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의원은 1993년~2001년까지 제42대 미 대통령을 지낸 빌 클린턴의 부인이다. 힐러리는 2000년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 2001년부터 상원의원직을 수행해 오고 있으며 2008년 대선 과정에서 흑백 대결은 물론 남녀 대결의 선두에 있었던 인물이지만 지난 6월 4일 현 대통령 당선인 오바마가 경선에서 승리, 힐러리는 쓰린 패배의 아픔을 경험했다.
2008 미국 대선에서 미국 역사상 최초로 여성 대통령에 도전했던 힐러리 로댐 클린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여자로 불리 우는 그녀는 딸 첼시를 스탠퍼드 의대에 입학시켰고, 남편 빌 클린턴은 2번이나 미국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그녀 역시 최고의 변호사로 활약했고, 각종 사회단체와 교육단체, 시민운동단체의 의장이나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각 단체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순탄하게 보낸 어린시절
힐러리는 1947년 10월 26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아버지 휴 엘즈워스 로댐과 어머니 도로시 하월 로댐 사이에서 태어났다. 힐러리의 아버지는 펜실베니아주 출신으로 시카고 시내에서 작은 사업을 운영했다. 힐러리가 3세 되던 해 힐러리 가족은 시카고 교외 파크리지로 이주했으며 힐러리는 이곳에서 두 남동생과 함께 성장기를 보냈다. 그녀는 평범한 가정에서 비교적 순탄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메인사우스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어린 시절 힐러리는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공화당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힐러리는 1965년 메사추세츠주의 명문 사립 여자대학인 웨슬리 여대에 입학, 정치학을 전공했다. 이 시절 힐러리는 청년 공화당 단체에서 잠시 활동했었으나 당시 민권운동과 베트남 전쟁에 대한 시각 차이로 공화당과 거리두기를 시도했다. 1968년 공화당 하원 밑에서 인턴 일을 하며 대통령 선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도 업무 보조를 맡았었으나 이 기간에 힐러리의 마음은 확실히 공화당 쪽에서 돌아섰다.
힐러리는 같은 해 가을, 졸업반 학생으로 웨슬리 여대 학생회 회장으로 당선됐으며 1969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며 졸업식 대표 연설을 맡아 이때부터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힐러리는 코네티컷 주 뉴헤이번에 위치한 예일 대학교 법학대학원에 입학했으며 당시 학회지의 편집자나 아동학연구소 등에서 활동했다. 1971년 같은 예일대학교 법학과 학생이던 빌 클린턴과 만나기 시작하였다. 졸업 후 심화연구를 위해 예일 어린이 연구 센터에서 공부를 시작한 힐러리는 어린이와 법에 대한 학술 논문을 1973년에 발표했다.
부인으로서 ‘미세스 빌 클린턴’ 혹은 ‘힐러리 클린턴’으로
1974년 워싱턴 DC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의 청문회를 위한 탄핵 조사 연구원으로 일한 힐러리는 클린턴이 콜롬비아 변호사 시험에 떨어지고 아칸소 주 시험에 붙자 클린턴을 따라 아칸소 주로 이사를 했다. 당시 클린턴은 하원의원에 도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1975년 클린턴과 힐러리는 결혼에 골인했다.
일보다 가정을 중요시 하는 그녀는 “개인적으로 여자는 무엇보다 가정을 중요시해야 한다고 믿는다. 자신의 정체성이나 세상과의 관계 정립도 무엇보다 가정과 가족과의 곤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클린턴은 1974년 선거에서 패배했으나 결혼 후 1976년에 아칸소 지방법관으로 선출됐으며 힐러리는 이때 로즈 법률회사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힐러리는 1977년 어린이 보호 재단인 ‘어린이와 가족들을 위한 아칸소 대리인협회’의 공동창업자가 되었으며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에 의해 법적지원재단의 이사로 임명되어 1981년까지 이 일에 몸담았다. 힐러리는 최초의 여성 회장이었으며 초기 9000만 달러였던 재단 예산은 그녀의 임기동안 3억 달러로 성장하는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1978년 클린턴이 아칸소 주의 주지사로 선출되자 힐러리를 농촌지역건강지원위원회의 회장으로 임명했으며 이때 힐러리는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던 아칸소의 가난한 지역의 의료시설 확충을 위해 노력해 연방예산을 따내는 실적을 올렸다.
이후 그녀는 1979년 로즈 법률회사의 공동파트너로 승진하였으며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어 백악관에 들어가기 전 까지는 힐러리의 수입은 클린턴보다 항상 많았다. 이때 여러 투자로 재산을 모았으나 후일 문제가 된 화이트워터 개발 회사의 부동산 벤쳐 사업에 투자해 좋은 결말을 맺지는 못했다.
클린턴과 힐러리는 1980년 그들의 딸인 첼시 클린턴을 낳았다. 같은 해 주지사 선거에서 클린턴은 패배의 아픔을 겪었으며 2년 후 다시 주지사에 선출, 이때부터 힐러리는 클린턴의 부인으로서 ‘미세스 빌 클린턴’ 혹은 ‘힐러리 클린턴’으로 유권자에게 많이 알려지게 됐다.
르윈스키 사건에서 보여준 결단력으로 지지율 71%기록
1992년 클린턴이 민주당 대선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후 1993년 1월부터 백악관 생활이 시작되자 힐러리는 미국의 영부인이 됐다. 힐러리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석사 학위 이상을 가진 영부인이기도 했다. 힐러리는 엘리노어 루스벨트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영부인이 됐으나 힐러리가 미국 정책에 대한 지나친 영향력을 행사, 이 같은 역할이 적절치 못하다는 비난도 쇄도했다. 하지만 이러한 적극적인 역할은 클린턴 선거 전략에 있어 ‘하나 가격에 둘을!’이라는 표어로 적극적으로 활용됐으며 ‘빌러리’라는 별명도 생겼다. 1997년 힐러리는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과 함께 어린이 건강 보험 프로그램 법안을 만들어 추진했으며 이는 각 주에서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가정의 어린이들을 위한 지원이 목표였다. 같은해 힐러리는 사법부의 여성폭행방지사무소를 만드는데도 기여했다.
1998년 백악관 인턴이였던 모니카 르윈스키와 클린턴과의 혼외정사에 대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이 사건은 클린턴의 탄핵으로까지 사건이 확대됐다. 검사는 클린턴의 아랫도리를 전부 다 벗겨냈고, 세상은 클린턴에게 돌을 던졌다. 보통 여자였다면 돌에 맞는 남편을 바라보며 울화를 삭였을지 모른다. 아니면 백악관 한구석에서 홀로 울음을 삼켰을 것이다. 힐러리도 여자였다. 그녀는 남편을 소파에서 재우고 말도 걸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원망을 마음속으로 다스리고 자신은 남편의 손을 잡고 날아오는 돌에 맞섰다. 남편의 행각이 샅샅이 드러나도 그녀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남편에 대한 탄핵 공세를 “보수 세력의 음모”라고 맞받아쳤다. 물론 힐러리의 이러한 행동은 계산된 것일 수도 있다. 세상의 편에 서서 남편에게 화살을 날리면 자신의 야망도 날아갈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 그랬다면 그녀는 아마도 상원의원이나 민주당 대통령 경선 후보, 그리고 오바마의 국무장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대중은 힐러리가 르윈스키 사건에서 보여준 결단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당시 힐러리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율은 71% 수준을 기록했다.
힐러리의 행적엔 권력에 대한 끈질긴 지향성이 엿보인다. 클린턴은 아칸소 주지사 시절부터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했다. 전력회사 간부와 사랑에 빠져 힐러리에게 이혼을 요구했으나 힐러리는 정치적 야망 때문에 이혼을 거부했다고 한다.
힐러리는 2003년 자서전인 ‘살아있는 역사’를 통해 루윈스키 사건 당시 심경에 대해 “클린턴의 목을 비틀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외부로 드러난 힐러리의 처신은 놀랄 만큼 절제된 것이었다. 또한 결혼을 유지하기로 한 이유에 대해서 “빌 처럼 나를 웃게 만들고 이해하는 사람은 이제껏 없었다. 그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그는 내가 만나본 사람중에서 가장 흥미로우며 정열적이고 활발한 사람이다”고 평가했다. 이에 대해 찬사도 쏟아졌지만 그의 정치적 야망과 연결짓는 시각도 많았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꽤 알려진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힐러리가 남편과 함께 고향 시카고의 마을에 갔다. 둘은 주유소 매점에 들렀다. 그들을 몰라본 점원은 “힐러리와 고교 시절 사귀었다. 결혼도 생각했다”고 허풍을 떨었다. 클린턴은 밖으로 나와 힐러리에게 “당신이 저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지금 주유소 직원 부인이 돼 있었을 거야”라고 말했다. 그러자 돌아온 답은 “내가 그와 결혼했다면 지금 미국 대통령은 당신이 아니라 저 사람일 거야”였다.
2000년 연방 상원의원 선거, 차기대권을 노리다
1998년 뉴욕의 상원의원이었던 다니엘 패트릭 모이니한이 은퇴를 발표, 민주당 의사들은 힐러리에게 뉴욕주 상원의원에 출마할 것을 권유했다. 이에 힐러리는 1999년 뉴욕주 상원의원 출마를 발표했다. 힐러리는 당시 전립선암으로 인해 출마를 포기한 루디 줄리아니 대신 공화당의 릭 라지오와 대결했다. 힐러리의 상원의원 출마는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으며 이때부터 차기 대권을 노리는 것이 아니냐는 예측을 낳았다. 힐러리는 결국 2000년 11월 7일에 열린 선거에서 55%의 지지율로 당선됐다. 2001년부터 상원의원으로서 활동을 시작한 힐러리는 예산위원회, 국방위원회, 환경과 공적사업위원회, 건강·교육·노동·연금 위원회와 노년층을 위한 특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2001년 9·11 테러 참사 이후에는 복구를 위한 기금조성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214억 달러의 기금을 모으는데도 일조했다.
국방위원회의 상원위원으로서 힐러리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군사 작전을 지지하였으며 탈레반 정권에 억압받는 아프간 여성의 삶을 개선하는데 테러와의 전쟁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2002년 10월 이라크 전쟁에도 찬성표를 던지기도 했다.
2004년 67%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한 힐러리는 2007년에는 이라크 파병 증강에 반대하였으며 이라크 주둔 미군의 철수 시한을 정하도록 하는 법에 찬성하였다. 그녀의 뉴욕 상원의원 재임동안 지지율은 72~ 74% 정도였으며 대선 출마를 발표할 때는 64%였다.
2008년 미국대선에서 첫 여성 대통령에 도전하다
지난 2007년 힐러리 클린턴은 ‘타임(Time)’지와 와 ‘포브스(Forbes)’지가 뽑은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의 인물로 뽑혔다. 같은 해 1월 20일 그녀는 웹사이트 동영상을 통해 제44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할 의사를 밝혔다.
2008 대선 경선에서 아이오와주 예비선거에서는 패배하였으나 지난 1월 8일 열린 뉴햄프셔 예비선거에서는 승리했다. 선거예측으로는 만약 힐러리가 민주당 후보로 선출되면 공화당 후보를 이길 가능성이 높아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상승했지만 2008년 6월 4일 버락 오바마가 과반수의 대의원을 확보함에 따라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배, 차기 오바마 행정부의 국무장관직을 수행하게 됐다.
힐러리 클린턴은 8년간 퍼스트레이디로 있으면서 전세계 82개국을 방문한 경험이 있다. 이 때문에 오바마는 클린턴의 ‘스타 파워’를 앞세워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리더십을 재건하는 데 상당한 추진력을 얻게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 내정자는 최근 ABC방송 인터뷰에서 힐러리 의원에 대해 “아주 대단한 인물로서 지적 능력이 탁월하며 훌륭하게 국무장관의 임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격찬했고, 힐러리를 오랫동안 보좌한 한 측근은 상상을 초월한 힐러리의 업무수행 능력에 대한 비결에 대해 “힐러리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기준을 세운다. 세상 사람들이 절대로 도달할 수 없다고 여기는 그런 기준 말이다”라고 말했다.
수퍼 국무장관 ‘힐러리 코드’를 읽어라
힐러리의 첫 과제는 ‘테러와의 전쟁’이다. 최근 인도 뭄바이 테러 사건이 발생하면서, ‘제2의 9·11테러’ 가능성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또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해법도 내놓아야 한다. 향후 이라크 철군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관심거리다. 오바마와 클린턴은 아프가니스탄 증파 및 재건에 대한 입장이 거의 비슷하다.
힐러리가 국무장관으로 내정되면서 국내에서도 다양한 예측이 나오고 있다. 그동안 북한 핵 문제에 대해서는 클린턴이 대화와 외교를 통한 해결을 주장해온 만큼 6자회담 체제를 유지한 채 북한과의 직접 대화도 추진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한 외교부 당국자는 “클린턴 내정자는 ‘압박보다는 대화가 먼저’라는 기본 대북 정책 노선은 오바마 당선인과 큰 차이가 없지만 방법론에서는 오바마보다 원칙주의적이고 강경하다”고 분석했다. 경선 때 클린턴이 “김정일 위원장과 직접 만나겠다”는 오바마의 발언을 “천진난만한 생각”이라고 비판한 점, 2006년 유엔의 북한 핵실험 제재에 대해 “내 기대에 못 미친다”며 보다 강경한 대응을 주문한 것 등이 근거다. 하지만 북핵 문제에서 돌파구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면, “예를 들어 남편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대북 특사로 활용하는 것을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함도 갖추고 있다”는 평가다.
힐러리는 어릴 때부터 야망으로 단련된 여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벌써부터 충성파들을 중심으로 국무부에 이른바 ‘힐러리 랜드’를 구축하고 있다. 힐러리가 1990년대 클린턴 대통령 시절 영부인으로서 백악관에 첫번째 ‘힐러리 랜드’를 구축한 데 이어 내년에 국무부에 새 ‘힐러리 랜드’를 만들고 있다고 영국의 더 타임스가 최근 보도했다.
힐러리 랜드에 ‘초대된’ 인사는 백악관 시절부터 인연이 깊은 인물이 대부분이다. 국무부 2인자인 부장관에는 클린턴 행정부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지낸 제임스 스타인버그가 유력하게 거론된다. 영부인 비서실장을 지냈던 매기 윌리엄스도 민주당 대선 경선 힐러리 캠프의 선거 책임자를 지낸 데 이어 국무부 요직에 발탁될 전망이다. 역시 대선 캠프에서 활약한 힐러리의 ‘부관’ 휴마 아베딘도 이번에 러브콜을 받았다. 더 타임스는 힐러리 랜드의 최대 깜짝 카드로 클린턴 전 대통령의 중용을 점쳤다.
미국車 급한 불 껐지만 여전히 ‘벼랑’
미 정부가 자동차 업계에 174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하면서 제너럴모터스(GM)와 크라이슬러가 당장은 파산 위험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자체 구조조정안에 따라 파산 여부가 최종 결정되는 만큼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히만슈 패털 JP모건 애널리스트는 지난 12월 20일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GM과 크라이슬러는 여전히 파산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구제안의 가장 핵심적인 조항은 GM과 크라이슬러가 지원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회사의 성장 가능성도 보여주지 못하면 지원 자금을 회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 임금 삭감, 부채 축소 및 채무 주식 전환 등의 지원 조건에 대해 전미자동차노조(UAW)는 반대하고 있다. UAW 측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서면 이 같은 안을 철회해 줄 것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로이터통신은 강제성이 있는 파산 법정이 아닌 외부에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로펌 ‘스미스 갬브럴&거셀’의 파산전문 변호사 마이클 하버는 “지원안은 노조의 양보를 요구하고 있지만 이를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지적했다. 형식만 다를 뿐 내용면에선 구조조정안이 파산 절차와 비슷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히만슈 패털은 “차기 정부는 크라이슬러의 파산을 유도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GM이 크라이슬러를 인수하게 될 것이라는 관측도 뒤따랐다.
반면 자동차 업계에 추가 지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지원키로 한 174억 달러는 두 회사가 3월까지 버틸 수 있는 규모로, 계속 생존하기 위해서는 추가 자금이 필요하다. ‘무디스 이코노미’의 마크 잔디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자동차 업계에 200만개의 일자리가 연관돼 있다”면서 “업체들은 정부에 다시 손을 내밀 것이고, 새 행정부는 어쩔 수 없이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는 지원안을 환영하면서도 “자동차 회사들이 구조조정 기회를 헛되이 보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자동차 회사들을 살릴 것인지에 대한 최종 결정권이 오바마의 손으로 넘어 오면서 자동차 산업을 친환경 산업으로 재편하려는 그의 계획도 시험대에 오를 전망이다. 오바마는 자동차의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신기술 개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자동차 업체들이 파산을 눈앞에 둘 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인 데다, 석유 값도 떨어지고 있어서 오바마가 의도하는 산업 재편이 어느 수준까지 받아들여지고 또 효과를 볼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12월 20일 오바마 측근의 말을 인용, “오바마 당선자는 ‘친환경 자동차 기술 개발은 필요하다면 하고, 필요하지 않다면 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캐나다도 GM과 크라이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는 20일 온타리오주에 있는 GM과 크라이슬러의 캐나다 자회사에 30억 캐나다달러(C$)와 10억 캐나다달러씩 총 40억 캐나다달러(33억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하퍼 총리는 “자동차 산업 붕괴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자동차 회사들은 비즈니스 방식을 바꿔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