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우 칼럼] 정치인과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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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우 칼럼] 정치인과 유머
  • 이동우 전북논설실장
  • 승인 2019.12.18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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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우 전북논설실장(정치학박사)
이동우 전북논설실장(정치학박사)

[시사매거진/전북=이동우 논설실장] 인생살이가 쉽지않지만, 그래도 일상속의 유머(humour)는 고단한 삶에 활력을 주기도하고 때로는 답답한 인생에 활로를 열어 주기도 한다. 날카로운 설전(舌戰)이 오고가는 정치현장에서 촌철살인(寸鐵殺人)하는 유머는 정치적 긴장이나 갈등을 해소할 뿐만 아니라 여유도 주고 또 문제를 푸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20세기 중국의 문명비평가 ‘린위탕’(林語堂:1895~1976)은 ‘유머감각은 문화생활의 내용을 변화시킬 중요한 요소’라고 했다. 사람을 잘 웃기거나 또 잘 웃으면 실없는 사람이라는 통념이 지금도 통하고 있는 한국이지만, 옛날 우리의 정치인들은 유머감각이 풍부했으며 그 유머로 긴장과 갈등을 해소한 일화도 많았다.

‘오성(이항복)과 한음(이덕형)’으로 잘 알려진 조선 선조 때 정승 ‘백사 이항복’은 유머를 정치현장에서 잘 활용한 대표적인 정치인이다. 오성은 동서간 당쟁으로 국방을 소홀히 하여 임진왜란을 당해놓고도 피난처에서까지 계속 논쟁을 하자, 오성이 한마디 했단다. “우리가 참 큰 실수를 했습니다. 이렇게 싸움을 잘하는 동인들로 동해를 막게 하고 서인들로 서해를 막게 했으면 왜놈들이 어떻게 침략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야 깨닫게 되니 참으로 원통합니다.”

어느 날 공리공론만 일삼는 조정에 이항복이 늦게 나타났다. “대감 웬일로 늦었소?”하고 묻자. “오는 길에 싸움구경 좀 하느라 늦었습니다.” “무슨 싸움이길래요?” “삭발한 승려가 환관(宦官)과 싸우는데 승려는 환관의 신낭(腎囊)을 잡고 환관은 승려의 머리를 잡고 싸우고 있습디다.” 이항복은 소득 없는 당쟁을 이렇게 풍자했다.

전 미국대통령 부인 ‘로라 부시’(아버지 부시)는 TV프로에 출연하여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걸핏하면 크로퍼드(부시의 목장이 있는 곳)로 달려가지만 사실 목장 일은 잘 모른다. 한번은 말 젖을 짜겠다며 수컷과 씨름을 하고 있더라.” 물론, 로라 부시의 이 유머는 치밀한 사전 각본에 의해 준비된 것이지만, 그만큼 유머의 정치적 효과가 크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영화배우 출신 최초의 미국대통령 레이건의 일화 중 하나이다. 1981년 영화배우 “조디 포스터”의 스토커였던 “힝클리”라는 사람이 포스터의 관심을 받기 위해 레이건 대통령에게 총을 발사했다. 급히 병원으로 후송되어 수술대에 오른 레이건 대통령이 간호사에게 윙크를 하면서 한 첫 말이다. “낸시(레이건 대통령 부인)는 내가 이러고 있는 것을 모르겠지?”

수술직전에 의사들에게는 “당신들은 모두 공화당원(레이건은 공화당출신이다)이지요?”라고 농담을 했다. 이에 주치의 답변은 더 멋있다. “대통령님, 우리는 최소한 오늘만은 전부 공화당원입니다.” 이윽고 수술대에서 회복한 레이건은 주위 사람들에게 한 번 더 여유를 부린다. “내가 헐리우드에서 이렇게 저격당할 정도로 주목을 끌었다면 절대로 영화배우를 그만두지 않았을 텐데......”

놀란 가슴으로 병원에 도착한 부인 ‘낸시’에게는 “여보, 내가 총알을 피해 살짝 엎드리는 걸 깜빡했네! 내 양복 중에 제일 비싼 양복인데 구멍이 나서 어떻하지?”라며 안심시켰다고 한다. 위기 시에도 여유를 찾을 줄 아는 지도자의 번뜩이는 유머와 재치가 부럽다.

한국정치는 그동안 여러 측면에서 비약적인 변화와 발전을 이루웠지만, 유머문화는 갈수록 척박해져가는 느낌이다. 지금 한국정치 상황은 ‘상대를 망가뜨려야 내가 산다’는 네거티브 정치전략 때문에 경멸과 조소 일색의 ‘저질스런 유머’만 가득할 뿐, 좀더 여유로운 ‘유머정치’가 발붙일 틈이 없는 듯하여 안타깝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온갖 고난 중에도 은근한 익살과 해학을 즐겼다. 정치 세계에서 그런 전통이 되살아날 수만 있다면, 보다 성숙한 정치문화와 더불어 국민들의 정신건강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대체로 멋없고 이기적인 우리 정치인들에게 성숙되길 기대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유머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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