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매거진 259호=이회두 기획편집국장] 우리나라의 서해를 중국에서 바라보면 동해라고 말한다. 어디에 서서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같은 대상을 동과 서라는 상반된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일한 상황을 ‘판단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평가하기도 한다. 같은 사건이라도 보는 관점에 따라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좋다 나쁘다의 식으로 극과 극으로 나뉘게 된다.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도 관점의 차이가 극명하다. 몇 마디 단어로 그분들의 공과를 표현하기는 어려운 일이기에 선거와 관련된 객관적인 자료들을 통해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를 정리해본다.

제1대 대통령 선거 <암살로 얼룩진 정치계>
초대 대통령은 제헌국회에서 무기명 투표로 선출되었다. 신탁통치 찬반 등 격랑 속에서 유엔 주도로 1948년 5월 10일에 치른 총선을 통해 헌법을 만들고 대통령을 선출할 국회의원을 198명(정원 300명이나 북한지역 100개 의석을 비워두었고 2석의 제주도에서는 선거를 치르지 못함)이 선출되었다.
이 선거는 투표율이 95.5%나 될 정도로 국민의 관심이 높았다. 제헌국회는 헌법을 만들고, 같은 해 7월 20일 당시 헌법 제53조에 의거하여 대통령과 부통령을 국회에서 무기명으로 투표하는 간접선거가 실시되었다. 별도의 후보자는 없었고, 각 의원들이 지지하는 인물을 직접 써서 제출하는 방식으로 선거가 치러졌다.
대통령 선거에는 196명이 출석하였고 이승만은 180표를 얻어 제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분단에 반대했던 김구 선생은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출마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선거에서는 그를 지지하는 13표가 나왔다.
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서는 재적의원 200명에 134명 이상이 출석해야 하고, 출석의원의 3분의 2이상의 찬성표를 얻어야 하는데, 당시 부통령 선거에는 197명이 출석했고 1차 투표에서 132표 이상의 득표를 얻은 후보가 없어 2차 투표 끝에 이시영이 당선되었다. 역시 출마하지도 않은 김구 선생이 62표를 얻었다.
한국이 일본의 패망으로 해방을 맞았을 때, 국내외를 막론하고 최고의 정치적 명망가는 이승만이었다. 구한말 개혁세력의 일원이고,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그가 항일구국의 오랜 망명생활에서 돌아 왔을 때, 정치성향의 좌우를 막론하고 누구도 그의 명망을 따를 수 있는 지도자는 없었다고 한다.
해방 직후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인민공화국이나 그의 적대 세력이었던 한민당조차 귀국도 하지 않은 그를 지도자로 추대할 정도였으니 이승만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것은 대부분 예측한 결과이다.
물론 다른 관점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존 하지 미군정 장관이 미국 정부에 보낸 극비 보고서를 요약해보면 당시의 지도자급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드러난다. 몽양 여운형이 해방 직후 여론조사에서는 조선을 대표하는 정치인 1위로 꼽힌 것이다.
당시 보고서에는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로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박헌영 16%, 김일성 9%, 김규식 5%. 생존 인물 가운데 최고의 혁명가로, 여운형 20%, 이승만 18%, 박헌영 17%, 김구 16%, 김일성 7%, 김규식 5%. 당장 대통령선거를 할 경우 1등은 여운형, 2등은 김구, 3등은 이승만 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초대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거물 정치지도자들이 암살을 당했다. 특히 국제정세에 밝고 우리나라의 장래를 위해 헌신한 몽양 여운형을 비롯해 송진우, 장덕수, 김구 등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을 ‘암살’이라는 방식으로 잃게 된 것은 우리 역사에 커다란 손실일 수밖에 없었다. 그 배후가 누구인가는 아직도 의문점이 남아 있다.
이렇듯 제대로 된 독립이 아닌 해방을 맞은 우리나라는 강대국들의 횡포에 대처하지 못한 채 좌파 우파의 편 가르기 속에 힘을 잃고 있었고, 정치계는 암살과 암투로 얼룩진 채 7월 24일 이승만 대통령의 취임식이 거행되면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수립이 국내외에 선포되었다.

제2대 대통령 선거 <집권자에 의해 휘둘린 선거제도>
제2대 대통령은 국민들이 직선제로 선출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선거정치는 한국 정치의 민주화와 선거의 제도화에 중요한 함의를 갖는 유산을 남겼으며 이들 가운데 부정적인 부분은 극복되어야 할 것도 있다.
제1공화국 아래서의 선거제도의 변화와 선거과정은 이승만대통령과 주로 적극적인 친일행적을 가진 측근들에 의해 정치권력의 연장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제1공화국의 선거제도는 두 번의 개헌 두 번의 국회의원선거법 개정, 그리고 네 차례에 걸친 지방자치선거법의 개정을 통해 변화하였다.
제1공화국 시기에 실시된 전국적인 선거는 대통령 선거 3회, 국회의원 선거 4회였고, 2회에 걸친 지방자치 선거가 있었는데 선거라는 낯선 제도를 국민의 정치 참여의 수단으로 확고하게 국민들에게 각인시키는 바탕이 된 긍정적인 면도 있다.
제1공화국의 중요한 정치적 갈등의 대부분은 개헌과 선거법 개정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는데, 장기집권을 위해 직선제라는 선거제도를 들고 나왔건만 거꾸로 부정선거로 인해 정권이 무너진 것은 역설적이라 하겠다.
제헌국회가 2년의 임기를 마치고 제2대 국회가 구성돼 중도파를 비롯해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제도권에 들어오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독주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국회는 이승만 정권의 독주를 견제할 입법 조치들을 통과시켜 갔고, 그때마다 번번이 이승만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며 국회를 맹비난했고, 거창 양민학살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이 발생하자 정부의 실정에 대해 국회가 앞장서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대통령과 국회는 더욱 더 날선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초대 대통령 임기가 1년여 남은 시점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지지 세력들은 재임을 위해 철저한 준비로서 1952년 1월 대통령·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직접 선거제를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이 개헌안이 찬성 19표, 반대 143표로 부결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전쟁 중임을 내세워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발췌개헌안을 만들어 같은 해 7월 4일 일어서서 찬성을 나타내는 황당한 공개투표로 직접선거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선례는 집권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선거제도의 개정으로 이후 한국 정치사에서 거의 일관된 방식으로 반복되는 악순환으로 나타난다.
선거법을 직선제로 개정한 것은 당시 선거라는 방식에 생소한 국민들에게, 왕조에 익숙한 우리 국민들에게, 이승만이 조선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의 서자 장평도정 이흔의 16대손인 왕족의 후손이라는 점이 먹힐 것으로 본 전략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불출마를 선언한 후 지지자들의 여론을 등에 업고 마감일인 26일 5시에 후보자등록 승낙서를 제출한 이승만은 결과적으로 재선에 성공하게 된다. 더불어 부통령에서 떨어진 이범석이 밀려나고 이기붕이 등장한 시기이다. 이런저런 문제 속에 제2대 대통령선거는 우리나라 최초로 직선제 투표를 통해 최고지도자가 선출된 의의를 가진다.

제3대 대통령 선거 <정권유지에 급급한 정치권에 대한 환멸, ‘사사오입개헌’>
당시 대통령은 중임이 가능한 4년제로 법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출마할 수 없었다. 1954년 자유당은 4년 임기의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을 없애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개헌을 추진한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원내 다수를 차지한 자유당은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개헌을 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김두한 의원이 서명을 거부하자 무소속 윤재욱 의원을 끌어들여 총 136명의 서명을 받아 발의했다.
그런데 같은 해 11월 27일, 국회 표결 결과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라는 결과가 나왔다. ‘재적의원 203명 중 2/3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가결정족수(可決定足數)는 135.333…명이다. 이에 따라 당시 국회부의장 최순주(자유당 소속)는 부결을 선포했다.
그런데 이틀 후 자유당은 당시 대한수학회장 최윤식 교수까지 내세우며 사사오입, 즉 반올림을 하는 것이 맞는다는 주장을 내세워 정족수를 135명으로 하여 가결된 것으로 정정 선포하였다. 방청석에는 드라마에서 정치깡패로 등장하는 자유당 감찰부장인 이정재 차장의 이른바 동대문 사단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956년에 실시된 제3대 대통령선거에는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으로 자유당은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에 신익희, 부통령 후보에 장면을. 진보당은 조봉암과 박기출을 후보로 내세웠다.
독립운동가로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고 1954년 김성수, 조병옥, 윤보선, 장면, 박순천 등과 함께 호헌동지회와 민주당 창당에도 참여하는 등 야권 지도자로 활약하는 해공 신익희 선생(1894~1956년)은 이승만에게 강력한 도전자였다.
신익희 선생은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19살 무렵인 1913년 윤홍섭, 장덕수 등과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나눠 마시며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한 독립 운동가이자 민주당을 창당한 정치인이다. 선생은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왜병과 싸우다 순절한 무장 충장공 신립의 후예이며 신사임당도 평산 신씨로 선생의 가문이다.
해방 후에도 선생은 인재양성을 위해 ‘국민대학교’를 설립하고, ‘자유신문’을 발행하는 등 조국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선생의 형 신재희 부부와 그의 아들인 해균·양균·용균과 딸 계순 모두 독립운동에 삶을 바쳤다.
신익희 선생의 장남 신하균(1918∼1975년) 역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자신의 부친이 1950년대 민주당 중앙당사의 간판을 썼듯이 1960년대 민중당 중앙당사 간판에 필적을 남겼다.
신익희 선생이 강력한 도전자이기는 했지만 당시 야당이 승리를 바라보려면 후보를 단일화할 필요가 있었다. 협상 끝에 조봉암이 후보직을 사퇴하고 신익희를 지지해주되, 차기 대선 때는 조봉암이 야권 단일 대통령 후보를 하도록 하자는 내용의 합의가 도출되었다.
그러나 이 합의가 발표되기도 전인 5월 5일 호남지방으로 유세를 위해 전북 이리로 향하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졸도한 신익희는 끝내 사망하였고, 단일화 합의 또한 무용지물이 되었다.
당시에 무려 30만 명이 운집했다는 한강 백사장 유세, 서울역에 그의 유해를 마중 나온 군중들, 죽음 직후 ‘비 내리는 호남선’앨범이 미친 듯이 팔려나간 일화, 사후에 진행된 선거에서 나온 185만장의 무효표가 해공에 대한 국민들의 추모의 마음을 보여준다.
신익희 후보가 사망하는 급작스런 사태에 민주당은 5월 8일부터 “민심은 살아 있다. 장면 박사에게 표를 모으자”라는 새 구호 아래 부통령 선거에 총력을 기울인 결과 장면이 이기붕을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부통령에 당선된다.

선거 전날인 5월 14일에는 진보당의 조봉암 후보가 거국일치 정부, 내각책임제 개헌, 평화적 국토 통일을 촉진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안간힘을 썼지만 선거 결과 이승만은 504만여 표, 조봉암은 216만여 표를 얻었고 언급한 것처럼 185만 표의 무효표는 대부분 신익희 선생의 추모표로 여겨진다.
사사오입 억지개헌까지 저지르며 진행된 선거임에도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11.3%였던 득표율에서 두 배가 넘는 30%의 득표율을 기록한 조봉암의 선전은 조봉암에게 협조를 하지 않았던 민주당은 물론이고 특히나 자유당을 자극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생의 절반 이상을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운 투사(鬪士)였으며, 해방 후 통일과 민주주의를 고민한 죽산 조봉암 선생은 후일 이승만 정권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밝혀진 ‘진보당사건’으로 1959년 7월 31일 사형을 당하게 된다. 선거에서 선전을 한 것이 오히려 헌정사상 최초의 ‘사법살인’으로 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