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매거진 261호=이회두 기획편집국장] 미국의 중앙은행이 몇몇 금융재벌들에 의해 독점되어 그들 가문이 세계 경제를 지배하고 있다는 이야기, 그것을 둘러싼 끔찍한 음모론은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일정 부분 근거가 있는 이야기들도 있고 모두 인정하기에는 허무한 세계정복 같은 이야기도 있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나라, 대통령제의 모태인 나라, 최강의 무기를 보유한 나라, 최대 무기수출국인 나라, 세계의 기축통화인 달러를 발행하는 나라 등 수식어가 난무하는 미국, 중앙은행제도가 일반적이지가 않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중앙은행은 자국의 화폐를 발행할 뿐만 아니라, 재정을 관리하고 물가와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급준비율과 기준금리를 조절하는 등의 통화 정책을 실행한다. 중앙은행에는 정부의 계좌가 있고, 정부가 재정지출이 필요할 때면 중앙은행을 통해 지출하기도 하고, 부족하면 빌려다가 쓰는 형태로 막중한 책임이 뒤따른다. 이런 사정이고 보니 중앙은행의 명칭은 Bank of Korea, Bank of Japan 식으로 ‘Bank of 국가명칭’으로 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미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하는 것은 연방준비시스템으로 ‘the Federal Reserve System’, 줄여서 Fed, 우리나라는 연방준비제도(이하 ‘연준’)라고 번역해서 쓴다. 12개의 연방준비은행 ‘Federal Reserve Bank’, FRB라 말하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eral Reserve Board of Governors)’인, 모두 ‘연준’의 산하기관이다.
체계를 보면, Fed의 산하에 FRB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Federal Open Market Committee)가 있고, FOMC에서 결정된 통화·금리정책을 FRB에서 수행하면서 12개의 연방준비행은행을 총괄하고 감독한다. 또한, 대외적으로 그 내용을 발표할 때는 Fed의 의장이 나서게 되기 때문에 미국 금리에 관해 여러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주체가 다양하게 보이지만 뿌리는 ‘연준’이라고 보면 되겠다.
FRB는 14년간의 단임 임기를 갖는 7인의 이사로 대통령이 상원의회 승인을 얻어 임명하고, 의장과 부의장은 중임이 가능하다. 앨런 그린스펀은 1987년부터 2006년까지 세계 경제를 쥐고 있다는 ‘연준’ 의장직을 4차례, 무려 20년간 유지했다. 12개의 준비은행은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클리블랜드, 리치몬드, 애틀란타, 시카고, 세인트루이스, 미니애폴리스, 캔자스시티, 댈러스, 샌프란시스코에 있으며 담당 구역의 크기는 ‘연준’이 비준되었을 때의 인구 분포에 따라서 설정된 것이다.
각 지역의 은행의 은행장은 해당 은행 소속의 위원회에 의해서 선출되지만, 임명을 받으려면 ‘연준이사회’의 승인이 필요하다. 미국 정부는 달러가 필요하면 스스로 달러를 찍어낼 수 없고 FRB에서 돈을 빌려온다. 담보는 국민이 납부할 미래의 세금이다. FRB는 종이 값과 인쇄비만 들여 달러를 만들고 정부에 빌려준다.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미국 정부는, 지분 대부분을 몇 개 가문들이 독점하고 있다는 12개 사설 은행들의 네트워크에서 발행하는 돈을 빌려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다. 이자를 지불하면서.

‘연방준비제도’의 탄생과 몸집 불리기
1907년 미국에서 대규모 ‘뱅크런’ 사태가 일어나자 금융시장의 조정자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고, 워싱턴과 월가의 실력자 7명이 부자 휴양지인 조지아주의 지킬 섬(Jekyll Island)에서 회동을 마친 직후, 당시 미국 최대의 금융회사인 JP모건이 주도하여 1913년 연방준비제도법을 통과시키며 ‘연준’이 출발했다.
‘연준’ 산하에 전국 12개 지역마다 작은 중앙은행 역할을 하는 연방준비은행을 만들어 통화를 공급하고, 미국 정부가 발행한 국채를 이 은행들이 사주는 방법이다. 즉, 미국 연방정부가 직접 화폐를 발행하지 않고 화폐발행권을 가진 ‘연준’을 통해서 돈을 빌려 재정을 운영하는 시스템이다. 미국 정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는 금융집단의 탄생이다.
‘연준’의 설립 이후 미국은 FRB에 진 빚을 갚기 위해서 다시 FRB에 빚을 지는 악순환 속에서 엄청난 빚을 떠안게 된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 모순을 개혁하려고 국가가 직접 달러를 발행하기로 결정하면서 1963년 6월 4일 재무성에 은태환 화폐 발행권을 주었다. 달러발행의 주체가 이원화 될 수 있는 ‘연준’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편한 조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22일 캐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면서 정부가 발행했던 지폐는 곧 회수되고 폐기되어 버렸다.
금융재벌들에 의해 독점되는 ‘연준’은 1914년부터 1919까지 1차 세계대전을 발판으로 계속 돈을 찍어내어 통화량을 거의 2배로 늘린다. 미국이 1차 세계대전을 통해 벌어들인 엄청난 금들이 그 바탕이 되어 주었다. 늘어난 돈은 국민과 은행들에게 대출로 풀렸다.
1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17년 영국 외무 장관인 아서 밸푸어가 영국 내 유대인 사회의 대표 격인 로스차일드 경에게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한 페이지짜리 서신을 보낸다. 후일 ‘밸푸어 선언’으로 불리는 이 한 쪽짜리 서신으로 유대인들에게는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국제적인 공약이 생긴 셈이다.
물론 엄청난 돈이 필요하겠지만, ‘밸푸어 선언’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나 1920년 5월 16일 ‘연준’은 관련하고 있는 대형 은행의 대표들을 모아 여신수축을 진행한다. 풀어놓은 돈을 단숨에 회수하겠다는 의미이다.
돈을 당장 갚을 수 없는 5,400개의 소규모 은행들과 회사들이 문을 닫고 수백만의 실업자가 양산되었으며 부동산 가격이 크게 하락했다. 하지만 개인과 기업과 은행의 파산은 오히려 금융 재벌들에게 기회가 되어 이들의 자산을 헐값에 주워 들이며 더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금융권을 장악한 인물들은 엄청난 자금을 확보한 것이다.
‘연준’의 몸집 키우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차 세계전쟁의 수혜를 입은 미국의 1920년대는 최고의 호황을 누리게 된다. 자료에 의하면 1924년 5월에서 1925년 12월까지 주가는 무려 80% 상승, 1928년에는 이전 해의 비해 30% 상승, 1929년 여름 석 달 동안 상승한 주가의 이익은 전년도 한 해 동안 얻은 이익과 비슷할 지경으로 절정을 이룬 것이다.
주가의 급상승에는 ‘연준’의 역할이 큰 몫을 했다. 1921년부터 1929까지 FRB는 통화 공급량을 62%나 늘렸고 ‘마진론(Margin Loan)’ 상품으로 대출을 늘려나갔다.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사탄의 유혹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마진론’은 주식 가치의 900%까지 대출을 해주는 상품이다. 가령 100달러가 있으면 은행이 초저금리로 900달러를 융자해주어 1,000달러의 주식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식이어서 주식시장은 활기를 띠고 주가는 5배 이상 올랐다.
하지만 ‘마진론’은 달콤한 유혹이었을까. 1929년 10월 24일, 금융재벌 간의 암투이자 무서운 기획이라고 보이는 사건, 마진콜이 공표된 것이다. 대부회사가 주식대출을 일시에 회수하겠다는 마진콜을 발동하자 사람들은 ‘마진론’을 24시간 이내에 갚기 위해 주식을 처분하려고 몰려나왔고, 주식시장은 아수라장이 되면서 주가는 대폭락했다. 10월 29일 미국 주식시장이 폭락하면서 단 하루 만에 전년도에 거둔 이익을 모두 날려버렸다.
1930년대 초 실업률은 거의 25%에 달했고 GDP는 1929년에서 1933년 사이 3분의 1이나 감소하고 물가가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니 은행은 도산하기 시작하여 거의 1만여 개의 은행이 문을 닫았다. 하지만 금융재벌들은 대공황 직전 이미 자신들이 보유한 주식을 다 정리하여 손실 없이 막대한 자금을 보존한 후였다. 금융권을 장악한 인물들은 또다시 엄청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미국의 경제가 요동치던 1930년대는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급격히 증가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역시 공교롭게도!

전쟁의 시대 21세기, 금융제국 미국의 성립
대공황 발생 직후 ‘연준’은 통화량을 1/3로 줄여가지만, 통화량의 감소와 마진콜이 야기한 주가 대폭락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세계 경제와 정치 및 지배구조에 커다란 파장과 오점을 남긴다. 통화가치의 폭락은 역으로 국제 금융세계가 강력한 통화블록을 형성하도록 하는 요인이 되었고, 통화블록을 확장하려는 세력 간의 갈등을 키우게 된다.
통화전쟁의 실질적인 배경은 금이다. 19세기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누르고 식민지를 통해 대량의 금을 확보하여 금본위제를 실시하는 영국의 파운드화가 세계의 기축통화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1914년 1차 세계대전으로 각국이 전비 마련을 위해 통화발행을 확대하고자 금본위제를 포기했고 이로 인해 인플레이션과 과잉공급 문제가 발생한다.
영국이 1925년 금본위제로 복귀했으나 대공황의 여파와 금 보유량의 부족으로 1931년 금본위제를 다시 포기한다. 미국도 디플레이션 발생으로 유럽의 금태환 요구가 이어지자, 루즈벨트 대통령이 1933년 금본위제를 포기한다. 이후 10년가량이 미국의 달러화와 영국의 파운드화가 모두 기축통화로 받아들여졌던 복수기축통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에는 1차대전 중에 밀려든 금이 있었고, 달러의 영향력은 세계적으로 팽창해 나갔다. 예컨대 독일에 진출한 코카콜라, 제너럴모터스, 포드, 아이비엠(IBM), 국제전신전화회사(ITT) 등이 투자했고, 아이비엠의 독일 자회사 데호마그는 독일에 생산 자동화를 위한 기술을 제공했으며, 제너럴모터스의 독일 자회사인 오펠은 항공기와 트럭을 대량생산하여 납품하는 등, 히틀러 집권 뒤 진주만 공습 전까지 미국이 히틀러의 제3제국에 대한 전체투자 규모는 약 4억 7500만 달러로 추산된다는 보고도 있다.
미국에 비해 다른 국가들에게는 대공황의 여파가 1939년까지 커가자 후발 자본주의국가에서 식민지를 확대하여 경제블록을 확장하는 방법으로 위기를 타개해나가려는 파시즘 세력이 등장했다. 대표적으로 러시아, 중국과 전쟁을 벌이던 일본과 전쟁을 준비 중인 독일이 전제주의로 치달았으며, 양보 없는 통화전쟁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으로 터져 나온다.
2차 세계대전 직전 미국은 교전 당사국 중 어떠한 국가와도 교역이나 융자를 금지하는 중립법(Neutrality legislation)을 1937년에 통과시킨 상태라 중립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는데, 1941년 미국 의회에서 ‘무기대여정책(Lend-Lease Program)’을 승인함으로써 미국이 세계 금융제국으로 확장하게 되는 결정적인 발판이 형성된다. 2차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어도 실질적인 이익은 미국과 소련이 가져갔다.
본토와 무관한 전쟁이면서 막대한 무기를 수출한 미국은 금전적으로, 소련은 영토적으로 수혜를 입은 것이다. 그 와중에 한반도는 신탁통치의 소용돌이 속에 남북으로 갈라지고, 1948년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언하고 아랍 연합군과 전쟁을 벌여 막강한 화력으로 승리한다.
진실이 무엇이든 승전국인 미국에 또다시 몰려든 금괴를 근거로 1944년부터 1971년까지 브레튼우즈 체제가 형성되어 국제금본위제도 속에 달러화는 굳건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전쟁이 있을 때마다 강세를 보이던 달러의 위력이 주춤한 원인은 아이러니하게도 베트남전쟁 때문이다. 베트남전쟁(베트남은 ‘항미전쟁’이라 부름)을 베트남에서는 항미전쟁이라고 부르는데, 미국은 지독한 수렁(The Quagmire)이라 말할 정도로 최악의 전쟁이었다.
미국 지상군이 베트남에 상륙한 1965년부터 1973년 철수할 때까지 6만 명가량의 미군이 사망하고, 엄청난 돈과 무기들을 날렸으며, 린드 존슨 대통령의 뒤를 이은 닉슨 대통령이 ‘닉슨 독트린’을 선언하고도 오일쇼크, 워터게이트 사건 등이 겹쳐 지독한 정치, 사회 전반적으로 위기상황이 심각해졌다. 실업률이 6% 이상으로 늘어나면서 실업수당은 7% 이상이 증가하는 등 경제위기는 노사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닉슨은 1971년 8월 15일 의회의 인준 없이 금과 달러의 교환관계를 끊어 버리는 충격스러운 조치를 단행했다. 때마침 중동전쟁이 발발하면서 1차 오일쇼크가 지구촌을 강타하며 세계 경제는 한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미국은 이때 사우디아라비아를 움직여 원유의 달러 결제를 이끌어 달러 헤게모니를 다시 움켜쥐었다. 원자재 가격이 오르는 것이 기침이라면 달러의 가치변동은 독감이다. 그것도 치명적이다. 황당하게도 달러만이 달러의 문제를 일으키고 해결하는 열쇠가 된 것이다.
미국은 위기상황에서 금본위제를 떨어내고 원유결제 화폐의 위치를 잡았고, 벤 버냉키 의장이 글로벌 금융위기 때 3차례의 양적 완화로 3조 달러를 뿌려 ‘헬리콥터 벤(헬리콥터에서 돈을 살포한다는 의미)’이라는 별명이 붙으리만큼 ‘연준’은 달러를 무한대로 찍어낼 힘을 얻었다. 다시 말해 미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한 후로 ‘연준’에서 찍어내는 달러는 실물 담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신용’을 담보로 출발한 온갖 파생금융상품의 마법을 빌어 폐쇄된 인쇄소에서 찍어내거나 전산망에 기록된 숫자이다.
1960년대 미 하원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라이트 패트먼(Wright Patman) 의원은 “오늘날 미국에는 사실상 2대의 정부가 존재한다. 하나는 헌법상 정식으로 만들어진 정부고, 또 하나는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으며 누구와도 협조하지 않는 독립적인 정부다. 그 정부는 바로 의회가 헌법에 따라 관리해야 할 미국의 화폐를 가지고 마음먹은 대로 세력을 휘두르는 FRB, FRB는 페니 한 개도 지불하지 않고 국채(Government Bond)를 샀다”는 말을 남겼다.
전쟁으로 얼룩진 21세기를 통해 미국은 세계적인 제국으로 자리 잡았고 ‘연준’은 파생통화를 통해 미국을 금융제국으로 변모시켜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앙은행은 정부소속이어야 하나?
‘연준’과 같은 시스템 과연 나쁜가
미국에 위기가 닥치면? 인쇄소 돌리면 된다? 발행량? ‘연준’이 정한다. 그럼 FRB의 소유주는 누구일까? 겉으로는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은행가 JP모건이지만, 실제로는 약 80%의 지분이 유럽의 금융재벌들 소유다. 그들은 미국의 FRB뿐만 아니라 유럽의 ECB(유럽 중앙은행)도 소유하고 있다. 그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유대인 로스차일드 일가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바이샤프트와 함께 일루미나티를 창설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 상원 의원은 텍사스 주의회에서 “미국 상공업계의 거물들은 하나같이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두려워한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1920년대부터 미국의 배후에서 군림하고 있는 일루미나티 세력들이다”, 대법관 펠릭스 프랭크퍼터(Felix Frankfurter)도 “워싱턴의 진정한 통치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일루미나티는 무대 뒤에서 힘을 행사한다”라며 매우 비밀스럽고 금기시된 단어인 일루미나티가 최근에는 미국 의회나 대법관의 입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한 것이다.
아직까지도 연준의 지배주주나 12개 연방준비은행에 출자한 민간은행의 리스트는 공식적으로 공개된 바 없다. 하지만 개별 연방준비은행들의 총재들 중 상당수가 유대인인 것으로 미루어 연준의 뿌리와 뼈대에 유대인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추정들이 나오고 있다.
미국의 음모론 이론가인 유스터스 멀린스가 1954년 ‘연준의 음모(The Federal Reserve Conspiracy)’라는 저서를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월스트리트의 유대계 은행인 쿤롭, 골드만삭스와 리먼브러더스 그리고 로스차일드 지휘 아래 움직인 JP모건, 씨티뱅크, 석유왕 록펠러의 체이스맨해튼은행 등이 연준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멀린스는 연준이 실질적으로 로스차일드, 록펠러, 모건 등 3개 가문이 합작해 운영하는 민간은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연준’은 과연 나쁜 기관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미국의 영향력을 키워나가는 것은 틀림없으니 다른 나라에게는 ‘필요악’인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 ‘연준’의 출발은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모든 것은 유대인의 음모’라고 볼 수는 없다. 1900년 초에 미국을 뒤흔든 두 명의 악질적인 기업가들의 행태가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수면으로 떠오르게 했고, 그 역할을 맡아 해결할만한 금융전문가들이 ‘연준’을 만들었다고 보아야 한다.
프레더릭 하인즈(Frederick A. Heinze)는 1893년 스물넷의 나이로 광산업체를 차려 다른 회사의 구리 광맥이 지나가는 땅을 조금 매입한 다음 땅을 파 채굴하는 편법과 소송으로 거부가 되었고, 록펠러 소유의 구리회사(Amalgamated Copper Company)와 소송 전에 휘말리자 뉴욕으로 진출, 니키보커 신탁회사(Knickerbocker Trust Company)를 인수하여 금융업을 시작했다.
모수 찰스(Charles W. Morse)는 해양운송업으로 번 돈으로 1897년 초대형 제빙회사를 만들어 시장지배력을 강화한 후 가격을 조작해 막대한 이익을 남긴 기업가이다.
두 사람이 뉴욕에서 만나 금융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작은 금융기관을 인수하고 그 주식을 담보로 다시 대출을 받아 다른 금융기관의 주식을 인수하는 과정을 반복해 뉴욕에 있는 십여 개 은행을 손에 쥐고, 부동산 등 은행의 투자가 금지된 부분까지 발을 뻗친다.
이들이 운영하는 신탁회사는 자산구성, 콜론 시장에서의 자금운용 규모 등에 대한 공개의무가 없기에 재무 건정성이 무너지자 미국 증시에 큰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콜금리가 연 6%에서 연 60%로, 얼마 지나지 않아 연 125%까지 상승하는 지경에 이르자 이를 해결한 것이 J. P. 모건이었고, 이 사태가 이후 ‘연준’ 설립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일련의 역사기록을 분석해보면 ‘연준’의 설립 자체가 음모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미국이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전환하는 시기에 필연적으로 구성된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언제든 사심을 채우려 들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기에 금융 능력이 있다고 민간에게 중앙은행과 같은 공적 임무를 맡겨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권력의 돈주머니로 전락한 많은 중앙은행들을 보면 민간이기에 오히려 유연할 수 있고,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고 보인다.
중앙은행이든 ‘연준’이든 금융과 통화정책은 한곳에서 제어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근본적인 문제는 조절할 수 없는 권력과 독립성의 확보에 있다. 금융정책을 권력이나 집단만의 이익을 위해 쓰지 못하도록 철저한 독립기구가 되어야 한다. 어떤 집단이든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것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지만 그 목적과 방법이 악독하다면 우리 모두에게 고통으로 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