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우의 시선] 참 기자 리영희(李泳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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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우의 시선] 참 기자 리영희(李泳禧)
  • 이동우 전북논설실장
  • 승인 2020.12.2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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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同雨 전북본부 논설실장/정치학박사
李同雨 전북본부 논설실장/정치학박사

“Simple Life, High Thinking”. ‘생활은 소박하게, 생각은 고결하게’로 해석되는 이 말은 19C 초, 낭만주의 영국 계관시인 ‘워즈워드’(W. Wordsworth)의 일생 좌우명으로 알려진다.

한국에서는 리영희(1929.12.2~2010.12.5)선생이 즐겨 사용했다. 리 선생은 고향이 북한(평북 운산)이어서 두음법칙을 무시하고 ‘이’씨를 ‘리’라는 성을 그대로 썼고 또 ‘이영희’라는 이름이 너무 많아서 독자적인 자신만의 이름을 갖고자 ‘리영희’를 고집했다고 한다.

그는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한국청년들 ‘의식화의 원흉’으로 매도되었지만, 그가 타계하자, 프랑스 신문 ‘르몽드’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메트르 드 팡세’(사상의 은사)라고 칭송했다.

필자는 대학시절 당시 금서(禁書)였던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그리고 백기완 선생의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등을 읽고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던 충격을 받았다.

1929년 태어난 리 선생은 월남하여 경성공립공업학교(현 서울공고), 국립 한국해양대를 졸업했다. 고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나자 통역장교 자원입대해 7년을 복무한 후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다.

1957년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입사한 리 선생은 1964년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 검토 중’이라는 특종기사를 써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는 것을 시작으로 베트남전쟁 파병에 비판적인 태도를 고수하다 1969년 ‘조선일보’에서 해고됐고, 1971년에는 군부독재·학원탄압에 반대하며 ‘64인 지식인 선언’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합동통신’에서 또 해직됐다. 1972년 한양대 신방과 교수로 임용된 후에도 1976년과 1980년에 각각 두 차례 해직을 당한다.

리 선생은 저서인 ‘전환시대의 논리’(1974)를 출간하면서부터 한국사회에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1977년 중국연구 성과를 담은 ‘8억 인과의 대화’는 출간 2달 만에 판매금지 조처가 내려졌고, 바로 이어 ‘우상과 이성’이 출간됐다.

이외에도 ‘분단을 넘어서’, ‘역정’, ‘자유인’, ‘대화’ 등을 저술했다. 주한외국인협회 자유언론상, 늦봄통일상, 심산상·제1회 기자의 혼상, 후광 김대중 학술상 등을 수상했고, 2010년 12월 5일 오랜 옥고로 얻은 지병으로 타계하였다. 그의 유해는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오늘, 리영희 선생을 생각함은 ‘지식은 마땅히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동서고금을 가릴 것 없이 지식인은 별로 실천하지 않았다. 특히 살벌하고 냉혹한 독재시대에는 실천하는 지식인이 아주 드물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리영희 선생의 존재는 각별하다.

국내 최대 언론사 기자였고 대학교수였지만 목숨을 걸고 독재를 비판했고 정론을 펼쳤다. 박정희시대에는 언론과 지식인에게 금기(禁忌)가 많았다. 그러나 리 선생은 박정희 독재의 금기를 깨뜨리는 데 앞장섰다. 지금도 ‘종북’ 낙인이 두려워 북한의 좋은 점을 언급하기 꺼리는데, 1970년대에 이미 북한과 중국을 통해 얻은 사회주의의 긍정적인 측면을 알린 선각자였다.

그는 미국이 주도한 베트남전쟁의 부도덕성을 전 세계에 고발했고 한국참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어느 것 하나 함부로 언급할 수없는 민감한 사안이었지만, 광야에서 홀로 외치는 선지자처럼 용기 있게 자신의 소신을 피력했다.

“새도 좌우의 날개로 날듯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새로운 사회가 시작되는 것이다. 의식이 없는 지식은 무의미한 것이다. 양 극단(極端)은 결국 동일한 모순에 다다르게 된다. 지식인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용감하게 도전해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 등등

그가 남긴 주옥같은 어록은 셀 수 없이 많다. 특히 기자로서 리영희 선생의 사명감은 오늘날 모든 언론인의 귀감이다. 평소 “내가 기자로서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가치는 민족도 국가도 아닌 바로 진실이었다”고 역설했다.

지난 12월 5일은 리영희 선생의 타계 10주년이었다. 통일과 민주주의, 인권을 주장하면 빨갱이로 매도되었던 시절, 글로써 진실과 정의를 알렸던 실천하는 지성 리영희 선생. 그는 양심이 있고 양식을 가진 모든 젊은이들에게 행동하는 지식인의 영원한 귀감이자 스승이다.

시사매거진 전북본부 논설실장 정치학박사 李 同 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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