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부순 칼럼] '윤리적인 삶과 상아탑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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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부순 칼럼] '윤리적인 삶과 상아탑의 현실'
  • 이용찬 기자
  • 승인 2020.08.26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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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구성원들의 윤리적 노력이 지성의 온실 구할 수 있을 것.
(사진-박부순 전북대 강의 초빙교수)
(사진-박부순 전북대 강의 초빙교수)

상아탑은 지식을 중심으로 한 지성인들의 온실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부정·부패의 공간으로 끊임없이 충격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믿고 싶지 않은 논쟁거리들로는 부정입학, 특혜논란, 연구비 착취, 논문대필, 불공정한 논문심사, ‘미투’ 사건 등, 실로 다양하다.

따라서 대중매체에 드러나는 일부 언론사 보도들은 ‘빙산의 일각’이라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권력에 의한 억압, 부당한 처사, 주변의 따가운 시선들, 그리고 ‘목구멍이 포도청’인 현실에서 타자인 이들은 무릎을 꿇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시사저널의 ‘상아탑의 부정·부실 논문은 왜 매년 양산되나’라는 기사를 읽었다. 기사의 핵심은 그 근원을 찾고자 현직교수와 최근 석·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과의 인터뷰 내용이었다.

각각 5명으로 구성된 이들의 인터뷰는 “공급자와 수요자의 ‘니즈(needs)’는 항상 서로 일치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특히 대학원생들의 입장은 “학위를 파니 사는 것” 이었고, 교수들에게는 “논문심사는 성과급 없는 위험 큰 가욋일”이었다. 정상적인 연구·절차를 거쳐 학위를 습득한 필자가 불행 중 다행으로 침묵하기엔 가슴이 먹먹한 일이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을 되새겨 보자. 소학의 계고(稽古) 편에서는 임금은 나를 먹을 수 있게 해 주신 분, 스승은 나를 가르쳐주신 분, 그리고 아버지는 나를 태어나게 해 주신 분으로, 이 세분의 은혜는 똑같다고 하였다. 즉 삶의 세 가지 조건인 성장, 사람됨, 그리고 생명을 주신 이분들은 한결같이 섬겨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타자 철학을 제시한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évines)는 “스승의 이름을 갖는 한, 사람의 타자 안에 무한의 예지가 숨어있다. 제자들은 스승을 통해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대학에서 학생은 교수를 통해서 부정적인 세계를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 섞인 한탄들이 그것이다. 논문심사를 성과급 없는 가욋일로 여기는 교수, 형식적인 기준 뒤에서 오가는 뒷거래, 짜 맞추기식 행정, 진영논리로 판가름 되는 논문심사 및 교수채용, 친밀도에 따라 달라지는 학점 등 정도와 상식을 벗어난 일들이 상아탑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건에 항거하는 타자들은 마녀사냥을 당하고, 주체자들은 비일비재한 일로 치부해 버리고, 방관자들은 부당함을 인정하지만, 자신의 안위를 위해 침묵한다. 비윤리적인 환경에서 학생들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모든 대학, 모든 교수, 그리고 모든 학생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학의 본질이 이미 변질하였고, 지금 이 순간도 변질되어 가고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을 행하며 그른 것을 버릴 수 있는 교수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학교의 요구와 교수의 윤리적 양심 사이에서는 화합 불가능한 지점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을 가능케 하려는 교수들의 몸짓이 지성인다운 윤리적 노력이 아닐까? “정의와 윤리가 없어. 원칙도 없어”라는 말이 학생들의 입을 통해서 오르내리지 않는 상아탑의 윤리적 노력과 이런 정서적 회복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 사람이 꿈꾸면 하나의 꿈에 불과 하지만 여러 사람이 같은 꿈을 꾸고자 하면 같은 꿈을 이룰 수 있듯이 이제라도 상아탑에서 교수를 필두로 학교 구성원들의 윤리적 노력이 이루어질 때, 새로운 학교풍토가 혁신적인 진리 탐구의 상아탑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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