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심각한 금융위기 타개를 위해 마련한 7,000억 달러 구제금융법안이 의회에서 합의됨에 따라 전세계 금융시장은 일단 안정을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금융권에 만연한 부실채권을 사들이는 구제금융이 금융위기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구심도 만만찮다. 이에 따라 일각에선 ‘구제금융 호재’의 생명력이?그리 길지 못할 것이라는?걱정도 나오고 있다. 이제 구제금융의 성공 열쇠는 미국 정부의 손에 달려 있으며, 복잡하게 얽혀 있는 수백만 건의 부실자산에 대한 적정 매입가격 산정과 관리 능력 등에 따라 ‘부실자산 싹쓸이’를 통한 금융위기 타개라는 구제금융 목표 달성 여부가 좌우될 전망이다. 미국금융시장의 불안은 국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지난 9월초 한국 금융시장을 패닉상태로 몰아넣었던 ‘9월 위기설’은 막을 내렸지만 제 2의 위기설은 상존해 항상 상존해 있다.
9월 위기설은 막을 내렸지만
국내 금융시장을 극도의 혼란으로 내몰았던 ‘9월 위기설’이 거짓으로 판명됐다. 외국인들이 이달 중 만기가 도래하는 6조8,000억 원대의 채권을 팔고 빠져나가면서 환율과 금리가 치솟아 금융대란을 맞는다는 게 위기설의 요체였다. 하지만 9일과 10일에 5조7,000억 원가량의 채권이 전액 상환되면서 위기설은 사실상 소멸됐다.‘괴담’에 불과하다는 것이 중론이었는데도 증시가 폭락하고 환율이 급등하는 등 한바탕 큰 홍역을 치렀다. 이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게 하려면 왜 근거 없는 설에 휘둘려 불필요한 손실을 입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정부의 늑장 대응이 문제였다. 5월부터 위기설이 고개를 들었는데도 정부는 손을 놓고 있었고 집권 여당의 고위 당직자가 앞장서서 위기설을 퍼뜨리기도 했다. 또 9월이 가까워지면서 증시와 외환시장이 더욱 심하게 요동치자 정부는 허겁지겁 진화 작업에 나섰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은 꼴이다.정부 정책이 오락가락한 것도 문제를 키웠다. 집권 초기 수출 증대를 의식해 환율 상승을 유도하다 고유가로 물가가 치솟았고, 민생 문제가 부각되자 물가부터 잡겠다며 황급히 환율 하락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증시에서 외국인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와중에 ‘9월 위기설’이 가세하고 글로벌 달러 강세 현상까지 겹치면서 환율은 강한 상승세를 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시장 흐름에 맞서 환율 개입에 나서 결국 200억 달러의 외환보유액을 축내고 말았다. 외환보유액 감소는 외화 유동성 문제로 옮아 붙어 달러 탈출을 가속화하기도 했다. 물론 경상수지 적자와 내수 부진, 물가 급등, 막대한 가계 대출 등의 불안 요인이 위기설 확산의 배경이기도 했으나 정부의 안일함과 신뢰 상실이 화를 키운 것이다. 위기설은 기우가 됐지만, 글로벌 신용경색으로 국내 금융시장은 당분간 불안 상태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이 와중에 정부가 불안 해소에 앞장서려면 신뢰 회복이 우선돼야 한다.
일부 해외언론도 부정확 보도로 위기 과장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와 더 타임스 등 일부 해외 언론이 한국경제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으면서 한국경제 위기설에 대한 불안감이 필요 이상으로 확산되었다.
전문가들은 언론이 경제를 부정적으로 보도하면 일정한 시점이 지난 뒤 경제가 실제로 나빠지는 ‘미디어 맬러디(malady·병폐) 효과’가 발현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우려했는데, 더 타임스는 지난 9월 1일 HSBC 아시아담당 이코노미스트의 발언 등을 인용해 “한국이 검은 9월로 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국제통화기금(IMF) 한국사무소장인 메랄 카라술루는 더 타임스가 지적한 적정 외환보유액과 관련해 “IMF는 더 타임스가 보도한 적정 외환보유액 기준인 수입액 9개월 치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HSBC도 “더 타임스가 인용한 HSBC 이코노미스트는 ‘위기가 아니다’라고 밝혔는데 기사에서 발언의 진의가 왜곡됐다”면서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1일 더 타임스에 정정보도를 요청했다.
앞서 파이낸셜타임스의 한 칼럼도 ‘1997년으로 되돌리기(rewind)’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외환보유액과 가계부채, 은행들의 유동성 부족 등을 문제 삼았었다. 1997년의 외환위기도 당시 한국의 경제상황을 과장해 비관적으로 보도한 일부 해외 언론 때문에 위기가 증폭된 측면이 있었고, 이 때문에 외환위기의 원인과 관련해 ‘서방 언론과 투기자본이 공모한 음모설’이 확산되기도 했다.
일부 국내 언론의 경우에도 긍정이나 부정의 양 측면이 있을 수밖에 없는 환율 등 경제변수나 경제정책과 관련해 비관적으로만 보도하는 일이 없지 않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연구원은 “외신들의 위기설 관련 보도는 일부 언론에 한정된 것인데 한국 언론이 이를 비중 있게 보도하면서 실제보다 과장되게 전달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9월 위기설’ 누가 웃고 누가 울었나
금융, 외환, 증권시장을 뒤흔들었던 ‘9월 위기설’이 싱겁게 소멸됐다. 9월 10일 만기가 된 외국인 보유 국고채 5조6,827억 원어치는 전액 상환됐다. ‘외국인들이 투자액을 회수해 한국을 떠날지 모른다’던 설과는 달리 이틀간 8,047억 원어치를 순매수했다. 위기설이 한창이던 이달 중 외국인은 오히려 ‘바이(buy) 코리아’에 나서 2조 원 넘게 순매수했다.작년 말 처음 흘러나온 금융시장 위기설은 5, 6월 나쁜 경제지표와 악재성 국내외 변수들을 배경으로 힘을 얻었다. 정부와 전문가들이 “과장됐다”고 거듭 설명했지만 위기설이 사라지지 않아 결국 이달 초 환율이 급등하고 주가는 폭락했다. 이 때문에 혼란을 겪고 손해를 본 기업과 투자자가 적지 않았다. 또한 국내 시장 참여자들이 위기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이에 외국인투자가들은 재미를 보았다. 외국인의 조달금리는 떨어지고 국고채 금리는 올라 거래 차익이 7월에 비해 1%포인트 커졌기 때문이다. 위기설 소동은 정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탓도 크다. 정부가 투자부진, 고용부진, 물가폭등이라는 3중고에 허덕이면서도 ‘선방했다’고 자평한 것은 시장이 체감하는 상황을 모르거나 무시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실시간으로 해외 요인들의 영향을 받고 있는 한국시장에서 비이성적인 ‘설’에 국부를 축내는 일이 다시 일어나선 안 될 것이다.
세계금융시장의 불안, 정부대책 시급
리먼브러더스 등 대형 투자은행(IB)의 몰락으로 촉발된 미국의 금융위기가 국내 금융시장을 강타하자 정부는 다각도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글로벌 신용경색이 외환·주식시장을 뒤흔들 뿐 아니라 경기침체와 상승 작용을 일으켜 흑자도산 기업이 출현하는 등 실물경제로 미칠 조짐을 보이자 이를 차단하는 데 전력을 쏟고 있는 모습이다. 정부는 최근 외화유동성 공급과 주식 공매도 제한 등 시장 안정책을 내놓은 데 이어 경영여건 악화 때문에 벼랑 끝으로 몰리는 중소기업을 살리는 방안을 찾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 신용경색이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여 금융시장이 안정 궤도에 들어서고 기업들이 숨통을 트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정부는 미국발 금융위기로 가장 심각한 것이 달러 품귀사태라고 판단하고, 국내 외환시장에 보유달러를 대거 풀기로 했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9월 26일 외국환평형기금을 통해 외환스와프 시장에 10월까지 100억 달러 이상의 달러를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국제 금융시장의 신용경색으로 중장기 외화 차입에 이어 단기 차입까지 막혀 은행들이 심각한 외화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고, 달러난으로 외환시장이 패닉 상태에 빠지면서 원-달러 환율의 급격한 상승을 부추기는 점도 고려한 것이다.정부의 이번 대책으로 당장 금융권의 외화자금 확보에는 한숨을 덜 수 있게 됐지만 글로벌 신용경색이 풀리지 않는 한 자금난이 재연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또한 자금 회수에 나선 외국인 투자자의 매도 공세로 출렁거리는 주식시장의 안정책도 내놓았다. 그것은 10월 13일부터 공매도가 집중된 종목에 대해 10일간 공매도를 금지하고, 증권사들이 투자자의 공매도 주문을 처리할 때 결제 가능 여부를 반드시 확인하도록 하는 등 규제를 강화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특히 외국인 투자자의 과도한 공매도로 인한 증시 불안을 막기 위한 것으로,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의 공매도 규제 강화에도 보조를 맞춘 것이기도 하다.
정부, 신뢰 받을 수 있는 정책 펴야
통화옵션상품인 ‘키코’에 가입한 기업들의 피해가 커지는 가운데 원-달러 환율이 1,200원으로 오르면 키코 피해 중소기업의 70% 가량이 부도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중소기업중앙회의 조사 결과도 나왔다. 중소기업들이 무너질 경우 대출이 부실화되면서 금융회사의 건전성이 악화되고, 금융시장의 불안을 가중시킬 것으로 우려되고 있는 가운데, 정부는 이에 따라 은행들이 주축이 돼 키코 피해 중소기업에 대해 신규 자금의 선별 지원이나 대출 만기 연장 등에 나서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하면서 중소기업 업계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보증 확대, 정책자금 지원 등 다양한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전문가들은 정부의 대책들이 금융시장의 불안 심리를 진정시키는 데에는 기여하겠지만 외화유동성과 중소기업 문제 등이 미국의 금융위기와 실타래처럼 얽혀 있어 한계는 있을 것으로 평가하며, 국내 금융시장의 안정은 결국 미국의 금융불안 해소 여부에 달렸다고 입을 모았다. 이런 상황에서 위기관리 대책을 강화하고 새 정부 초기에 실패한 환율 정책을 교훈삼아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정책을 펴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LG경제연구원은 “심리적 불안이 경제위기설로 번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현재까지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외화유동성 부문 등에서는 효과를 보고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중요한 것은 미국의 구제금융 조치”라며 “이것이 잘 해결되면 환율이 안정되고 중소기업의 환차손 문제도 다소 완화되면서 전반적인 유동성도 개선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부가 ‘9월 위기설’로 금융시장이 요동칠 때부터 낙관적인 전망을 하다가 뒤늦게 대책을 내놨다는 지적도 있다. 미 신용경색 여파로 한달새 10조 유출파산보호 신청을 한 리먼브러더스 채권을 보유한 국내 증권사에 대한 유동성 부족설이 불거지면서 국내 채권시장에 미국발 신용 경색의 여파가 몰아치고 있다. 채권 매도세로 채권 값은 하락, 국고채 금리는 상승하고 단기금융상품인 머니마켓펀드(MMF)에서는 자금이 빠져나가는 찬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MMF는 금리가 높은 만기 1년 미만의 기업어음(CP), 양도성예금증서(CD) 등 주로 단기금융상품에 집중 투자하는 상품으로 채권시장 전문가들은 “국내 증권사들이 보유한 리먼브러더스 관련 채권이 3,000억 원 정도에 불과해 회사의 건전성에 악영향을 줄 정도는 아닌데도 과도한 불안심리가 시장을 경색시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9월 위기설’이 한창이던 지난 9월 2일 5.97%까지 치솟았다가 추석 직후인 16일 5.49%로 내려간 뒤 리먼브러더스 사태가 터진 이후 다시 급등했다. 채권시장이 요동치기 시작한 것은 미국발 금융위기가 고조된 9월 18일 이후로 국내외 신용 경색의 우려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콜자금 차입이 어려워진 일부 증권사가 단기자금 확보를 위해 단기물을 시장에 내다팔면서 채권 값 하락을 부채질했다. 단기자금시장 경색과 증권사의 단기채권 매도 증가로 채권 금리 상승이 지속되면 MMF를 비롯한 채권형펀드의 손실 가능성이 커져 대량 환매가 시작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도 7월 중순 86조5,000억 원이었던 국내 MMF의 순자산총액은 9월 22일 현재 68조6,000억 원 수준까지 감소한 상태다. 특히 8월 22일 78조9,420억 원이었던 MMF 순자산총액은 한 달 만에 10조3,420억 원이 유출됐다. 하나금융연구소의 수석연구원은 “시중금리가 계속 오르면 MMF 손실 규모가 확대돼 대량 환매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면서도 “하지만 한국은행의 추가 유동성 공급, 풍부한 시중유동성, 경기 둔화에 따른 금리 하락 전망 등을 고려할 때 과거와 같은 대규모 환매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