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체제 이후 정부의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으로 비정규직 노동자가 급증하면서 비정규직 문제가 노사 갈등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다. 노동계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 부분을 합치면 비정규직이 800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노동자 10명 중 6명이 비정규직인 셈이다.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은 저임금, 고용불안, 정규직과의 차별대우 등으로 요약된다. 특히 비정규직의 고용불안은 노사갈등의 새로운 불씨가 되고 있다. 그에 따른 현 비정규직 실태를 기획취재했다.
국내 비정규직 근로자는 공식적으로는 460만 6000명(노동부)으로 공표되고 있지만 정확한 규모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기준에 따라 비정규직 근로자 산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같은 민간 기관에서는 800만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비정규직 노사갈등의 쟁점은 대부분 정리해고 반대, 정규직 전환, 임금 등 차별대우 철폐 등 사용자측이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다. 이 때문에 파업이 장기화·극렬화로 이어져 엄청난 사회적 불안 요소가 되고 있다.
현재 비정규직은 속속 노조를 결성하고 있다. 골프장 경기보조원(캐디), 학습지 교사, 보험모집인 등도 잇달아 노조 설립에 나서면서 앞으로 비정규직 노사갈등이 더욱 심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부도 비정규직 문제가 노사갈등의 핵으로 떠오르자 노사정위에 비정규직근로자대책특위를 구성하고 특수고용 형태 노동자 보호와 비정규직 4대보험 확대적용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같은 조치는 정부의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에 따른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에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데다 재계의 강력한 반발이 예상돼 상당한 진통이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노동문제 전문가들은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면서도 급증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가 노사불안의 원인이 되지 않도록 노·사·정이 지혜를 모아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비정규직의 불만은 사용자들이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 새로운 형태의 고용계약을 맺도록 하는 점이다. 비정규직 고용계약서에는 대부분 사용자의 일방적인 해고, 노조결성 및 쟁의행위 금지 등이 명문화돼 있다. 임금, 휴가 등 근무조건도 사용자의 입맛대로 규정돼 있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눈물의 계약서’로 불린다.
또 사용자는 고용형태를 세분화해 사실상 비정규직을 늘리고 있는데도 정부는 개념정의에서 이들을 비정규직에서 의도적으로 배제시킴으로써 문제를 외면하려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불평등 고용계약 실태
비정규직 고용계약에는 정리해고가 명문화돼 있다. 대기업인 S업체의 고용계약서 제6항에서 ‘어느 일방의 필요가 있을 때에는 1개월전 계약해지 의사 통보로 해지 가능하며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D조선 역시 사내하청업체와의 근로계약서에 ‘회사가 원할 때는 언제든지 퇴사한다’라는 조항이 포함돼 있다.
용역업체인 S산업의 근로계약서에 첨부된 서약서에는 ‘1년 단위 계약직으로 노조를 결성할 수 없으며 재직기간중 단체행동을 하는 경우 인사상 조치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쟁의행위 금지조항이 들어있다.
국립 S대는 시설관리업체와의 계약서에 ‘경비원은 학교측 실정에 따라 각종 긴급동원에 협조해야 하며 이를 이유로 추가 반대급부를 요구할 수 없다’는 조항을 담았다. L쇼핑은 파견근로자와의 계약서 10조 2항을 통해 ‘전월 만월 근무한 자에 한해 월 1회 월차휴가를 줄 수 있지만 용역료 30분의 1을 삭제한다’고 못박았다.
파견철폐공대위 이병희 집행위원은 “사용주들의 비정규직 선호는 노동자에 대한 직접적 책임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사용주들이 법망을 피해가며 비정규직을 늘려가고 있지만 사실상의 불법 노동행위”라고 주장했다.
노사갈등에서 노노(勞勞)갈등까지
현대차 비정규직 근로자였던 원문숙(28)씨는 비정규직에 대한 낮은 처우보다 정규직 직원에게서 받는 차별이 더 고통스러웠다. 그는 작년 7월 현대 아산 공장에서 ‘비정규직 차별 반대’플래카드를 내걸고 항의 농성을 했다가 해고당한 뒤 법정투쟁을 벌이고 있다. 한달에 90만원씩 받고 자동차 검사라인에서 일했던 그는 정규직 반장으로부터 ‘너희들이 여기를 나가면 갈 데가 있느냐’는 이야기를 수시로 들었다고 말했다.
두산중공업 비정규직 김모(36)씨는 회사 통근버스를 한번도 타보지 못했다. 통근버스를 탈 때는 ‘정규직’ 신분증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회사의 구내식당도 이용할 수 없다. 공장 한가운데 1000석이 넘는 식당이 있지만, 그는 공장 한구석에 있는 슬래브 가건물 형태의 150석짜리 식당을 이용해야 한다. 그는 “출근할 때마다 내가 3류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가 확대되면서 근로자들 간의 갈등의 골이 갈수록 깊어가고 있다. 대부분의 비정규직들은 임금이나 학자금 ‘수당, 휴가 등 각종 복지혜택에서 소외받는다. 식당, 샤워장, 통근버스 이용은 물론 심지어 일을 하다가 다쳐서 사내 병원을 이용하더라도 눈치를 봐야 한다고 호소한다.
우리은행의 한 서울시내 지점에서 근무하는 김미화(가명, 여, 34)씨는 비정규직 ‘재수(再修)생’이다. 93년부터 중소기업을 다니다 외환위기 때 해고된 뒤 지난 2000년 대기업 금융사에서 2년간 계약직으로 일했다. 하지만 ‘계약직은 2년이 지나면 정규직으로 고용하든지 퇴사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다시 우리은행으로 옮겨 비정규직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녀는 ‘비정규직은 정규직 대신 잘리는 방패막이’라며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이 잘리든 말든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현대중공업 근로자 박일수씨가 비정규직 차별에 항의, 분신 자살했다. 그 후 한 달째 매일 시위를 벌이고 있는 현대중공업 하도급 노조는 정규직 노조를 비난하는 성명을 냈다. 하도급 노조 조성웅 위원장은 ‘현대중공업 정규직 노조는 노동자의 죽음을 폄하하는 어용노조 ‘라며 ‘작년 8월 이후 8명의 비정규직이 산재 사고로 숨졌는데도 정규직 노조는 이를 외면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정규직들은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노조를 지지하기는커녕 노조로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며 불신감을 토로한다.
물론 이 같은 노(勞) 노(勞) 갈등이 정규직만의 책임이랄 수는 없다. 현대중공업 정규직 노조는 ‘민주노총 등 상위 노동단체들이 자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든다’고 반박했다. 정규직 근로자들도 ‘비정규직들이 기술이나 경력, 학력 차이에서 오는 임금 격차는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처우개선을 하라고 요구한다’고 내심 불편한 표정이다. 경영층 역시 ‘비정규직 고용은 고용 유연성 제고를 위한 범(凡)세계적인 추세’라고 말한다.
현대중공업 김문현 이사는 ‘비정규직의 평균 임금(근속 연수 1.6년)이 월 235만원 수준으로 오히려 정규직보다 많고 기타 복지시설 이용에도 전혀 차별이 없다’고 말했다. ‘바다의 건설업’이라고 불릴 정도로 매년 20~30%씩 수주물량이 왔다갔다하는 조선 업종의 특수성상 전 직원을 정규직으로만 채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한국노총 등 상위 단체에서는 올해 임단협 협상부터는 비정규직도 포함해서 협상를 벌이기로 하는 등 비정규직 문제에 눈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이해관계가 워낙 첨예해 화학적 융화는 쉽지 않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승철 경제조사본부장은 ‘한국노동연구원 조사 결과 비정규직 근로자의 생산성은 정규직의 75% 수준이며 임금 역시 비슷한 비율로 나타났다’면서 ‘이 같이 생산성 차이에 대한 인식없이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가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예외는 없다-공공부문 갈수록 非정규직 늘어
지난 1월 20일 오후 3시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후문에는 초등학교 급식조리원 70여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손에는 ‘비정규직 고용 안정 보장하라’는 피켓이 들려있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인 하모(여, 50)씨는 광진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9년째 일하고 있다. “아침 8시30분에 출근해 1인당 아이들 200명분의 점심을 준비합니다. 하루종일 삶고 볶고 튀기고, 오후 4시 반 식판을 씻어야 일과가 끝납니다. 일당이 얼마인 줄 아세요? 2만7710원입니다. 그나마 방학 3개월 동안은 실업자 신세예요.”
국내 정규직과 비정규직 근로자 간 격차는 공장 근로자나 하씨 같은 식당 근로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문화재청 정규직 연구사와 비정규직 조사원의 경우 비정규직 조사원은 기본급(108만원)만 정규직 연구사(73만3600원)보다 높았을 뿐 직급(9만5000원), 급식(9만원), 직무수당(13만원) 등을 받지 못했다. 예술의전당 일반직 9급과 비정규직 전산요원 간 연봉 차이는 1664만원 대 1032만원. 여기서도 비정규직 전산요원은 기본급(86만원)이 높았지만 직급(10만5000원), 급식(9만원), 명절(7만1425원), 가계수당(11만9042원) 등은 제외됐다.
작년 말 근로자가 분신 자살한 노동부 산하 근로복지공단 역시 정규직 6급과 계약직을 3호봉 기준으로 분석했을 때 연봉이 2119만3210원(정규직)과 1414만2840만원(비정규직)으로 705만370원의 차이가 났다.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 정락준 부위원장은 ‘대부분의 비정규직들이 졸업 후 선택한 첫 직장이지만 임금뿐 아니라 승진도 거의 되지 않는 등 심한 차별로 실의에 빠져 있다’며 ‘결혼한 직원 중에는 퇴근 후 대리운전을 해 아이들의 분유값, 기저귀값을 버는 사람도 있다 ‘고 말했다. 국내 근로자들에게 예외없이 적용되는 근로기준법 제5조는 성, 국적, 신앙, 사회신분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 있지만 ‘비정규직’들은 여전히 그 사각지대로 남아 있다.
서강대 남성일 교수는 ‘이른 시일 내에 법 제도의 편차부터 줄이는 게 비정규직 문제를 푸는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고용계약 세분화
사용자들이 노동법 등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고용계약을 맺다보니 비정규직의 형태가 세분화, 다양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양대노총과 한국비정규직노동센터가 파악하고 있는 비정규직 고용형태는 모두 8가지. 고용기간을 정해 채용하되 장기적 계속근로에 대한 합의가 없는 임시 계약직, 주당 30시간 미만의 단시간 노동자, 근로자파견법에 따라 업체에 고용된 파견근로자, 청소, 경비 등 일정분야 노무 제공업체에 고용된 용역노동자 등이다.
이밖에 호출 일용직, 특수고용직, 재택노동자, 아르바이트 등이 있다. 사용자는 사실상 노동자에 대해 직접통제권을 행사하면서도 도급, 위탁 등의 형태로 고용계약을 맺고 있다.
민주노총 심동진 조직부장은 “비정규직이 분화되면서 근로조건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면서 “그나마 임시 계약직, 파견, 용역 노동자, 특수고용 노동자 등 4개 분야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고용계약서조차 작성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개념정의 논란…비정규직은 얼마나
비정규직이란 ‘단일 사용자와 기간을 정하지 않은 고용계약을 맺어 전일제로 일하면서 해고보호, 정기적 승급보장, 사회보험 혜택을 누리는’정규직에 대칭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개념이 다소 모호하다보니 숫자를 줄이려는 정부와 늘리려는 노동계 사이에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매월 고용동향 분석을 발표하는 통계청은 고용계약 기간이 1개월~1년 미만의 임시직과 1개월 미만의 일용직을 비정규직으로 규정하고 있다. 반면 노동계는 특수고용 노동자(레미콘 기사, 학습지 교사 등), 간접고용 노동자(파견, 용역 등), 1년 이상의 계약직까지 비정규직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상반된 개념의 조율을 위해 양대노총과 한국비정규직노동센터는 노동부에 ‘비정규직 고용통계 개선을 위한 의견서’를 제출한 바 있다. 의견서에 따르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구분하는 기준은 고용의 지속성 여부, 통상적 노동시간 적용 여부, 고용관계와 노무제공 대상자 일치 여부, 형식적 고용관계 존재여부 등 4가지로 요약됐다.
국내 비정규직 근로자는 또 크게 4가지 범주로 나뉜다. 일반적으로는 기간제(期間制), 파견제, 단시간제, 특수형태제 근로자로 구분되지만, 통계청은 한시적 근로, 시간제 근로, 파견 근로, 용역 근로, 특수고용형태, 가정 내 근로, 일일 근로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렇게 구분이 엇갈리기 때문에 국내 비정규직 근로자의 비율이 국제적으로 어느 정도 순위가 되는지에 대해서도 해석이 엇갈린다. 다만 OECD의 2003년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전체 근로자 중 시간제 근로자 비율이 7.5%, 기간제 근로자 비율이 17.0%로 중간 정도 순위에 랭크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OECD 국가 가운데 시간제 근로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네덜란드(33.0%), 가장 낮은 나라는 슬로바키아(1.9%)이며 기간제 근로자 비율의 경우 스페인(31.5%)이 가장 높고 미국(4.0%)이 가장 낮다.
노동부 관계자는 ‘시간제 및 기간제 근로자 비율이 독일(17.6%, 12.7%), 일본(24.9%, 12.8%) 등 선진국이 한국보다 높으면서도 우리처럼 정규, 비정규직 갈등이 없는 것은 이미 이들 국가에서는 이 같은 형태의 근로로 인한 차별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