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침체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수치로 나타난 지표보다 체감경기는 더 나쁘다. 최근의 경기 침체는 단지 경기순환에 따른 불경기가 아니라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흐름’일 수도 있다는 견해도 많다. 국내 기업들의 설비 투자도 얼어붙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기업의 설비 투자 정도를 보여주는 제조업 유형자산 증가율은 지난해 -1.8%를 나타내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70년 이후 가장 낮았다. 유형자산 증가율은 91년부터 98년까지 매년 11∼20% 수준을 유지해 왔지만 99년 이후 크게 낮아져 2001년에는 -1.5%까지 추락했다. 자칫 ‘성장엔진’이 꺼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기업 투자부진과 장기화되고 있는 청년실업 등이다. 한국 경제의 현 위치는 어디이며 갈 길은 어느 쪽인가.
현 경제상태를 두고 재정경제부 등 경제부처에서는 ‘경기는 순환하기 마련이고 지금은 침체국면일 뿐’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안이한 진단이라는 것이 많은 경제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물론 지표도 심각한 수준이다. 최근 몇 개월 동안 경제성장률, 생산 및 도소매 증가율, 기업 및 소비자 심리 등 각종 주요 경제지표들은 바닥으로 내려앉고 있다. 여기다 수치로 드러나지 않는 ‘정부 정책’요인은 지표들보다 더 큰 불안변수로 꼽히고 있다. ‘위기’론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
왜 투자를 안 하나
그렇다면 기업은 왜 돈을 쥐고만 있을까. 무엇보다 경기전망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내수부진과 함께 기업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아직 가시지 않고 있는 것. 이라크전쟁이 단기에 종결됐지만 세계 경기는 본격적인 회복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여기에 북핵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고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에다 최근의 물류대란까지 겹쳐 국내 기업들의 투자 심리가 얼어붙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성장산업이나 투자수익률(ROI)을 맞출 만한 투자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도 핵심적인 요인. 화학과 건설이 주력업종인 이수그룹은 최근 21세기를 이끌어갈 새로운 사업모델을 찾느라 고민이다. 한 전문가는“공장에서 원가 절감 운동을 해 생산 단가를 아무리 끌어내려도 중국 업체가 시장에 들어와 시장가격이 한꺼번에 30%씩 떨어져 버리는 상황을 견디기 어렵다. 국내 인건비가 중국의 7~10배까지 되는 상황에서 설비를 늘려’규모의 경제’를 통해 원가경쟁력을 얻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대신생명 인수를 통해 금융업 진출을 노리던 이수그룹은 국내에서 다른 업종의 제조업체에 대한 인수합병(M&A)을 추진하는 한편 호텔이나 레스토랑 등 고급 서비스업종 진출도 모색하고 있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ROI를 따지는 과학적 투자관행이 자리잡고 있는 것도 투자를 까다롭게 하는 요인이다. ROI는 기업 순이익을 투자액으로 나눈 값으로 단위 투자를 통해 얼마나 이익을 냈는지 살펴보는 경영지표. 투자성과를 꼼꼼히 따지다 보니 과거처럼 사업을 무모하게 벌여놓는 투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요인이 있다. 국내 대기업의 한 임원은 “정부가 재벌이나 노사문제와 관련해 기업을 위축시키는 언행을 불필요하게 많이 해 투자심리가 얼어붙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기업할 의욕을 툭툭 꺾어놓는다는 것이다.
해외진출 러시
국내에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다 보니 신규투자가 국경을 넘어간다. 제조업의 해외진출 러시다. 실제로 지난해 말부터 국내 대기업의 해외공장 추진 발표가 줄을 잇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국내에서 생산설비 투자를 늘릴 계획이 없다는 점. 미국 앨라배마에 현지 공장을 건설 중인 현대자동차가 대표적인 경우다.
제조업 위주로 사업을 확장해온 H그룹 계열사의 한 사장은 최근 “앞으로 2, 3년간 제조업에 대한 투자를 유보키로 했다”고 밝혔다. 중장기적으론 금융업 중심으로 사업구조를 재편하면서 제조업 비중을 축소할 계획이다. 그는 “제조업으론 수익률을 맞추기가 너무 어렵다. 장기적으로 제조업에선 ‘세계 톱 10’수준의 메이저 업체가 아니라면 살아남기 힘들 것으로 본다”고 털어놓았다.
제조업체가 국내생산으로 경쟁 우위를 확보하기 힘들 경우 해외로 눈을 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해외진출은 무역장벽을 피해가는 해법이기도 하다. 제조업의 생산기지 해외이전은 미국과 일본에서도 이미 경험했던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무런 보완책 없이 해외로 빠져나가다 보니 국내총생산(GDP)이 낮아지고 실업 문제가 불거지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 개별기업으로서는 합리적인 판단을 했지만 국민경제는 침체하는 ‘구성의 오류’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고비 맞은 중소기업 -
경기침체로 가중되는 어려움
국내 최대의 컴퓨터 자수업체인 하이텍인터내셔널의 경기 성남시 공장. 5대의 기계 가운데 3대가 멈춰서 있었다. 휠라코리아 등의 로고를 새기는 이 공장의 가동률은 올 들어 20%를 넘어선 적이 거의 없다. 직원도 반나절 근무와 무급휴가로 돌려 25명의 직원 가운데 10명만 출근했다. 해외 ‘큰손 고객’의 주문이 생산비가 싼 중국과 동남아로 급격히 옮겨갔기 때문. 10년 동안 자동화에 7억원을 투자해 직원을 45명에서 25명으로 줄이는 등 원가를 70% 낮췄지만 여전히 중국의 3배다.
한상원(韓相元·50) 사장은 “급히 만들어야 할 때만 한국에 주문한다”며 “사업을 그만둘 것인지, 공장을 해외로 옮길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듯 국내 중소기업들이 흔들리고 있다. 노동집약적 산업에선 중국 등 저임 경쟁국에 뒤지고 기술집약적 산업에선 대기업과의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기 때문. 여기다 경기침체는 내성(耐性)이 약한 중소기업에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제과회사의 협력업체인 A사(충남 논산시)는 작년까지 주·야간으로 돌리던 생산라인 8개 가운데 3개만을 가동한다. 야간 근무도 없앴고 공장 직원도 120명에서 60명으로 대폭 줄였다. 월간 매출이 절반으로 떨어졌고 마진도 크게 낮아졌다. 올 예상 순이익은 최근 수년 동안 꾸준히 낸 10억원대의 10% 선.
대형 유통업체들이 내세운 ‘가격파괴’와 ‘최저가격 정책’은 큰 타격이다. 김모 사장(54)은 “묶음으로 팔면서 가격을 절반으로 낮추도록 요구하고 각종 명목의 비용부담을 만들어 납품업체에 떠넘긴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황금어장’으로 통하던 중국 내수가 급랭한 것도 문제. 대표적인 품목인 휴대전화는 작년 6200만대에서 올해는 7200만∼8700만대가 수출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가격이 급락해도 재고가 쌓일 정도로 판매가 부진하다.
휴대전화 생산업체인 C사의 충북 공장엔 평소 재고 물량인 1만∼2만대를 크게 웃도는 10만여대가 창고에 쌓여 있다. 작년엔 500여명의 공장 근로자들이 연일 야근과 연장근무를 했지만 지금은 인원 감축을 고려하는 형편이다. 이 회사의 한 임원은 “국내 5대 휴대전화 생산업체를 제외하면 자금 융통이 잘 안될 만큼 어렵다”고 말했다.
가중되는 자금난, 인력난
경남 김해시 S기계 양모 사장(50)은 시간이 날 때마다 부산 경남지역의 대학 홈페이지에 접속해 직접 직원채용 공고를 낸다. 최소 30명은 있어야 공장을 유지할 수 있지만 현재는 22명에 불과하다. 양 사장은 “대학 출신 엔지니어를 구하기도 어렵지만 입사 1년 내에 중도 하차하는 일이 잦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연구원 서정대(徐正大) 부원장은 “중소제조업의 평균 인력 부족률은 9.41%로 총 20만명을 웃돈다”며 “중소기업들은 인력난을 최대의 어려움으로 꼽는다”고 말했다.
경기 의정부시에 있는 신동섬유의 김순희(金順熙·50) 사장은 요즘 밤잠을 설친다. 3개월 전 취업한 외국인 연수생 6명 가운데 4명이 회사를 떠나 해외 주문에 못 댈 처지에 놓였다. 하루 9시간을 일하면 먹고 자면서 85만원을 받지만 더 좋은 조건이 나오면 쉬 떠난다.
여기다 최근 들어서는 자금난까지 다시 불거지고 있다. 가계대출 부실 등으로 금융기관의 경영환경이 열악해지면서 대출조건이 깐깐해진 탓.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는 269개 중소기업을 설문조사한 결과 △82.7%가 외상대금의 지불을 지연한 적이 있으며 △27.3%가 직원들의 봉급 지급을 지연한 적이 있는 등 자금사정이 나빠진 것으로 응답했다고 밝혔다.
일단 현찰로 쌓아두고 본다
기업이 투자를 해줘야만 건전한 성장도 가능하고 부동(浮動) 자금을 흡수하면서 부동산 투기 우려도 줄어든다. 하지만 갈수록 기업 투자는 위축되고 있다. 중견기업의 최모 사장은 “일단 현금을 쌓아 놓고 투자기회를 보고 있지만 국내에는 수익성 있는 사업이 없는 것 같다”며 “중국과 동남아 등에서 신규투자 기회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은행 예금이 단기화하다 보니 기업 빚도 단기화하고 있다. 은행 대출 가운데 장기 설비투자자금 비중은 98년 16.8%에서 2003년 1월 11.6%까지 떨어졌다. 단기자금 대출비중은 98년 82.9%에서 1월에 88.3%까지 올라갔다.
굿모닝증권의 ‘차입금 기간구조와 장기 회사채’ 보고서에 따르면 금융업을 제외한 분기보고 대상 941개 기업의 전체 차입금 가운데 만기 1년 미만의 단기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99년 4·4분기 40.7%, 2000년 4·4분기 45.5%, 2001년 42.0%로 40%를 웃돌고 있다. 해마다 전체 차입금의 40%를 갚거나 차환 발행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정기 우리은행 기업영업 지점장은 “성장이란 번데기 상태인 자금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자본, 즉 나비로 바뀌어 움직이는 것”이라며 “지금처럼 돈이 번데기 상태에 머무른다면 기업 활동이 위축되면서 국민경제가 주저앉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채권-금융상품 활성화 기업으로 돈물꼬 돌려야
400조원으로 추산되는 시중의 단기자금이 부동산 쪽으로 흐르자 정부도 비상이다.
금융연구원 박재하(朴在夏) 연구위원은 “개인들이 여윳돈을 다양한 금융상품과 채권에 투자하고 이 돈이 산업자금으로 흘러야 하는데 이 흐름이 막혀 있다”며 “이는 금융권의 자금중개 기능이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카드회사 부실과 SK글로벌의 분식회계로 촉발된 금융시장 혼란에다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불안감이 겹치면서 시중자금이 혈관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LG경제연구원의 신민영(申민榮) 박사는 “실질금리가 마이너스로 떨어지면서 이자소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까지 부동산 쪽으로 몰려가고 있다”며 “경제주체들이 경제 전망과 금융시장에 대해 불안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자금의 선순환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이라고 말했다.
메릴린치의 이현승 컨설턴트는 “당국은 최근 금리인하로 돈을 푸는 방법을 썼지만 이 돈은 부동산을 자극할 가능성이 높다”며 “돈의 총량(volume)이 아니라 돈의 흐름(channeling)이 진짜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금리를 유지해 부동산을 안정시키는 대신 경기는 재정정책으로 부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경련의 한 고위간부는 “기업에 왜 투자하지 않느냐고 묻기 전에 투자를 망설이는 근본원인을 없애야 한다”며 “적어도 노사문제에 대해 마음을 놓게 되고 정부정책의 일관성과 투명성을 회복하는 것이 병을 고치는 확실한 처방”이라고 강조했다.
신 박사는 “기업과 금융 분야의 구조조정이 마무리되면 채권시장 활성화라는 각론으로 접근해야 돈의 흐름이 원활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채권시장 활성화는 시중에 떠다니는 부동(浮動)자금을 흡수할 수 있는 실현 가능한 대안이라는 것.
정부도 자금의 선순환이 시급하다고 판단, 시스템 보완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이정재(李晶載) 금융감독위원장은 “5년 동안 기업여신이 2∼3%밖에 안 늘었다”며 “이는 한국경제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는 요인”이라고 진단했다. 이 위원장은 “감독당국에서 기업여신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걸림돌을 없애는 정책을 마련 중”이라며 자금의 선순환이 하반기 금융정책의 우선순위가 될 것임을 예고했다.
무너지는 벤처, 가중되는 자금난
테헤란밸리 인근의 게임 전문 벤처기업 A사. 지난해 초만 해도 코스닥 등록을 앞둔 유망한 기업이었지만 10개월째 일손을 놓고 있다. 지난해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 전원이 부실경영을 책임지고 물러난 뒤 업무가 마비된 것. 400명에 이르던 직원도 뿔뿔이 흩어졌다. 2년 전 400억원대에 이르던 보유 현금이 바닥난 것은 물론 자본도 잠식됐다. 하지만 뾰족한 수익원을 찾지 못해 새 경영진은 한숨만 쉬고 있다.
박사와 연구원 등 고급인력이 많아 알짜 벤처기업이 많은 대덕밸리도 어렵기는 마찬가지. 지난해 말부터 연간 1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던 H사를 비롯해 신소재 개발업체인 S사, MP3 제조업체 O사 등 대표기업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강원 춘천시 테크노파크는 당초 애니메이션 벤처단지를 표방했으나 벤처 한파를 거치면서 생명과학단지로 변신을 모색 중. 인천에서는 인천인터넷기업협회 소속 33개사 가운데 3개사가 문을 닫은 데 이어 올 들어 3, 4개 업체가 부도 위기에 몰려 있다.
인터넷 솔루션업체인 C사는 최근 거래 은행에 대출금을 급히 갚느라 어려움을 겪었다. 이 회사 사장 L씨는“작년만 해도 돈을 빌려주겠다는 금융기관들이 많았는데 올해는 빌려준 돈을 무조건 회수해가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백종태 대덕밸리 벤처연합회장은 “대덕밸리 벤처기업의 상당수가 금리를 최고 연 17%까지 높여내는 조건으로 대출기한을 연기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이처럼 부실 벤처가 늘어난 것은 이제까지의 벤처정책이 양적 성장 중심으로 흘렀기 때문. ‘제대로 된 이익모델을 갖춘 기업은 몇 개 안된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돈벼락에 벤처정신을 잃어버린 기업들은 물건을 팔아 이익을 남기기보다는 주가를 띄워 뻥튀기하는 ‘머니 게임’에 심취하기도 했다.
정현준 진승현 사건에서 보듯 벤처정신이 없는 ‘무늬만 벤처’ ‘엉터리 벤처’들이 물을 흐려놓은 것도 벤처 전반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중요한 이유. 기술자 출신의 벤처기업가가 경영엔 문외한이어서 부실이 쌓이기도 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이인찬 산업연구실장은 “그러나 어려움에 처한 벤처기업이 많다는 점보다는 유망한 기업에 적절한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밝혔다. 벤처기업의 성공 확률은 3%라고 하는데도 부실한 벤처기업들이 제때 퇴출되지 않아 벤처산업 전체에 불신이 누적됐다는 지적. 장흥순 벤처기업협회장은 “벤처 토양이 건전해지려면 부실한 기업이 원활히 퇴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벤처 컨설팅업체 AT그룹의 배재광 사장은 “창투사가 130개 정도 되지만 90% 정도는 부실이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좋은 벤처와 나쁜 벤처를 가리는 심판 역할을 해야 할 창투사부터 ‘선구안’이 없었던 것이다.
증시 침체의 끝은 어디
증시침체가 1년 이상 장기화되면서 주식투자자들도 신용불량과 우울증 등에 시달리고 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사는 C씨는 지난해 11월 초 아내를 목 졸라 숨지게 한 뒤 스스로도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 자살엔 실패했지만 단란했던 신혼살림은 송두리째 망가졌다. 주식투자로 1억원 이상을 날리면서 진 빚 때문이었다.
외환위기 직후 회사를 그만둔 뒤 뾰족한 일자리도 없어 자의반 타의반으로 ‘전업 주식투자자’가 된 경기 고양시 일산의 K씨도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잔다. 1999년부터 2000년까지는 월급쟁이 때보다 더 벌었지만 증시가 가라앉으면서 원금을 거의 모두 날린 것이다. 7000만원으로 시작해 한때 2억원으로 불었지만 지금 남은 돈은 750만원 정도.
증시가 1년 이상 장기 침체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피눈물을 흘리는 투자자들이 늘고 있다. 개별 종목별로는 더욱 참담하다. 거래소에서 이 기간에 주가가 조금이라도 오른 종목은 94개로 전체 상장종목 817개(총상장종목은 854개이나 기업분할, 신규상장 등으로 비교가 불가능한 종목 37개 제외)의 11.5%에 불과하다. 평균 상승률도 고작 26.4%다. 하지만 88.1%에 이르는 720개 종목은 주가가 평균 39.6% 하락했다. 특히 주가가 50% 이상 떨어져 반토막도 더 난 종목이 213개(26.0%)나 된다. 이들의 평균 하락률은 64.6%.
경원대 경영회계학부 강병욱 교수가 1990년 이후 증시와 자살의 관련성을 분석한 결과 “주식투자에 실패한 사람이 자살했다는 기사가 자주 나오면 증시는 바닥”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작년 말부터 올 1·4분기에 주식실패로 인한 자살(시도)과 가정파탄에 관한 기사가 자주 나온 것으로 미루어 최악의 국면은 벗어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주식시장이 침체를 벗어나려면 어떤 조건이 충족돼야 할까. 전문가들은 우선 한국 경제와 기업들이 건강해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또 투자자와 시장의 질도 한 단계 높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종우 한화증권 리서치센터 팀장은 “우선 산업구조 자체가 한 단계 도약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가 중화학공업 중심의 발전에 성공하면서 종합주가지수가 100에서 500∼1,000대로 크게 올랐지만 1,000선 이상으로 도약하려면 실물경제의 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 이 센터장은 “미국 증시도 1960년대부터 20년 동안 비슷한 문제로 침체했지만 산업구조가 서비스와 정보기술(IT) 중심으로 바뀌면서 도약하기 시작했다”고 부연했다.
신성호 우리증권 이사도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외국 기업과 겨룰 기술이 있는지, 반도체나 휴대전화 같은 독창적이고 독점적인 상품을 만들어 세계시장을 계속 개척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기업이 돈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벌어들이는지도 중요하다. 임춘수 삼성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한 기업의 실적이 어떤 해에는 좋다가도 다음해에는 크게 나빠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전통적으로 한국 기업들은 증시에서 돈을 빨아들이기만 했지 ‘주주 대접’에는 소홀했던 것. 투자자들은 매매차익은 물론 배당수익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여기다 한국 증시는 짧은 기간에 천장과 바닥을 오르내리는 변동성이 컸다. 개인투자자들은 이런 장세에서 상투 잡고 쪽박 차기 딱 좋다. 증시전문가들은 증시의 변동이 심한 이유를 한국 경제가 해외여건에 큰 영향을 받는 ‘소규모 개방경제’라는 점에서 찾는다. 반도체 자동차 철강 석유화학 등 한국 증시를 주도해온 업종은 세계 경기에 가장 민감한 업종들이다. 이러니 수출이 잘 된다 싶으면 주가가 1,000을 넘보고 수출 경기가 꺾일 조짐을 보이면 500 밑으로 곤두박질치는 양상이 반복돼 온 것이다. 이 같은 주변여건이 바뀌지 않는 한 주가지수가 ‘변동성 심한 박스권’을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으로 증권가는 보고 있다.
해법은 없나
이 와중에서도 삼성전자나 LG전자는 올 들어 국내 생산라인을 증설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플라스마디스플레이패널(PDP)이나 2차전지 등 차세대 첨단기술이 있다면 투자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기술 우위를 가지고 있느냐가 문제인 셈.
또 다른 접근법도 있다. 산업연구원(KIET)의 박중구 동향분석실장은“일본의 경우 해외투자가 늘어도 국내투자가 줄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해외 생산기지가 고부가가치 부품만은 일본에서 조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해외생산이 늘면 덩달아 국내생산도 늘었다. 전래 업종은 해외로 돌리면서 국내 생산시설은 고부가 첨단산업 중심으로 전환하는 방법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삼성전기의 국내외 생산기지에 대한 ‘이원화 경영’은 눈여겨볼 만하다. 지난해 삼성전기 8개 해외 공장의 매출액은 16억7700만달러(약 2조원)로 회사 전체 매출액의 60%를 차지했다. 하지만 회사의 해외투자액은 700억원으로 전체 투자액의 35%에 그쳤다. 오히려 2001년 39%에 비해 비율이 줄었다. 이 같은 현상은 국내 공장은 최첨단 제품의 연구·개발 및 생산기지로, 해외 공장은 범용제품 생산기지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다.
이 회사 강호문 사장은 “비용 절감을 위해 해외로 공장을 옮기는 것은 이해하지만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려면 국내외 공장 사이의 분업화와 네트워크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인재가 오지 않는 것도, 은행이 등을 돌리는 것도 기업의 장래를 어둡게 보기 때문이다. 원청기업이 불공정한 거래를 강요하는 것도 중소기업이 차별적인 경쟁우위를 가지지 못해 협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어려울 때마다 ‘도와 달라’며 정부 지원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세금으로 한계기업을 무작정 연명시키는 것은 대안이 되기 힘들다.
현대증권의 한 애널리스트는 “1·4분기 대기업인 B사의 휴대전화 단가가 전 분기에 비해 4% 떨어지면서 기술력이 낮은 일부 부품업체들의 단가는 최고 50%까지 떨어졌다”며 “그러나 창조적인 디자인이 중요한 외장(外裝)업체들의 단가는 3% 떨어지는 데 그쳤다”고 말했다. 같은 휴대전화 부품 공급업체라도 독창성과 경쟁력에 따라 대기업과의 ‘협상력’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것.
LG경제연구원의 송태정 책임연구원은 “중소기업이 살아남으려면 저임노동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이는 문제의 해결을 미루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어렵더라도 중소기업만이 가질 수 있는 유연성을 발휘해 빨리 변화하고 독특한 아이디어로 승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모건스탠리증권의 양호철(梁浩徹) 한국 대표는 “얼마나 과감히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변신하느냐에 중소기업의 생사(生死)가 달려 있다”고 말했다. 고통스러운 거듭남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