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부여 등 한국고대사 논쟁…백제왕실의 ‘가공된 부여출자설’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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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부여 등 한국고대사 논쟁…백제왕실의 ‘가공된 부여출자설’에 대한 단상
  • 임지훈 기자
  • 승인 2020.12.23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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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유정희

[시사매거진] 다음 글은 대중에게 <레지 사료>, ‘고조선 논쟁’으로 잘 알려진 역사학자 유정희(남, 39, 『러시아 역사학자 유 엠 부틴의 고조선 연구』, 『그레이스 켈리와 유럽 모나코 왕국 이야기』, 『하왕조, 신화의 장막을 걷고 역사의 무대로』, 『18세기 프랑스 지식인이 쓴 고조선, 고구려의 역사』, 『드래곤볼, 일본 제국주의를 말하다』 등 저/해제) 선생이 작성한 기고문이다.

2020년 10월 16일 학회가 하나 있었다. 코로나 대응에 발마추어 사람들이 직접 모여 진행하는 학회는 아니었고, 대신 유투브 등으로 생중계하는 학회였다. 기조발언으로 하버드대 박사 출신인 마크 E. 바잉턴(Mark E. Byington)이 먼저 학회의 포문을 열었다. 거기보면 바잉턴이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였는데, 일부만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앞의 〔 〕부분은 그가 아래 내용을 언급한 시간대(분/초)이고, 필자(유정희)의 영문 한글번역 밑의 : 부터의 글은 필자의 이에 대한 단상이다.

〔37:30〕 The study of Buyeo’s supposed connections with the peninsula polities were necessarily based on sparse references in written records, some of which are grounded in myth, or are otherwise unreliable as historical evidence.

부여와 한반도 정치체들과의 가정적 연관성에 대한 연구는 문헌자료에 드러나는 일말의 흔적을 통해서 살펴볼 수밖에 없다. 헌데 이들 흔적들 중 일부는 신화에 근거하고 있거나 역사적 증거로서 활용되기에는 그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

〔42:47〕 Although it is possible for a breakaway group from one state to assert control over a non-state population to form a new state-level polity, it is unlikely that such a scenario played out three times in succession in nearly identical form in the Korea-Manchuria region. It is much more likely that this scenario represents a mythic architype that was broadly shared by people in that region as something necessary to the legitimation of a certain type of social structure. It is very possible that there is no historical basis for such claims.

한 국가로부터 떨어져 나온 집단이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다른 집단을 지배하여 국가수준의 정치체를 만들려고 했을 수는 있지만, 이런 시나리오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걸쳐 거의 동일한 형태로 세 번이나 작동했을 가능성은 아주 낮다. 차라리 이 시나리오가 이들 지역에 자리한 주민들에게 광범위하게 공유되어 특정한 사회구조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꼭 필요한 신화적 전형을 대표하는 것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러한 주장 <백제지배층이 부여 왕족계열이라는 것>은 역사적인 근거가 없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 중국 고대 주(周)나라, 곧 서주(西周) 시기를 한번 생각해보면, 많은 희성(姬姓) 집단들이 주 천자(天子)의 수도인 호경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지역에까지 진출해 제후(諸侯) 국가(state)를 이루는 경우는 무수히 많았다. 이들 모두는 주 천자와 동성(同姓), 혹은 그 자손, 일가라는 연대의식이 있었다. 주나라, 곧 서주의 건국을 기원전 11세기경으로 잡는다면, 이 시기는 백제 건국 시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른 시기이다. 또한 그 배경 지역이 백제의 주 무대인 한반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중국이다. 하물며 백제보다 훨씬 오래전인 주나라, 또한 한반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중국이 이런 상황인데, 아주 확실한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고고학 증거의 부재)만으로 사료의 기록을 부인하는 주장은 다소 섣부른 그 무엇으로 보인다. 또한 고구려나 백제 건국 과정이 비슷한 것은 고대 초기국가 성립에 으레 나타나는 현상이다. 교통이 극도로 발달하지 못한 고대사회에서 좀 더 세련된, 정교한 무기 등을 소지한 집단이 아직 문명화가 미치지 않은 미개한 지역을 개척하며 작은 나라를 세우는 것은 전세계 어디나 비슷한 현상이고, 건국과정시 맞닥뜨리게 되는 유사한 환경과 그에 따른 비슷한 신화가 으레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가령 중국 주왕조 같은 경우 주(周)는 노(魯)를 분봉하였고, 노(魯)는 이를 바탕으로 자신이 분봉된 그 주변지역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우리 역사에서는 오래된 전통의 북방강국 ‘부여’라는 국가가 있고 그 주변 지역을 부여의 일파들이 개척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예는 사실 고구려, 백제는 훗날 크게 성장해서 후세 기록에 잘 남은 것이고, 사실 기록에 남지 못한 다른 이름 없는 무수히 많은 나라의 예도 많았을 것이다.

〔45:40〕 Given this variation and the clear fact that the form of the myth was simply adapted from that of Buyeo, the mythic account should not be considered as historically reliable. It is also telling that all of the surviving versions of the foundation myth can be reliably dated to no earlier than the early fifth century, by which time Buyeo no longer existed as an independent state, but was instead a dependency of Goguryeo. This suggests the possibility that Goguryeo’s claim to being a successor to Bueyoe was created only after Buyeo became a dependency of Goguryeo. And the political implications of this were obvious.

이러한 <고구려 건국신화>의 다채로운 버전이 존재한다는 것과 이러한 형태의 신화가 간단하게 말해 부여의 것으로부터 수정되어 이용되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보았을 때, <고구려 건국신화>라는 신화적 기록을 역사적으로 믿을 만한 사실로 간주해서는 곤란하다. 또한 이런 점이 알려주는 것은 현재까지 전승되는 다양한 버전의 고구려 건국신화들의 기원이 서기 5세기 초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기 5세기라 함은 부여가 더 이상 독립된 국가로 존속되지 못하고, 고구려의 부용국이 되었던 시기이다. 이는 고구려가 부여의 후예라는 주장이 부여가 고구려의 부용국이 된 이후에서나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것이 지닌 정치적 의도는 아주 명백했다.

: 먼저 신화와 역사는 별개가 아니다. 극적인 역사는 신화가 된다. 가령 수년전 영화 포스트에서 ‘안시성, 신화가 된 역사’라는 표어를 본적이 있다. 그렇다. 너무나 극적인 사건, 사실 등은 후세를 거치면서 무조건 살이 붙기 마련이다. 미화의 과정을 거쳐 ‘신화’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부여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부여출자설(夫餘出自說)’이 부정되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중요한 것은 바잉턴은 이러한 고구려의 부여출자설이 서기 5세기 초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고 언급했는데, 곧 쉽게 말해 부여가 완전히 힘을 잃은 뒤 고구려가 이를 흡수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갑자기 자신들의 나라보다 훨씬 오래 존속한 얼마 전까지 존재한 부여의 역사를 흡수한다고, 또한 고구려 위정자들이 강제할지언정 밑으로 귀족, 관료, 더 나아가 일반 피지배층에게까지 납득할 수 있는 합리성을 주지 못한다. 실제 바잉턴 말이 맞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것이 귀족, 일반 백성에게까지 무리없이 흡수되려면 확실히 고구려가 부여와 근본부터 강한 혈연 개연성이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귀족은 물론, 일반 피지배 백성들에게까지 납득은 물론 반발만 사고, 자칫 국가 정통성에 해가 될 수 있는 위험성도 수반하고 있다.

Finally, it is necessary to point out that by the late fourth century, Baekje rulers claimed this surname Buyeo. And this is notably after the independent state of Buyeo ceased to exist. And the claim to the surname does not necessarily indicate the descent from Buyeo forebearers, since a surname could be adopted for other reasons. It is possible that refugees from Buyeo somehow settled in the region of southern Hwang He or northern Gyungkki and established a new state. Since Baekje was the name of one of the many small polities of Mahan in the 3rd century, we could assume that the refugees had settled there, and that the state grew out of that minor polity. If the migration scenario is correct, I would most likely have occurred between the late 2nd and early 4th centuries. But archeological evidence for this is very scant. It is entirely possible that Baekje leaders had every reason to create a completely fictional narrative of derivation from Buyeo, since doing so would give them a kind of political legitimacy that would have been recognized broadly across northeast Asia.

마지막으로 서기 4세기 후반에 이르러 백제 지배층이 ‘부여’라는 성(姓)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점에 대해 다룰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백제 지배층의 행동은 명확하게 부여가 독립된 국가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다음에 일어난 일이다. 또한 ‘부여’라는 성을 사용한 것이 자신들이 부여선조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이라는 것은 다른 이유로도 차용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여 유민들이 알 수 없는 어떤 방식으로 황해 남부나 경기북부에 정착하고 새로운 국가를 만들었을 수는 있다. 백제라는 이름은 서기 3세기경 마한의 여러 소규모 정치체들 중 하나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부여 유민들이 그곳에 정착하고, 자신들이 정착한 곳의 소규모 정치체를 바탕으로 국가로 성장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만약 이러한 이주민 신화가 사실이라면 필자는 이것이 서기 2세기 후반에서 4세기 초에 일어난 일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는 아주 희박하다. 백제의 지도자들이 철저하게 ‘가공된 부여출자설(fictional narrative of derivation from Buyeo)’을 만들었어야 하는 이유는 차고도 넘쳤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이러한 출자설을 만드는 것이 백제의 지도자들에게 동북아시아에 광범위하게 인정받았을 터인 어떤 그런 정치적 정당성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 일단 고고학 증거가 없으면 무조건 믿기 힘들다는 주장은 역사학의 입장에서 봤을 때 다소 성급한 주장이다. 고고학은 물론 사료의 기록을 확인시켜 주는 하나의 좋은 보조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반전(反轉)을 이루는 그 무엇일 수도 있다. 바잉턴의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낸 『The Ancient State of Puyo in Northeast Asia』를 보면 바잉턴은 주로 고고학-중국사료-한국사료 순으로 그 가치의 신빙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 역사학, 그 중에서도 사료가 극도로 부족한 한국고대사의 고조선부터 삼국시대까지의 부분은 모두 역사학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존립의 위기에 빠지게 된다. 역사는 사료의 학문이다. 사료 비판을 할 수도 있고, 사료 내용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고고학을 그 보조로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고학 유적이 없으면 못 믿겠다는 주장은 역사학에서 한국고대사의 존립 자체를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다. 또한 앞서 말했지만, 백제나 고구려나 왕실을 중심으로 ‘부여출자설’을 주장한다고 하여도 개연성이 없다면 애초 그 주장이 귀족은 물론, 피지배층에게도 잘 먹히지 않는다. 필자는 다른 책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확실한 위서(僞書: 가령 『환단고기』, 『단기고사』 등)가 아닌, 가치 있는 사료는 함부로 부인해서는 안 된다. 가령 사마천의 『사기(史記)』 등에 보면 진(秦)나라 상앙(商鞅)이 자신이 만든 법에 걸려 도망가다 잡혀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죽었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상앙 자신이, 자신이 만든 법에 걸려 죽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실이 아무 무리없이 오랫동안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그 당시 모든 이들이 납득할 만한 정황상 그게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물론 사실(fact) 부분에 있어 이의가 있는 사료 부분도 당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강한 반론이 오랫동안 분명히 함께 공존할 가능성이 높다. 일례로 한때 한국과 일본의 많은 몰상식한 사람들을 매료시킨 사이비 심리학인 ‘혈액형성격설’은 한때 상당수의 몰지각한 사람들이 신뢰를 보냈지만, 이미 백여년전 혈액형 성격설, 우생학 등이 나왔을 때부터 그 반론이 항상 함께 공존하여 왔었다. 그래서 식자층이나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이를 되도록 멀리했다.

다시 돌아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지금과는 다르게 기록을 남기기가 상당히 힘들었던 전근대, 그것도 고대, 중세에는 당대 사회적으로 확실히 통용된 사건이나 사실만 글로 남기기 마련인데, 큰 그림에서 틀릴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 사실이다. 설령 사료에 실제 사건, 사실 등과 다른, 틀린 사실(fact)이 있다고 하더라도 강한 반론이 함께 오랫동안 남겨져 내려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부여 왕실 후손들이 많이 살아있던 당대에 굳이 고구려 등이 이를 훔쳤을 가능성은 전무하고, 중국, 신라 등 다른 국가에서 이에 대해 반론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으로 봐서 과연 고구려, 백제가 무리해 가며 ‘가공된 부여출자설’을 만들어냈을지는 의문이다.

마지막으로 고고학 증거가 없다고 해서 사료를 부인하는 것은 다소 성급한 발상이다. 그런 식으로 추론하자면, 사실 부여란 나라는 역사적, 고고학적으로 그 실재성(實在性) 자체가 의문이 드는 존재이다. 쉽게 말해, 지금까지 발굴된 결과, 부여 당대인이 남긴 기록이 지금 얼마나 남아 있나? 상(商)나라는 그 실재를 의심받아 오다가 당대 기록인 갑골문의 발굴로 그 실재를 비로소 인정받게 되었다. 그 이전 하(夏)나라는 당대 하인(夏人)의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많은 학자들이 그 실재성을 의심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사기』 「주본기」 기록의 하(夏)가 도읍하였다는 낙수와 이수 사이의 그곳에, 위치가 맞아 떨어지는 국가(state) 단계의 3500여년이나 된 이리두 유지와 또한 후세 수많은 2차 사료 기록이 있음으로 인해 상당수의 학자들이 그 실재를 인정하고 있다. 이를 우리 고대사 부분, 곧 바잉턴과 부여의 예로 다시 돌아가서 살펴보면, 고고학 증거의 부재로 사료를 믿지 못하겠다는 주장은 사실 ‘부여사 연구’라는 역사적 연구의 당위성을 전면 부인할 수도 있는 위험성이 내포된 그 무엇으로 보인다. 이는 필자가 한국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한명의 ‘사료’를 중시하는 역사학도로서 평소 생각하는 지론(持論)이다.

 

임지훈 기자 cjs12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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