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녀(禁女)의 벽 깨고 날아오른 항공분야의 여성개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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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녀(禁女)의 벽 깨고 날아오른 항공분야의 여성개척자들
  • 이연제 기자
  • 승인 2008.12.12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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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없는 그녀들의 숭고한 도전

대한항공이 국내 민간항공 사상 처음으로 여성 기장 시대를 활짝 열었다. 대한항공 신수진, 홍수인 기장이 11월 3일 국토해양부 항공안전본부에서 실시한 기장 자격심사를 통과함에 따라 국내 최초 민항기 여성 기장에 오르게 된 것.
신수진, 홍수인 기장은 지난 5월말부터 5개월 동안 지상학술훈련, 모의비행훈련 등 기장 승격훈련과정을 마쳤으며, 지난 11월 3일 기장 자격 심사에도 합격됨으로써 국내 첫 여성 민항기 기장이 되는 영광을 동시에 안게 되었다. 이를 통해 그동안 금녀의 벽을 뚫고 날아오른 항공분야의 여성개척자들을 살펴보았다.

 

한국인 최초의 여류비행사는 권기옥 선생(1901~1988)
한국인 최초의 여류비행사는 권기옥 선생(1901~1988)이다. 독립운동가 이상정의 부인이기도 했던 권기옥 선생은 숭의여학교 시절 비밀결사대인 ‘송죽회’에 가입한 것을 계기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임시정부로 송금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다시 붙잡혀 6개월 간 옥고를 치뤘다. 출소 직후 또 다시 평안남도 도청 폭파사건에 가담하고 ‘평양청년회 여자전도대’를 조직했다가 발각되어 중국 상해로 탈출, 이승만 안창호 등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1923년 중국 윈난성 육군항공학교 1기생으로 입학한 권기옥 선생은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한 지 불과 20여년 만인 1925년, 항공학교를 졸업하며 한국인 최초의 여자비행사가 되었다. 중국 공군에서 19년 간 복무한 이후에는 임시정부 직할 한국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해 여성들의 독립사상을 고취하였고, 귀국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군기를 조종하기도 했다. 정부는 1968년 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권기옥 선생이 우리나라는 물론 동양권에서도 최초의 여자 파일럿이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가장 행복하고 달콤했던 하늘로 비상할 때였노라”
최초의 민간인 여류비행사는 박경원(1897~1933)이다. 그녀는 1926년 일본 비행학교 3등 비행사 시험에 합격하며 비행사가 됐다. 당시 비행사 급수는 1, 2, 3 등 비행사로 나눠졌다. 3등 비행사는 자가용 비행기로 운동장 주변만 비행하고, 2등 비행사는 자가용 비행기에 한해 자유롭게 비행할 수 있으며, 1등 비행사가 되면 영업용 비행기까지 조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1등 조종사 자격은 남성에게만 주어졌다. 박경원은 3등 비행사가 된 이듬해 2등 비행사에도 합격한다. 그 무렵 일본에 2, 3등 비행사는 12명뿐이었는데 그중 직접 비행을 하는 여류 비행사는 박경원 밖에 없었다.
본래 박경원의 오랜 꿈은 간호사였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대구 자혜의원 간호사였던 그녀가 파일럿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1922년 용산 연변장에서 펼쳐진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의 시법비행 연습을 구경하고 부터였다. 1922년 8월 7일. 일본에서 만주로 가는 비행 중간에 고국을 방문해 시범비행을 선보이기로 했던 그녀는 시즈오카현 겐가투산에서 짙은 안개로 비행기가 추락하며 33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일대기는 장진영 주연의 영화 ‘청연’으로 제작 된 바 있다.

‘AH-1S(일명 코브라)’의 첫 여성 공격형 헬기조종사로 김효성 중위
대한민국의 첫 여성 전투기조종사는 월드컵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2002년 9월에 탄생됐다. 97년 공군사관학교에 입교, 경북 예천 공군 전투비행단 고등비행교육을 수료한 박지연, 박지원, 편보라 중위(이하 공사 29기)가 그 주인공이다. 당시 공군은 이들의 배출을 계기로 임신기간 중에는 비행을 금지하는 한편, 출산 시에는 6개월이 지난 뒤 신체검사에 합격해야만 조종간을 잡게 한다는 방침을 마련했다.
2004년 1월에는 공군 첫 여성헬기조종사가 탄생했다. 여성 교육생 5명 가운데 유일하게 8개월여 동안의 강도 높은 고등비행훈련을 통과한 조은애 중위(공사 50기)가 빨간 머플러의 영예를 안았다. 조종사가 된 직 후 그녀는 “헬기 조종사들의 꿈인 대통령 1호 헬기를 조종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그로부터 2년 반 뒤에는 전쟁 시 지상전투의 최선봉에서 적 기갑 및 기계화 부대를 타격하는 ‘AH-1S(일명 코브라)’의 첫 여성 공격형 헬기조종사로 김효성 중위(여군사관 48기)가 이름을 올렸다.

 

‘공군역사의 한 획을 긋다’ 첫 여성 전투기 조종사 박지연 대위
2007년은 공군역사에 한 획을 긋는 해였다. 2월에 첫 여성 편대장이, 11월에 첫 여성 KF16조종사가 배출된 것이다. 첫 여성 편대장은 앞서 ‘첫 여성 전투기 조종사’로 언급했던 박지연 대위가 주인공이었다. 편대는 4기의 전투기로 이루어진 공군작전의 기본단위를 뜻하는데, 이를 지휘하는 편대장에게는 당연히 최고의 조종실력과 상황판단 능력 지휘통솔 능력 등이 요구된다. 여성들의 볼모지에서 ‘첫 여성 비행’의 타이틀을 뛰어넘는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정미 대위(공사 50기)는 ‘대한민국 여성 KF-16 전투조종사 1호’다. 최초의 공군여성 조종사가 배출된 지 5년만의 일이었다. 공군은 하정미 대위가 조종간을 잡기전까지 KF-16에 대해서만큼은 여성 조종사의 비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첨단 항공전자장비와 다양한 무장운용 능력, 탁월한 기동성을 갖춘 공군의 주력전투기 KF-16은 복잡한 기능과 전술임무는 물론 급회전 시 중력가속도가 급상승하며 자신의 몸무게가 9배나 무겁게 느껴지는 등 체력적 중압감이 상당한 이유로 남자 조종사들도 체력과 조종 성적이 우수해야만 탈 수 있는 기종이다.

국내 민항기 60년 역사상 첫 여성 기장 탄생
우리나라에서 민간항공기가 들어온 지 60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 기장(機長)이 탄생했다. 대한항공 조종사인 신수진과 홍수인 기장. 부기장이던 두 사람은 지난 11월 3일 김포~울산 구간을 비행하며 치러진 B737기(150~180석 규모) 기장 자격 심사를 통과했다. 이 심사는 함께 탑승한 항공안전본부 운항자격심사관이 항공기 운영 지식 40여개와 조종·관제·통신 등 실무 능력 80여개 항목을 점검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지식 평가는 문제의 70% 이상을 맞히면 되지만 실무 평가는 한 항목이라도 실수하면 탈락이다.
신수진 기장은 지난 10월 31일 한 차례 불합격된 뒤 재수(再修) 끝에 기장 자격증을 따냈다. 그녀는 1996년 9월 대한항공 조종훈련생 25기로 입사하면서 국내 첫 여성 민항기 조종사라는 타이틀도 얻은 바 있다. 홍수인 기장은 신수진 기장보다 한 달 늦게 조종사가 됐다.
현재 국내 민항기 조종사는 모두 3557명이며, 이 중 여자는 10명이다. 기장은 1731명이며 모두 남자였으나 이번에 신수진 기장과 홍수인 기장이 금녀(禁女)의 벽을 허물면서 1733명이 됐다.
신수진 기장은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홍수인 기장은 항공대 통신공학과를 나왔다. 신수진기장은 대학 3학년 때 신문에 난 대한항공 조종사 모집광고를 우연히 보고 꿈을 키워왔고 홍수인 기장은 어렸을 때부터 조종사가 왠지 끌렸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하늘과 비행기에 대해 막연하게 동경해 왔습니다. 꿈은 이제부터 출발입니다. 기장이 되면 제복 웃옷에 줄이 하나 더 생기는데 늘어난 줄만큼 책임감이 더 무거워졌음을 느낍니다” 항공기 기장의 꿈을 이룬 홍수인 기장의 말이다.
그러나 기장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신수진 기장은 대한항공에서 “여자는 뽑지 않는다”는 답변을 들은 뒤 먼저 노스웨스트항공 통역승무원이 됐다. 그러고는 미국에 들를 때마다 비행학교에서 틈틈이 비행술을 배웠다. 1994년 9월에는 민항기 훈련학교인 ‘시에라 아카데미’에 들어가 경비행기 자격증을 따 한국으로 돌아와 대한항공 조종훈련생으로 입사한 것이다.
홍수인 기장의 경우 당시 항공대 항공운항학과는 남자만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곧 여학생도 뽑는다고 해 나중에 과를 옮길 생각으로 입학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회는 없었고 실망 끝에 졸업 후 삼성전자에 입사할 수밖에 없었다. 홍수인 기장은 그래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자비로 미국 비행학교 유학을 준비하다 1996년 대한항공이 처음으로 조종사 문호를 여성들에게 개방하면서 기회를 잡았다.

 

“섬세한 조종으로 남성 기장들과 어깨 나란히 할 것”
신 기장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며 “안전운항으로 국내 여성 조종사의 새 역사를 쓸 것”이라고 했고, 신 기장의 뒤를 바짝 좇아 온 홍 기장은 “제 아무리 큰 덩치의 비행기도 드센 힘이 아닌 섬세함으로 조종하는 것인 만큼 베테랑 남성 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두 사람은 “조종사는 외로운 직업”이라고 말한다. 10시간이 넘게 비행하면서 6㎡ 남짓한 밀폐된 공간에 기장과 부기장 단둘이 하늘만 바라봐야 하는 처지가 그렇다는 얘기다. 더욱이 비행이 많은 때는 한 달에 집에 있는 날이 열흘 안팎이라 가정 생활을 유지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이들은 “다른 사람들(여자)이 가지 않는 길을 걷는다는 보람이 있다”고 말했다.
기장이 되기 위해선 4000시간 이상 비행 경력, 350회 이상 착륙 경험, 항공무선통신 자격증, 항공영어 구술 능력 증명 등이 필수다. 여기에 매년 엄격하게 실시하는 사내 신체검사도 어려운 관문이다.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바로 조종간을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신수진 기장은 그동안 B747-400과 MD-82기를 4483시간, 홍수인 기장은 B777과 MD-82를 5533시간 몰았다. 신수진 기장은 앞으로 최대 555석짜리 초대형기인 A380, 홍씨는 ‘드림라이너’로 불리는 보잉사 최신기종 B787기 기장 자격을 따는 게 목표라고 말하고, 홍수인 기장은 “이제부터 넘어야 할 산이 많다”며 “평생 무사고로 조종사 생활을 마치고 싶다”고 전했다.
그녀들의 도전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오는 2010년부터 대한항공에 도입예정인 에어버스사의 첨단 초대형 항공기인 A380항공기의 기장이 되고 싶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여성 기장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아무리 힘들어도 꿈을 향해 달려간다면 반드시 이뤄지는 법, 조종사를 꿈꾸기 시작했다면 꿈에서 멈추지 말고 현실로 이루기 바란다”는 격려의 말도 잊지 않았다.
대한항공의 한 관계자는 “탑재관리사, 운항관리사, 항공기 제조 등 현장에서 여성 직원들이 맹활약하고 있다”며 “여성 해외 지점장을 비롯해 해외 근무 여직원들도 늘고 있는 등 다방면에서 여성 직원들의 진출이 확대되고 있다”고 전했다.
국력 신장과 양성평등의 지향을 여성들의 창공도전기는 앞으로 더욱 활발해 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대로라면 공군의 공중사격 최우수 조종사를 뜻하는 첫 여성 ‘탑건’은 물론, 첫 여성 ‘우주비행사’의 탄생을 기대해 봐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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