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 없는 제3의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문화유산은 인간이 자연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서서히 생활형성을 진전시킬 경우, 후대에 계승·상속될 만한 가치를 지닌 전대의 문화적 소산을 말한다. 이는 의식주, 생산, 분배, 교환, 신앙, 윤리, 예술, 학술, 정치 등에 걸친 생활형성의 양식과 내용이 대상이 된다.
특히, 유산이란 원래 선인(先人)이 남긴 재보(財寶), 가옥, 토지 등 화폐가치가 있는 것을 가리켰으나, 널리 문화가치가 있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근래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자국의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규제가 강화되며, 1962년 우리나라도 문화재보호법을 제정·공포했다. 문화유산은 곧 민족의 혼으로서 선대가 후대에게 이르기까지 살아있는 역사를 선물하는 것으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재산이다. 이렇게 중요한 문화유산이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 있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어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바로 문화재 약탈 때문이다. 문화재 약탈은 재산적 가치인 문화재를 일방적으로 약탈해가 국가적 자존심과 문화적 가치를 짓밟는 결과를 초래하는 일로 한 국가의 문화재를 약탈하는 행위는 그 민족의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재 약탈에 대해 19세기 말 영국의 역사학자 토마스 칼라일은 “역사는 문명을 창조했지만 침략자는 문화재를 약탈했다”고 말했다. 이는 19세기 서구 열강들의 오만한 ‘문화 제국주의’에서 야기된 것이다. 영토 확장과 경제적인 약탈을 위해 식민지 개척에 앞장섰던 서구 열강들은 자신들이 민족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면서 피지배국의 문화재를 불법적이고 조직적으로 유출했다. 20세기 들어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이루고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문화재 반환과 보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시간이 꽤 흐른 오늘날에도 문화재 반환을 둘러싼 국가 사이의 분쟁은 쉽사리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문화재 보유국들은 과거 문화재를 약탈한 자국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인 책임과 반성을 회피한 채 문화재 반환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그들이 문화 제국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다. 또 문화재 반환 문제는 문화재라는 국가 공공 재산의 소유권 양도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정치적·경제적 관계가 큰 변수로 작용한다. 문화재 보유국이 과거의 약탈 행위에 대해 도덕적인 책임을 느끼지 못한다면, 문화재 반환은 불가능하거나 늘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
칼을 들지 않았을 뿐, 이 시각 지구촌 곳곳에서는 빼앗긴 자와 빼앗은 자 사이의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총성 없는 전쟁에 우리 외규장각 도서가 그 중심에 서 있어 국민 모두를 분노케 하는 일이 벌여지고 있다.
외규장각 도서 왜 프랑스에서 잠자고 있는 가
외규장각(外奎章閣)은 1782년 2월 정조(正祖)가 국방상 안전하고 보다 체계적으로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이다. 이는 1776년 창덕궁에 설립된 왕립 도서관 규장각(奎章閣)의 부속 도서관 역할을 담당했다.
강화유수 서호수가 왕명(정조)을 받아 행궁 동쪽, 장녕전 서쪽 사이에 있던 연초헌을 헐고 건물을 새로 지어 강화부 내책고의 책들을 모두 이곳으로 옮겼다. 또한 서울 궁성으로부터 의궤·옥책 등을 다수 옮겨왔으며,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儀軌)를 비롯해 1천7종, 5천67책이 소장돼 있었다.
내책고는 효종 이래 강화부에 둔 책들의 보관을 위해 1753년 유수 신사가 객사 동쪽에 세웠던 것이다. 1778년(정조 2)에 반고어사 심염조는 이곳의 군기별저치사를 감사하면서 내책고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직접 보고, “선대로부터 전해 내려와 봉안하고 있는 선적, 어필, 어제, 김보, 옥인, 죽책, 교명, 전장의 문자, 문부가 너무 많아 가득 넘칠” 정도라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국왕은 이 보고를 받고 “봉안한 전장 문자가 많은 것이 사각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하니 외규장각이라고 할 만하다”고 하는 찬사 속에 외규장각 설립의 뜻을 확고하게 보였던 것이다.
외규장각은 이런 경위를 배경으로 1781년에 정식으로 발족되어, 1782년 2월에 건물 준공을 본 뒤 4월 2일을 길일로 잡아 직제학 심염조, 검교 직각 서정수가 배진관으로 봉안사와 찰리사의 직함을 받아 창덕궁 봉모당에 모셨던 물건과 대비전과 혜경궁과 정조의 책보를 옮기는 일을 맡았다. 어제·어필로 사고에 흩어져 있는 것도 모두 외규장각에 보관하게 하여, 어제·어필은 창덕궁 규장각과 이 외규장각 두 곳에만 봉안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외규장각은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궁전과 외규장각 도서들이 불에 타 없어지는 큰 피해를 입게 됐다.
외규장각 도서의 불법 약탈과정은 1866년(병인년) 당시 조선의 국법을 무시한 채 전도생활을 하던 프랑스 신부를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극동함대사령관인 로즈제독이 강화도를 무력 점령하고 양민을 학살하고 조선의 국립 문서고였던 외규장각을 불태워 5,000여 권 이상의 책이 소실되었고, 의궤를 비롯한 340여 책의 국가문서를 약탈하는 불법을 자행했으며 비상시 사용하려던 은궤 수천 량을 약탈해갔다. 후에 프랑스는 이들 조선의 문서와 책들을 국가재산으로 편입해 버리는 2차 불법을 자행하고 만 것이다.
프랑스의 약탈과정을 살펴보면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극동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한 것은 1866년 병인년 10월 16일. 당시 강화도에는 왕실의 전적을 보관하는 두 개의 사고가 있었다. 하나는 강화성 내 강화부에 있던 외규장각이고, 다른 하나는 강화읍에서 남쪽으로 15㎞ 떨어진 정족산성 내 전등사 부근에 있던 장사각과 그 별고인 선원보각이었다.
외규장각에 보존돼 있던 화려한 장정의 신비한 서책에 눈독을 들인 로즈 제독은 장교들로 위원회를 구성해 나름대로 목록을 작성했다. 큰 가철서 3백권, 작은 가철서 9권, 흰색 나무상자 3개에 들어 있는 작은 책 31권, 지도 1점, 평면천체도 1점, 족자 7개, 한문이 적혀 있는 회색 대리석판 3개, 투구가 붙어 있는 갑옷 3벌, 가면 1개라는 '전리품 목록' 이 만들어졌고, 실물은 고스란히 군함에 실렸다.
달랑 소총만 메고 정족산성에 접근했던 프랑스군 분견대가 조선군의 기세에 눌려 혼쭐이 나는 일이 생기자 프랑스 함대는 그해 11월 11일 강화도에서 철수한다. 그 바람에 정족산성에 보존돼 있던 사료는 다행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로즈 제독은 약탈품 대부분을 황립도서관(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하고, 남은 일부로 선물잔치까지 벌였다.
프랑스가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는 지난 75년 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 씨가 베르사유 별관 파손 창고에서 처음 발견, 세상에 알려졌으며, 92년 7월 주불 한국대사관이 외규장각 도서반환을 요청하면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 있는 소장본은 174종 297건으로 이중 31종은 우리나라에도 없는 유일 본으로 현재 파악되고 있다. 외규장각 의궤는 1990년대 초반 고속철도(TGV) 구매 대가로 반환받기로 약속받았지만 프랑스는 외규장각 고서 ‘휘경원원소도감’을 돌려준 뒤 고속철도를 팔자 입장을 바꿔 반환을 미루고 있다. 전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은 국가 원수로소 한 약속이 아직도 이행되지 않고 있다.
민족의 혼 외규장각 도서의 의미
1993년, 당시 한국의 고속철도건설 사업권을 놓고 일본, 독일과 경쟁을 벌이던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외규장각 약탈도서 중 한 권을 들고 와 협상에 임했다. 상하 두 권으로 만들어진 '휘경원 원소도감의궤'는 1822년에 사망한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의 묘소 휘경원 조성 사업을 기록한 이 책 한 권이 돌아오기까지의 역사는 이렇게 길었다. 또한 국가 정상 간의 합의로 의궤가 돌아온 것으로 그 가치를 가늠할 수 있다.
의궤(儀軌)는 한자어로 의식과 궤범이라는 뜻 한다. 즉 중요한 의식이 있으면 그것을 하나의 본보기로 삼아서 그 다음에 행사가 있을 때 그 모범적인 전례를 따라서 그대로 국가의 의식을 치를 수 있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의궤가 편찬되었다. 의궤는 왕실·국가의 주요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일종의 행사 보고서로, 지난 6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유네스코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방대하고 치밀하면서도 놀라운 예술성을 갖고 있는 것이 놀랍다”며 등재 이유를 밝혔다.
의궤의 그림 행사가 끝나면 의궤청이라는 별도의 관청이 설치되어 행사에 동원된 인원과 물자 및 경비, 유공자의 포상, 설계도 등 구체적인 내용까지 상세히 기록한 소중한 자료이다. 의궤 자체의 값어치도 크지만 우리가 프랑스와 외교마찰까지 감수하며 굳이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을 요청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외규장각 장서가 중요한 이유는 이 의궤의 경우 근세를 통칭해서 600여 년 동안 꾸준히 기록된 예가 전 세계적으로 오직 조선왕조뿐이라는 사실이다. 의례의 전 과정은 천연색 그림으로 제작되었고 관청간의 업무 상황을 연구할 수 있으며 물자와 인건비까지 소상히 기록되어 생활사를 연구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특히 각종 도구의 이름을 연구하다 보면 사라진 옛 어휘까지 연구할 수 있어 국어사 연구에도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함께 소장되어 있는 역학서(譯學書)의 경우 600년 조선 왕조를 지탱하게 한 외교력의 주역인 외교관(역관) 양성을 위한 입문서로서 국어사와 언어의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은 자료이다. 그리고 소장되어 있는 자료 중 무엇보다 귀중한 것은 조선시대 중국으로부터 구입해온 중국본이 6만 여 책이나 된다는 것. 중국에 소장된 희귀본들이 규장각에도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학자들도 많지 않다. 그 외규장각에 있는 의궤는 1900년대 초기까지 제작되어 근대사를 연구하는 데도 매우 유익한 자료이다. 이 처럼 정조가 우리 선조들의 모든 의식과 삷을 전하고자 만든 외규장각도서의 책과 물품 그리고 의궤의 그 가치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선조들의 삶이 닮긴 민족의 혼이다 말할 수 있다.
‘우리 문화재는 조건 없이, 다른 문화재는 조건 있게’ 프랑스가 취하는 문화재에 대한 자세
우리나라 국민들은 전시 약탈품인 외규장각도서를 조건 없이 반환해야 한다는 강력한 요구에도 프랑스는 여러 이유를 들며 반환을 미루며 돌려주지 않으려고 있다. 이는 문화재를 아무 조건 없이 돌려주었다는 전례를 남기지 않기 위해 어떤 한 요구에도 프랑스는 절대 그냥 못 준다는 식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프랑스는 독일과의 교섭을 통해 모네(Monet), 고갱, 세잔느, 르느와르의 그림 등 여러 문화재를 무조건적으로 돌려받은 이례적인 전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나라의 이러한 요구에는 요지부동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프랑스는 동 미술품의 소재를 파악한 직후인 1975년부터 동독 정부에게 반환을 요구, 1990년 독일통일 이후부터는 독일 정부에 대해 반환을 요구하였다. 결국 1994년에는 독-불 정상회담을 통해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가 미테랑 대통령에게 모네의 그림 등 28점의 미술품을 반환하였다. 그리고 콜 총리는 “교환이 아니라 순수한 선물”임을 강조하였다.
이는 약탈문화재가 교환의 대상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반환이어야 한다는 좋은 선례인 것이다. 당시 프랑스의 주요 일간지인 ‘르몽드’는 “나치에 의해 도둑맞은 모네의 작품이 프랑스에 반환되다”라는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이렇게 좋은 선례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는 문화의 나라라고 불러지고 있으나 정작 다른 나라의 많은 문화재를 루브르 박물관에 가두어 둔 채 버티고 있다. 더불어 프랑스는 우리나라에게 외규장각도서를 반환하게 되면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해 수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텅 비게 된다는 사태를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프랑스의 걱정은 세계 각국에서 전쟁으로 약탈된 문화재를 반환한 전례를 살펴보면 하나의 기우에 속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덴마크로부터 1953년 독립한 그린란드는 1984년부터 2001년까지 덴마크로부터 35,000점의 문화재를 반환 받았다. 양국 박물관의 유기적인 협조와 양측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반환 사업을 주도했으며 그린란드는 자국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유물을 되찾았고, 덴마크가 그린란드의 우수한 문화재를 반드시 소장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는 덴마크의 입장을 존중한 선례가 있다.
또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점령한 국가로부터 전례 없이 많은 문화재를 약탈하였다. 전쟁이 종료된 후 1943년 런던 선언문의 규정에 따라 강제로 약탈된 문화재와 원산국의 수출법에 위반되는 방식으로 유출된 문화재까지 반환에 포함하고 있다.
반대경우로 점령국이었던 러시아는 독일의 문화재를 약탈했다. 독일이 유럽으로부터 약탈한 문화재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중 극히 일부의 문화재가 1950년대 동독으로 반환되었다. 현재도 반환을 위한 꾸준한 노력이 진행 중에 있다.
1997년~2000년 유럽에서는 2차 대전 중에 약탈된 유태인 문화재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었고 유럽의회 총회에서 약탈된 유태인 문화재 반환에 필요한 정치적, 법적 토대를 마련했으며 특히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은 주도적으로 유태인을 도왔다.
이러한 반환사례는 상당수 외교적 방법으로 서양에서 동양으로 진행되었으며 대표적으로 네덜란드에서 인도네시아로, 미국에서 태국으로, 미국에서 인도로, 영국에서 인도로, 영국에서 중국으로, 미국에서 중국으로의 문화재 반환 사례가 있다.
독일로부터 아무런 조건 없이 돌려받은 문화재의 좋은 선례를 남기고도 프랑스는 ‘내 문화는 조건 없이 받아도 남의 문화는 조건 없이 못 돌려준다’는 자세를 취하는 이러한 나라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문화의 나라’라고 불릴만한지 묻고 싶다. 아니 오히려 약탈문화재의 창고라 하는 것이 옳은 표현 일 것이다.
“우리 문화유산을 찾고 싶어요” 외규장각 도서 반한 운동 국민들이 나서다
1866년 병인양요 프랑스가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 빼앗긴 우리의 역사를 되찾기 위해 온 국민이 발 벗고 나섰다. 특히 지난 9월 10일 세계 최초로 한국의 민간단체가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외규장각 도서반환 소송을 시작했다. 이번 소송은 국민들이 모금 등을 통해 소송비용 전액을 마련하고, 민간차원에서 외국 정부를 상대로 ‘약탈문화재 반환’을 세계 최초로 추진되고 있어 더욱 그 의미가 있다.
또한 다음에 개설된 ‘위대한유산 공식카페(http://cafe.daum.net/great74434)’의 게시판지기로 활동 중인 고등학생 네티즌(하얀방랑자)이 캠페인을 청원하면서, 반환운동에 불이 붙었다. 이에 다음커뮤니케이션(www.daum.net)은 지난 10월 29일부터 한 달 동안 우리나라 문화재를 되찾기 위한 네티즌들의 뜨거운 염원을 담아 ‘외규장각 도서 반환 환수를 위한 희망모금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이번 캠페인의 모금액은 민간단체인 ‘문화연대’를 통해 외규장각 도서 반환 환수를 위한 소송비를 후원하는 것으로, 지난 10월 20일 750여 명의 네티즌 서명을 받아 시작되었다. 최종 목표금액은 2,000만 원이다. 또한 다음 역시 네티즌들의 응원 댓글 달기, 카페 스킨 적용, 블로그 스크랩, 블로그 배너달기 등 네티즌들의 다양한 활동에 따라 100원부터 1,000원 씩의 금액을 함께 기부한다.
이러한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대해 답변을 미뤄오던 프랑스 정부는 “외규장각 문서가 국유 재산이라 반환할 수 없다”는 공식 답변을 보내왔다. 프랑스에서 이번 소송을 담당한 김중호 변호사(프랑스 법무법인 알레리옹)는 “병인양요는 프랑스 정부 지시에 의한 게 아니라 당시 프랑스 해군을 이끌던 로즈제독의 독단적 판단에 의해 발생했던 만큼 의궤 등이 국가소유 재산이라는 프랑스 정부의 논거는 불충분하다”고 지적하며 “외규장각을 비롯한 문화재들은 국유재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국유재산은 소유권 이전이 되지 않기 때문에 비국유화를 먼저 해야 한다. 이번 소송은 문화재의 비국유화와 반환을 함께 포함한 것이다. 프랑스의 양도할 수 없다는 논리는 원천적으로 조선왕조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재산이 될 수 없다. 이에 따라 외규장각 도서의 ‘비국유화 요청’과 함께 도서반환 요청 소송을 병행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또한 비국유화 반환에 대해 황평우 문화유산위원장은 “1993년 고 프랑수와 미테랑 전 대통령이 방한 시 ‘휘경원원소도감의궤’를 되돌려준 것이 비국유화를 통한 반환 사례다”라며 외규장각 도서의 비국유화 반한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문화연대도 지난 9월 10일 오전 프랑스 대사관 앞에서 ‘외규장각 및 병인양요 때 탈취된 한국 문화재 반환을 위한 대 프랑스 소송 관련 기자회견’을 열어 우리의 문화유산을 약탈해간 프랑스에 우리의 입장을 전달했다.
한편, 지난해 5월부터 한국과 프랑스 정부는 국립도서관 소장 외규장각도서 유일본 30권에 대한 디지털화 작업을 개시, 현재 문화재청 국가기록유산포털(www.memorykorea.go.kr)에서 인터넷으로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외규장각 도서는 분명 프랑스가 도둑질 한 장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조건 없이 돌려받아야 마땅하다. 외규장각 도서가 장물인 이유는 양국 간 전쟁에서 포획된 물건은 전리품이지만 외규장각 도서는 분명 로즈 제독이 단독으로 훔쳐간 물건이기에 장물인 것이다.
최종덕 국제교류과장은 “프랑스 측이 우리의 외규장각 유일본 의궤 반환요구에 대해 동일한 가치를 지닌 같은 수의 고서와 맞바꾸자는 조건을 달고 있어 협상에 진전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프랑스 정부는 돌려줄 수 없다는 입장에서 다른 고서와 맞바꾸자는 발도 안되는 행동으로 우리 국민들의 가슴을 더욱 애태우고 있다.
한편 지난해 해외로 유출된 우리 문화재를 되찾자는 취지로 시작해 국민의 성원을 이끌어낸 MBC프로그램 ‘위대한 유산 74434’가 문화연대와 정계 및 학계의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프랑스에 있는 외규장각 도서 환수에 나서 프랑스 국민들이 생각하는 외규장각 도서 반환해 대해 집중 조명했다. 이에 대다수 프랑스 국민과 진보적인 오피니언 그룹 내 인사들은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찬성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분명 우리 외규장각 도서는 돌아와야 한다. 다시 한번 더 강조할 것은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어야 그 가치가 있는 것. 우리의 외규장각 도서가 프랑스에서 먼지만 소복이 쌓인 채 몇 백년 동안 동면을 취하고 있어 엉뚱한 시간과 장소에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다. 문화재가 제 가치를 발하는 것은 많은 대중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함께 한 역사와 문화 그리고 환경의 맥락 속에서 임을 프랑스는 되새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