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매거진/전북] 생전의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 1812~1884)가 남긴 판소리 사설(辭說) 집(集)의 1906년경 새로운 필사본 ‘청계 본’이 발견돼 화제다. 110여 년 전 필사된 ‘청계본’은 당시 고창군 고수면 청계마을의 학정(鶴亭) 박정림(朴正林)이 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창 동리국악당 이만우 이사장은 15일, “지난 2일, 고창 고수면의 박종욱씨 집에서 동리 신재효 선생이 쓰신 사설집의 필사본이 완질로 발견된 바 있다”며 “동리국악당이 문중과 협의해 이 필사본의 온전한 보관을 위해 오는 18일 고창군에 공식적으로 위탁관리를 맡길 예정”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110여 년이 지난 필사본이 현재까지도 거의 완벽한 상태로 남아 우리 앞에 놓이게 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며 “문화유산을 소중하게 보관해온 박씨 문중에 각별한 고마움을 표한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동리는 기존의 판소리 열두 바탕 중 여섯 마당을 개작하여 우리에게 남겼다. 당시의 판소리 열두 마당 중에서 현재까지 창으로 전해지는 판소리는 모두 다섯 마당으로 「춘향가(春香歌)」 · 「흥보가(興甫歌)」 · 「심청가(沈淸歌)」 · 「수궁가(水宮歌, 토끼타령 또는 토별가)」 · 「적벽가(赤壁歌)」 등 전승되는 다섯 마당(五歌)다.
기존의 열두 마당 중에서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 일곱 마당 가운데 「배비장전(裴裨將傳)」 · 「가루지기타령」 · 「옹고집전(雍固執傳)」 · 「장끼전」 · 「무숙(武叔)이타령」 · 「왈짜타령」 등은 사설본(辭說本) 또는, 소설화된 축약본들로 그 일부가 남아 있으나, 「강능매화(江陵梅花)타령」 · 「가짜신선타령」 등은 이제 단편적인 문헌 기록을 통해서만 그러한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동리는 판소리 여섯 작품을 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단형 판소리인 「오섬가」와 「광대가」, 「치산가」, 「도리화가」 등의 작품을 직접 창작하여 판소리의 영역을 넓히는 노력을 하였을뿐만 아니라 개작한 여섯 작품과 창작한 작품, 그리고 그 이전부터 전승되던 「단가」 등을 일일이 필사하여 후세의 유산으로 남겼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고 시간이 지나면서 손상된 작품이 많았고, 이에 후손들은 원본을 다시 필사하여 그 마멸을 대비해왔다. 당시 후손들이 필사한 것은 원본과 같이 한글로 기록한 것과 정확한 이해를 위하여 한자를 병기하거나 국한문 혼용으로 쓴 두 가지가 있었다.
그 결과 고창의 ‘읍내본’과 ‘성두본’이 탄생한 바 있다. 하지만 동리 신재효가 직접 만든 원본의 소재 분명하지 않다가 이번에 그나마 110여 년 전 필사본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학계의 남다른 관심이 모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동리 신재효 판소리 사설 집에 대한 연구는 1940년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이전부터 고창에서는 이 사설집이 가지고 있는 의미 가치를 인식하고 온전한 전승을 위해 필사적인 작업이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1940년대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 1891∼1968)의 ‘가람본’과 강한영의 ‘새터본’, 그리고 월북한 김삼불의 필사본 ‘김삼불본’ 등이 전해져 왔었다.
따라서 이번에 발견된 필사본이 본래의 동리 신재효의 판소리 사설과 가장 가깝게 닿아 있는 판소리 사설집 필사본이라는 점에서 당시의 판소리 사설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또 어떻게 전승되어 왔는지를 좀 더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과 1900년대 초기의 언어 사용방식 및 판소리를 수용한 양반 사대부들의 태도 등도 함께 연구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만우 이사장은 “이전까지의 작업들은 모두 1940년대 이후에 이루어진 작업들로, 110여 년 전의 필사본의 발견으로 1940년 이후의 연구보다 더 깊고 넓은 의미에서 필사본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며 “이번 고수 ‘청계본’ 발견을 계기로 아직 미 발국된 고수의 덕동본과 흥덕본도 온전한 모습으로 발굴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고 말했다.
이용찬 기자 chans0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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