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코로나를 울린 건반 위의 검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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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코로나를 울린 건반 위의 검투사
  • 강창호 기자
  • 승인 2020.03.23 01: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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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발렌티나 리시차 피아노 리사이틀 (3/23)
마스크를 쓰고 연주를 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 (사진제공=오푸스)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 객석의 청중들처럼 마스크를 쓴 채 연주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오푸스)

[시사매거진=강창호 기자] 봄 날씨의 따스함을 뒤로한 채 서울 예술의전당은 모두가 마스크를 착용했다. 마치 화생방 훈련을 하듯 객석은 하얀 마스크로 진풍경을 이뤘다.

코로나19가 가져온 공연장의 이색적인 모습은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파쇼적이다. 동시에 바이러스와의 치열한 전장의 한 복판에 와 있음을 실감케 했다. 빛바랜 지난 오랜 세월의 기억 속에서 핑크플로이드의 1982년 뮤직비디오 <더 월>의 장면들이 스쳐간다. 획일주의와 강압적인 시스템으로 상징되는 벽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저항들, 현재 우리에게 닥친 현실 같았다.

마스크를 쓰고 연주를 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 (사진제공=오푸스)
발렌티나 리시차, 마스크를 쓴 청중들 그리고 키예프에 계신 어머니와 절망적인 상황에서 승리한 베토벤. 이 모든 상황의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왔으리라 결국 그는 피아노 앞에 엎드려 울고야 말았다. (사진제공=오푸스)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는 2013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첫 내한공연을 한 이후 한국을 자주 찾는 아티스트로 유명하다.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념으로 펼친 이번 리사이틀은 ‘격정과 환희’로 2015년 내한 때처럼 첫 곡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로 출발했다. 그리고 23번 <열정>, 인터미션 후 연주한 29번 <함머클라이버>는 한국에서는 처음 연주하는 곡이었다.

리시차는 세계적인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도 어렵게 한국을 찾았다. 무대 첫 등장부터 마스크를 착용하고 나온 그는 연주 중에 어떠한 이유에선지 건반 위에 엎드려 엉엉 우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고야 말았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객석. 그러나 곧 연주자를 응원하는 객석의 열정적인 박수에 다시 무대에 오른 리시차는 미안하다는 메시지와 함께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런데 이어가는 그의 연주는 함머클라비어 4악장이 아니라 미스터리하게 소나타 <월광>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연주를 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 (사진제공=오푸스)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 객석의 청중들처럼 마스크를 쓴 채 연주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오푸스)

이 부분에 대해 리시차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연주 중에 갑자기 86세 연로하신 어머니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가 코로나 때문에 힘든 상황에 있으며, 오늘 객석에 계신 관객 분들 모두가 마스크를 쓴 채 음악을 갈구하는 모습이 제 마음을 건드렸습니다. 곡 또한 굉장히 공감을 일으키는 곡이라 감정에 복받쳐 끝까지 연주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달빛이 사람들을 따뜻하게 비추고 감싸는 것처럼 오늘 함께해주신 객석의 모든 분들을 감싸주고 싶어서 월광을 연주했습니다. 오늘 저의 연주가 많은 사람들에게 달빛 같은 위로가 되었음 합니다. 미안하고, 너무 감사합니다.”

마스크를 쓴 청중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발렌티나 리시차 (사진제공=오푸스)
50분간 펼쳐진 앙코르를 마치고 마스크를 쓴 청중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발렌티나 리시차 (사진제공=오푸스)

베토벤의 슬픔과 현재 우리의 괴기스러운 고통의 상황들이 맞닿았을까?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중 ‘함머클라비어’는 베토벤이 직접 초연했다고 알려진 곡이며 기존 곡들과는 다르게 4악장으로 꾸며진 특이한 구성으로 장대한 음악적 내용을 갖춘 피아노 소나타의 새로운 도약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베토벤 자신도 이 곡을 연주할 당시 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단지 손끝으로 전달되는 건반의 덜컹거림으로 느끼는 감각이 유일했을 것 같다. 이런 곡의 흐름 속에 베토벤의 지독한 고뇌와 슬픔이 연주자에게 전이된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감사하게도 이번 연주를 통해 베토벤의 감정을 소리로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객석의 환호 속에 꿋꿋하게 앙코르를 네 곡이나 들려준 그는 역시 건반 위의 검투사였다.

Lisitsa_Valentina (c)Gilbert Francois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Valentina Lisitsa) (c)Gilbert Franco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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