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매거진/전북=이용찬 기자] 우리나라 여류 문인으로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인물이 바로 전북 순창군 순창읍 남산마을의 설씨부인(1429~1509)과 그가 1482년(성종 13)에 남긴 ‘설씨부인권선문첩(薛氏夫人勸善文帖)’이다. 이 설씨부인은 세조의 강압적인 정권 탈취에 벼슬을 버리고, 순창으로 낙향했던 신말주(申末舟, 1429~1503)의 정부인이었다.
순창설씨는 입향조 설자승(薛子升)이 순창읍 남산마을에 낙향하여 이곳 남산마을은 설씨부인의 시대까지 약 600여 년 동안 설씨의 세거지로 불렸다. 하지만 무남독녀였던 설씨부인이 고령신씨(高靈申氏) 신말주와 혼인하며 이전의 설씨 세거지는 다시 고령신씨의 세거지로 지난 500여 년 동안 이어졌다. 이런 순창설씨와 고령신씨의 세거지 접점(接點) 시기에 ‘설씨부인권선문첩’과 신말주가 노년의 1488년 남긴 ‘십로계첩(十老契帖)’이 만들어져 현재까지도 현전하고 있다.
이에 대한 기록은 국립전주박물관이 지난 2007년 10월 16일부터 11월 25일까지 개최한 ‘전북의 역사문물전 VII, 순창’ 특별전 도록에 수록되어 그 찬란했던 역사가 현시대의 역사로 현전하게 되었다. 여기에 수록된 ‘설씨부인권선문첩’과 신말주의 ‘십로계첩’, 김정(金淨, 1486~1521)의 ‘화조도’ 한점도 함께 수록되었는데, 이에 대한 감상평이 순창의 문화와 예술의 깊이를 더욱 확연하게 드러낸다.

먼저, 설씨부인이 1482년(성종 13) 남긴 보물 제728호 ‘설씨부인권선문첩(薛氏夫人勸善文帖)’에는 설씨부인이 불도들에게 보시를 청하는 글과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는 887년 도선국사가 창건한 강천사가 1316년 덕현이 오층석탑과 12개의 암자를 새로 지어 사세를 확장되었고, 이후 1482년(성종 13) 다시 이 설씨부인의 도움으로 중창되던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 당시 설씨부인은 남편 신말주와 함께 고향인 순창 남산마을에 살면서 순차의 강천사를 복원하기 위해 신도들에게 시주를 얻고자 권선문(勸善文)을 짓고 사찰도를 그려 돌려보게 하였는데, 전체 16폭의 문첩 중 14폭이 권선문이고, 나머지 2폭은 부도암도(14면, 종이에 색 40.0×19.8cm)가 청록산수화풍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마지막 폭에는 ‘성화 18년(성종 13, 1482) 7월 정부인 설’이라는 선명한 낙관이 찍혀있다.
이것은 조선시대 여류 문인이 쓴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문첩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사대부 집안의 정부인이 불가의 인과법에 의한 글을 교화의 차원에서 쓴 글이라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되지만, 그림의 완성도 역시 최초의 것이자 당시까지 최고의 작품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말주는 세조시대 이후, 조정의 부름으로 다시 관직에 나아가기도 했지만, 70이 넘어 노년에 이르러서는 다시 순창으로 돌아와 지내면서 지기상합한 노인 10명과 계회(契會)를 맺고 ‘십노계(十老契)’라 이름하고 계의 연유와 목적, 성격 등을 적은 서문을 쓰고, 여기에 10인 노인들의 인물도를 그리고, 거기에 경구시를 첨부한 ‘십계노첩’을 남겼다. 이중 계의 목적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나이 들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간 이듬해 봄에 같은 마을에 사는 전 부장(部將) 이윤철(李允哲)이 술 동이를 지고 와서 나를 방문하였다. 서로 귀래정에 앉아서 한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그에게 말하기를 “옛사람들은 고향 사람을 소중히 여깁니다. 천지 사이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앞서지도 않고 뒤서지도 않으면서 같은 시대에 함께 살게 됨은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닙니까? 사방(四方) 지역이 다르기는 하지만 동서남북에 여전히 그대로 있습니다. 서로 간의 모임을 기약할 만한 시간이 없습니다. 같은 시대에 함께 살고, 또 같은 나라에 함께 삽니다. 같은 나라에 함께 살고, 또 같은 마을에서 함께 삽니다. 다행 중에도 또 다행이니 어떤 일이 보다도 대단하겠습니까? 고인(古人)은 ‘천하의 모든 사람은 다 형제이다(四海之內皆兄弟)’라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 같은 마을에서 살고 있으니 정의(精義)가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또 우리들은 나이가 70을 넘었습니다. 세상에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적당한 시기 길일에 태평시대를 함께 즐긴다는 모임을 시급히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다음은 김정(金淨, 1486~1521)의 화조도 이다. 김정(본관 경주, 자 원충(元沖), 호 충암(沖菴), 시호 문간(文簡)은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다. 1507년(중종 2)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순창군수를 지냈다. 군수시절 담양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함께 폐비 신씨(愼氏)를 복위시키고자 상소하였으나 각하되어 유배당했다. 이 그름에 등장한 한쌍의 할매새(16세기, 종이에 먹(63.8×21.6cm) 도혜스님 소장)는 수묵으로 간결하게 묘사되어 있어 맑고 그윽한 느낌을 준다. 이 그림에 대한 경주인 김광국의 감상평은 다음과 같다.
충암(沖菴) 김정(金淨) 선생의 도학(道學)과 문장은 해와 별처럼 환하게 밝아서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았다. 선생의 서화 작품은 비록 공적인 공무 이후 그린 것이지만, 당시엔느 삼절(三絶, 시·서·화의 대가)이라 불렸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눈이 어두워 높이 평가를 하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세상에 전해지지 않았다. 오직 이 그림 한 장만이 세상의 큰 재앙을 겪고서도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왔다. 진귀한 완상품으로 따진다면 어찌 여러 개의 성(城)과 맞먹는다는 화씨지벽(和氏之璧)보다 못하겠는가? 후대에 이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은 그 그림의 품격을 취해도 좋겠지만 그림을 통해서 선생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으니 선생을 높이 앙모(仰慕)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1780년 동지일에 경주(慶州) 김광국(金光國)이 삼가 씀.
이렇듯 ‘귀래정(歸來亭)’의 신말주와 설씨부인 그리고 이들의 후손(後孫) 세거지(世居地) 순창군 순창읍 남산마을은 신말주와 정부인 설씨는 이후, 이들의 후손으로 백두산에서부터 갈라지는 우리나라의 산줄기와 물줄기를 살펴서 한반도 구석구석의 산을 족보 형식으로 정리했던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 1712~1781년)을 배출하였다. 이런 점에서 이곳의 찬란한 역사가 다시금 우리의 지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신경준은 학문이 뛰어나 성률·의복·법률·기서(奇書) 등에 두루 통달했고,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한 고증학적인 방법으로 지리학을 개척했다. 33세까지는 여러 곳을 옮겨 다니다가 33~43세에는 고향 순창에 묻혀 저술에 힘썼다.
신경준의 대표적인 저술은 1750년(영조 26)에 지은 훈민정음운해다. 이 책에서는 한글의 작용·조직·기원을 논하여 과학적인 한글 연구의 기틀이 되었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가장 깊이 있는 문자론을 전개한 학술적 업적이다.
이밖에 ‘일본증운(日本證韻)’, ‘언서음해(諺書音解)’, ‘평측운호거(平仄韻互擧)’, ‘병선책(兵船策)’, ‘수차도설(水車圖設)’, ‘강계지(疆界志)’, ‘산수경(山水經)’ 등 다양한 분야의 저서가 있다. 이것이 순창군 순창읍 남산마을을 다시금 찾고 싶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