자료를 통해 “노건평씨 딸의 결혼식장에 가서 박정규, 전해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만났지만 박 회장은 얼굴도 보지 못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박 회장은 항공기 만취 사건 때 TV에서만 봤을 뿐 개인적으로 만난 사실이 없다”며 “과거 ‘박 회장이 경남지방청에는 신경을 썼지만 부산청은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소리는 들었다. 이번 사건에 나의 이름이 거론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일축했다. 현재 법조계에선 경남지역에서 근무한 경찰 고위 간부들도 박 회장에게서 거액의 돈을 받았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지난 2006년 2월부터 11월까지 부산경찰청장을 지낸 강 청장도 연루된 게 아니냐는 관측이 일각에서 제기됐던 것이다.
추부길, 장인태, 박정규, 이정욱, 송은복…
신정권의 실세였던 추부길 전 청와대 홍보비서관도 박 회장의 검은 돈을 받은 혐의로 체포됐다. 추 전 비서관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시절 비서실 정책기획팀장과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실 홍보기획비서관을 거쳤다. 또 지난 대선과정에서 이 대통령의 캠프 ‘대운하추진본부’ 부본부장을 역임하는 등 ‘대운하 전도사’로도 유명하다. 그는 지난 촛불파동이 한창이던 지난해 6월 배후세력설과 함께 촛불집회 참가자를 ‘사탄의 무리’라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자 사퇴했다. 현재 추 전 비서관은 지난 2월 보수성향의 인터넷 신문인 ‘아우어뉴스’를 창간해 언론사주로도 활동 중이다. 또한 검찰은 3월25일 장인태 전 행정자치부 제2차관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수뢰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구속수감했다. 장 전 차관의 혐의는 2006년 경남도지사 보궐선거에 출마하면서 박 회장한테서 두 차례에 걸쳐 8억 원을 건네받았다는 것. 박 전 수석은 2004년 12월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박 회장과 그의 사돈인 김정복 당시 중부지방국세청장을 만나, 박 회장한테서 ‘김 전 청장의 국세청장 임명 인사검증을 잘 해달라. 또 민정수석실의 관리를 받는 내게도 편의를 봐달라’는 청탁과 함께 1억 원 상당의 백화점상품권 다발을 건네받았다고 밝혔다. 이정욱 전 한국해양수산개발원장과 송은복 전 김해시장도 금품수수 정황이 확인돼 구속수감 중이다.
노 전 대통령, 노건평씨 수사 이어지나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문제가 결국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확대될 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여당 인사들은 연일 노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수사가 확대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차기 원내대표 출마설이 돌고 있는 한나라당 안상수 의원은 지난 25일 평화방송 라디오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무현 전 대통령도 법 앞에 평등이라는 기본 민주주의 이념에서 벗어날 수 없다”며 “지금 언론보도를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에 제공됐다는 돈이 수십억 원이라는 의혹이 있다. 그것이 사실인지 여부에 대해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고, 의혹이 범죄가 된다면 전직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당의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공격은 계속 이어졌다. 공성진 최고위원이 언론사 인터뷰를 통해 “지금까지 성역 없는 수사를 하겠다는 것이 검찰의 의지이고 역대 정권을 보더라도 전직 대통령이 부패와 연루됐을 경우 어떤 형태로든지 조사를 받았다. 노 전 대통령도 예외일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공 최고위원은 “특히 형인 노건평씨의 전방위적인 선거개입 의혹이 밝혀졌으므로 아마 국민적 의혹을 해소한다는 차원에서도 제대로된 수사가 이뤄지리라고 본다”고 말했다. 전·현직 정치인을 비롯한 고위 공무원의 씨를 말려야 끝날 것인지, 검은 돈의 고리가 노 전 대통령에게까지 가야 끊어질 지. ‘성역없는 수사를 하겠다’는 검찰의 의지를 기회로 고질적인 댓가성 뇌물의 뿌리를 뽑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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