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오 전 최고위원 ‘3월 귀국설’, 왕의 남자로 돌아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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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오 전 최고위원 ‘3월 귀국설’, 왕의 남자로 돌아오나
  • 신현희 기자
  • 승인 2009.02.09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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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2기 프로젝트 성공으로 이끌 대안 될 것인가

본회의장 사수 및 ‘MB악법 저지’라는 전략적 대국민 홍보전으로 민주당이 야당의 존재가치를 입증하며 자체적인 승전보를 울렸다. 이에 반해 172석 거대 한나라당은 팔이 안으로 굽을 거라는 김형오 국회의장에 대한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면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 한나라당은 패전의 책임소재를 놓고 내홍에 휩싸여 있는데...
한나라당 차명진 대변인은 여야 최종합의 다음날인 지난 1월 7일 대변인 사퇴 성명을 통해 “지도부는 무릎을 꿇었다. 불법을 향해 타협의 손을 내밀고, 소수폭력의 결재가 있어야만 법안을 통과하겠다는 항복문서에 서명했다”며 울분을 참지 못했다. 몇 시간 후 친이재오 성향의 57명 의원으로 구성된 당 내 최대모임인 ‘함께 내일로’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원내 지도부의 각성과 대국민 사과를 요구했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친이재오 성향이라, 이 전 최고위원의 귀국을 앞두고 ‘힘 실어주기’가 아니냐는 일각의 곱지못한 시선이 있다.

 

약골 한나라당의 해결사로 돌아올지
한나라당 이재오 전 최고위원의 거취가 여권의 새로운 뇌관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 전 최고위원의 ‘3월 귀국설’는 이미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때마침 한나라당 지도부는 법안전쟁 후폭풍에 흔들리고 있고, 친이재오계 의원들은 새로운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다. 이렇듯 ‘이재오 귀국’에 대한 폭발력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 그의 복귀가 거대 야당이지만 정국의 주도권을 잃고 끌려다녔던 약골 한나라당 지도부의 답답함을 해갈시켜 줄 대안이 될 것이라는 희망에 차 있다. 시국이 어려울 때마다, 정국이 막힐 때마다 해결사, 전략가의 면모를 보여준 그가 과연 이번에도 명쾌한 해답을 줄지에 정치권의 이목이 쏠려있다. 
실제로 그동안 여권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의 개혁 작업을 선봉에서 이끌어갈 포인트가드가 없다"는 탄식과 함께 끊임없이 그의 복귀 시기를 저울질해온 게 공공연한 사실이다.
한나라당 내부 사정도 마찬가지다. 현 지도부가 중대 사안마다 청와대와의 소통에서 한계를 드러냄에 따라, '복심'(腹心)인 이 전 최고위원만이 정국을 정면 돌파할 수 있다는 의견이 분분하다. 비록 그가 이 대통령의 야심찬 프로젝트였던 ‘대운하’의 멍에를 쓰고 떠났지만, 지금 이렇게라도 총대를 멜 사람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현 경제 위기 상황과 맞물려 "이명박 대통령의 '고심'을 해결해줄 사람은 역시 그밖에 없다"는 평가도 나온다. '권력 1인자'에게 충언을 할 수 있는 주변 인사는 여전히 이 전 최고위원뿐. 지난 3월 총선 직전 민심을 감안, 이른바 '55인 항명 파동'을 주도하며 대통령 친형의 공천 불출마를 촉구한 것도 바로 그다. 특히 역학구도상 차기 권력의 잣대가 될 전당대회가 다가오는 점을 감안하면, 박근혜 전 대표를 견제할 수 있는 '친이'의 구심점도 결국 그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이재오 전 최고위원은 지난 1월 17일 베이징 서우드 공항에서 한국 특파원들과 만나 봄이면 귀국하겠다고 했으니, 3월이면 돌아올 것을 밝힌 셈이다. 어쨌든 이 전 최고위원은 4월에 귀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5월에 비자 갱신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한 박자 쉰 이재오 정치인생, 어떤 구상 있을까
그가 미국 유학길에 오른 건 지난해 4월이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장면이 매스컴을 통해 소개되면서 이른바 ‘귀양살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되새기게 했다. 이 전 의원은 미국으로 간지 얼마되지 않아 자신의 홈페이지에 ‘워싱턴에 온 지 20일째입니다’라는 제목의 편지를 통해 자신의 근황을 소개했다. 그는 “정상에 오래 머무르고 싶었지만 하산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산을 타는 사람들은 정상에 오르면 산을 다 왔다고 하지만 사실 정상은 전체 등산일정에 반을 왔을 뿐 온만큼 다시 돌아가야 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정상에서부터 하산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인생도 고생을 해서 성공을 했거나 좀 살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치도 못한 어려움으로 다시 고난의 길로 접어드는 수가 있다며 등산도 인생도 하산을 잘 해야 한다”는 묘한 여운을 남겼다. 자신의 정치인생을 등산에 비유한 시기적절한 말이다.
워싱턴의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이 전 최고위원은 집과 대학을 오가며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평소 자전거 마니아로 소문난 그는 매일 1시간 10분 정도의 거리를 자전거로 오간다. 방학 중이라 강의는 없지만 달리 소일거리가 없는 그는 연구실에서 독서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측근의 말이다. 골프도 술도 못해 가끔 바둑과 장기를 두며 타국에서의 겨울을 보내고 있다. 유난히 추운 이 전 최고위원의 겨울이 그를 비상하게 만드는 재충전의 시간이 될지, 그의 가슴 속에는 어떤 구상이 있을지 뚜껑을 열어봐야 알 일이다.  

돌아온 이재오, 어떤 선택할 것인가
그의 복귀설이 기정사실화 되면서 정가에서는 재보권 선거 출마, 청와대 입각, 한나라당 당직, 조기 전당대회 출마 등 다양한 각본이 제시되고 있다.
친박 진영에서는 이재오 전 최고위원의 귀국을 두고 경계경보를 발령한 상태. 당내 화합도 이루지 못하면서 그를 끌어들인다는 것은 무능력 정치, 회피성의 전형이라며 비난했고,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 정두언 의원 측도 그의 귀국을 떨떠름하게 여기고 있는 입장. 이 전 최고위원의 성향을 볼 때 어떤 모습으로든 여권구도를 움직이는 입김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 친이계 의원들 사이에서도 3월에 귀국해도 딱히 할 일이 없다는 의견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로 ‘무게중심’이 쏠리는 것이 사실이다. 대통령과 말이 통하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돌아온 이재오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첫째, 친이명박파를 이끌고 독자노선을 지향하는 것이다. 대권 도전 가능성도 있다. 둘째, 정몽준 최고위원 또는 김문수 경기도 지사와 러닝메이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자신은 당권을 맡고 정몽준 또는 김문수를 내세워 대권주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셋째, 박근혜 및 친박 세력과 대타협을 이뤄 동반자 관계를 맺는 것도 방법이다.

 

원내사령탑 원내총무 이재오, 그는 무엇을 했나
 

2000년 사무부총장, 2001년 원내총무, 2002년 대북비밀송금진상조사위원, 김대업정치공작진상조사단장, 서울시직무인수위원장, 2003년 사무총장, 비상대책위원장, 2004년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 이재오의 16대 정치활동에는 눈코뜰 새가 없었다. 김대중 정권의 권력부패와 부정, 이를 이어받은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비리와 국정난맥상을 국민 앞에 낱낱이 밝히려고 노력했고 야당파괴와 정치공작에 단호하게 맞서 싸웠다. 당 내부적으로는 2003년 대표경선에 출마하여 시대변화에 맞는 한나라당의 변화를 요구하며, 지구당 폐지, 후원회 폐지, 정당조직의 봉사조직화, 시민운동조직화 등의 정당개혁을 추진하였다. 
2003년 한나라당 대표경선에 출마하여 정당조직의 봉사조직, 시민운동조직으로의 전환이 정당과 정치개혁의 핵심이라고 역설하던 이재오는 솔선수범하여 한나라당 은평구의 지구당조직을 순수봉사단체인 ‘함박웃음봉사단’ 16개 조직으로 개편하고 1당원 1봉사단에 가입하여 매월 1봉사단 1기관(사회복지기관 등) 봉사하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 지역을 위해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앞장서는 봉사조직이야말로 지역의 근간이요, 생활정치의 표본이다. 정치가 국민들의 삶 속에 친숙하게 자리잡고 국민들과 진정으로 함께 호흡할 때 비로소 한국 정치는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이재오의 정치철학이자 소신인 것이다.
이재오의 ‘자전거 지역관리’는 더욱 체계적이 되었다. 새벽 5시에 눈을 떠서 운동복 차림으로 자전거에 올라타는 이재오는 은평구를 A~G까지 7개 구역으로 나눠 월요일은 A구역, 화요일은 B구역... 일요일은 G구역에 나가는 식으로 지역구민들과 만난다. 이 의원의 자전거 순례는 올해로 15년을 맞는다. 그동안 자전거도 3대나 도둑맞았다. 이재오는 재선이 된 후에도 자전거 순례를 멈추지 않았다. 항간에는 ‘이사도라’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이재오는 15대에 이어 16대에서 3년연속 국감 최우수의원으로 선정되었다. 2001년 이후부터는 원내총무, 사무총장 등 당3역을 수행하며 평가에서 제외되었지만, 국감활동은 관례를 깨고 열성적으로 준비하여 매년 국정감사 자료집을 2~3권씩 발표하는 저력을 보였다. 여당의원들은 이재오의 충실한 자료준비와 현장감을 두고 교육위 최고의 위원으로 손꼽았다.
15대 국회에서 100여건이 넘는 법안을 발의해 입법활동 ‘베스트20’에 선정되었던 이재오는 16대 국회에서도 184건의 법안을 발의했다. 또 국회연구단체인 ‘민생정치연구회’활동으로 서민을 위한 입법활동에 주력했다. 영세상인, 운수업계의 생존권을 위해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을 개정하여 백화점, 대형할인점의 무료셔틀버스를 금지시켰고, ‘재래시장활성화법’을 제정해 낙후되는 재래시장의 현대화를 지원하였다.

■ 원내총무 이재오
직선원내총무 압도적당선
 2001년 5월 한나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이재오는 재선으로 119명중 75표를 얻어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그가 원내총무를 하는 동안 DJ부패정권의 독선과 전횡을 막아내면서 정국을 사실상 주도하였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의 세 아들과 권력 실세들이 유착된 부패사건들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이용호게이트 특검법안을 관철시킴으로써 부패권력을 심판하고 DJ의 두 아들을 사법처리하였다. 야당다운 야당의 진수를 보여주고, 이재오의 강력한 리더십과 투쟁력을 보여주었다. 또, 2001년 9월 3일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안도 결국 통과시켰다.

일하는 국회, 민생국회 만든 명총무
원내총무 재임기간 동안 과거의 거친 몸싸움이나 날치기 통과는 볼 수 없었다. 3년 동안 표류하던 개협입법인 ‘부패방지법’, ‘돈세탁방지법’ 등을 통과시켰으며 10년이 넘게 제정되지 못하고 있던 영세상인의 숙원법인 ‘상가임대차보호법’은 이재오 총무가 직접 대표발의하여 통과시켰다. 그리고 취임이후 변화에 둔감했던 국회에 작지만 눈에 띄는 변화를 이끌어 국회개혁에 앞장섰다. 단상의 총무좌석 단하이동, 5분전 회의장입장, 크로스보팅, 전자투표제 도입 등을 만들어갔다.

이명박서울시장직무인수위원장
2002년 5월 원내총무의 임기를 마치자마자 이재오는 곧바로 이명박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뛰어난 순발력과 조직력으로 선거전을 진두지휘하여 결국 한나라당후보를 서울시장에 당선시켰다. 그리고 바로 서울시장직무인수위원장을 맡아 13일간의 인수위활동을 통해 청계천복원사업, 강남북균형개발사업 등 공약이행 작업을 점검하고 이명박 시장이 시정을 차질없이 수행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이재오, 그는 누구인가
 

그는 원래 민중당 소속의 재야 출신이다. 민중당은 14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을 한명도 배출하지 못해 사라졌다. 이때 김영삼 전 대통령이 그를 신한국당으로 영입했다. 그는 15대 총선에서 서울지역 최다 득표율로 당선된 이후 이어 16대, 1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가 이 대통령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16대 총선 이후다.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을 때 선대본부장을 지냈다. 이런 인연을 기반으로 대선 경선의 전초전인 당 대표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의 좌장 자격으로 출마, 박근혜 전 대표의 지원을 받던 강재섭 전 의원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분패했다. 한나라당 내 친이-친박 구도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18대 총선 최대격전지인 서울 은평 을에서 한나라당의 실세이자 이명박 대통령의 2인자로 평가받은 이재오 의원이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에게 10%포인트 가까운 격차로 패배, 이후 ‘대운하’와 ‘공천학살’의 책임을 안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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