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위기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뒤 다이어트에 돌입했던 국내 대기업들이 다시 ‘문어발 확장’에 나서고 있다. 지난 6월2일 대기업 전문 분석기관인 <재벌닷컴>이 국내 30대 그룹 경영실태를 조사한 결과 이들의 계열사 수는 지난 3년 간 664개에서 843개로 27% 증가했다. 이에 일각에선 대형 M&A를 통해 계열사를 불리는 과정에서 부채비율이 급증되고 글로벌 경기가 둔화될 경우 금융부담 증가와 함께 경영부실로 이어져 제2의 IMF 사태가 벌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여전히 M&A의 마법에 빠져있는 대기업
▲ 금호아시아나그룹은 ‘M&A’의 귀재라고 불리는 박삼구 회장이 진두지휘한 대우건설과 대한통운 등의 초대형 M&A에 잇따라 성공하면서 18개였던 계열사가 52개로 3년 새 무려 3배 가까이 급증했다.
M&A로 규모를 키운 후 기업들에게 ‘M&A 후유증’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 1월 하이마트를 인수하며 M&A의 신흥 강자로 떠오른 유진그룹은 신용등급이 불안하다. 한국기업평가는 지난달 유진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유진기업, 고려시멘트, 기초소재의 기업신용등급을 ‘BBB-’로 유지하되 등급전망을 ‘점진적 관찰’에서 ‘부정적’으로 조정했다. 이와 관련 한국기업평가 관계자는 “하이마트 M&A에 따른 차입금 1조 4,000억 원에 대해 잠재적인 재무적위험이 증가한 것으로 분석돼 등급전망을 낮췄다”고 말했다. LG경제연구원의 ‘M&A의 유혹과 함정’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07년 컨설팅회사 McKinsey가 97년에서 2006년 수행된 1천개 M&A의 거래 전, 후 주가를 비교한 결과 62%가 주가 가치를 증가시키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를 작성한 연구원은 “M&A는 마치 도박과 같은 것”이라며 “인수합병 후 통합 과정은 상당한 시간과 비용의 투입을 필요로 하며, 통합 과정 진행 중 경쟁사나 경쟁환경 변화에 자칫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기업들은 M&A의 장점에 매혹돼 M&A를 계획하고 있다. M&A의 위험성은 높지만 기업의 성장 전략으로 흥미롭기 때문이다. 유독 M&A에 약한 모습을 보이며 이에 대한 언급 자체가 거의 없는 삼성 역시 최근에 ‘이제는 M&A에 나서야될 단계’라며 M&A에 대한 필요성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기업에 부는 M&A 열풍, 부채총액도 늘어
이마트는 2005년 12개이던 계열사가 2008년 현재 19개로 늘어나면서 자산총액이 99.2% 증가했으나, 같은 기간 부채총액은 145.7%나 급증했고, 그룹 전체 부채비율은 174%에서 2배 이상 오른 360%를 기록했다. 이뿐 아니라 30대 그룹 계열사의 전체 자산총액 규모는 같은 기간 918조 5,170억 원으로 42.6%, 부채총액은 403조 4,420억 원에서 556조 7,360억 원으로 38% 각각 늘어났다.
또 삼성·LG·KCC·부영을 제외한 26개 그룹들은 7개 이상의 계열사들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금호아시아나그룹은 ‘M&A’의 귀재라고 불리는 박삼구 회장이 진두지휘한 대우건설과 대한통운 등 초대형 M&A에 잇따라 성공하면서 18개였던 계열사가 52개로 3년 새 무려 3배 가까이 급증했다. 또한 금호아시아나는 계열사 증가로 자산총액이 111.4% 증가했지만 M&A 자금의 상당부분을 부채에 의존하면서 같은 기간 부채총액도 96.4% 급증, 3월 말을 기준으로 현재 그룹 전체 부채비율이 229%에 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밖에 CJ는 48개였던 계열사가 66개로 늘어나면서 자산총액이 71.2% 증가했으나 부채총액이 자산총액 증가율보다 높은 79.2%를 기록했고, 효성 역시 16개에서 30개로 계열사가 늘어나면서 자산총액은 39.8% 증가했지만 부채총액은 55.2%나 늘었다. 또한 GS·동부·두산·현대·대림·대한전선·현대산업개발·하이트맥주 등도 부채총액 증가율이 자산총액 증가율을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자산총액이 증가했음에도 부채규모는 감소한 기업도 있다. LG는 자산총액이 12% 증가했음에도 부채 규모는 오히려 6.5%나 감소했고, 하나로통신을 인수한 SK도 계열사가 14개 늘어나면서 자산총액이 40.1% 불어났지만 부채총액은 15.7%밖에 상승하지 않았다.
한국에 불어 닥친 M&A 열풍 ▲ 두산은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고려산업개발(현 두산건설)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밥캣 등을 연이어 인수하며 M&A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꼽힌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국내 M&A 시장은 크게 활성화됐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2006년 기준으로 거래건수는 744건에 달했고, 거래규모는 22조 원으로 증가했다. 2001년과 비교해 거래건수는 15.5%, 거래액은 61%나 증가한 것이다. 또한 2007년에는 M&A 거래규모는 40조 원대로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기업이 M&A에 열중하는 이유는 시장 지배력의 강화, 생산의 효율성, 성장동력의 발굴이라는 기업의 성장 전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계 2위의 시장 점유율을 자랑하는 일렉트로룩스(Electrolux)는 1980년대 초까지 스웨덴·노르웨이 등 북부 유럽을 중심으로 한 조그만 가전회사에서 전 세계 40여 개국에서 200여 건의 M&A를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일렉트로룩스의 고속성장에는 수많은 인수합병을 효과적으로 수행한 핵심역량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 기업들 역시 이러한 M&A의 장점을 이용해 기업의 성장을 꾀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한전선이다. ‘국내 최초 전선업체’ ‘반세기 연속 흑자기업’ 명성을 자랑해온 대한전선이 M&A로 ‘변화’를 꾀한 것은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2년 무주리조트, 2004년 쌍방울(현 트라이밴즈) 등을 인수했고, 최근 대한전선은 전선업을 벗어나 건설업 공략에 주력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대한전선이 M&A로 다른 업계에 진출한 것은 본업인 전선업 성장이 정체되고 있던 시점에서 사업다각화의 한 수단으로 M&A를 선택했고, 그 시너지 효과는 기업이 성장하는데 효자노릇을 했다. 하지만 대한전선처럼 M&A가 기업의 성공을 의미하진 않는다. M&A를 무리하게 성사시킨 결과 그 후유증에 시달리는 기업도 상당 수 있다. 의류업체로 출발한 이랜드그룹은 홈에버를 2006년 4월 패션사업과 할인점의 시너지 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판단하에 1조 4,800억 원을 들여 한국 까르푸(홈에버)를 인수했다. 그러나 1,000억 원의 이자를 감당 못해 삼성테스코, 홈플러스에게 홈에버를 매각해 불과 2년여 만에 다시 이를 되팔았다. 또 지난해 유진기업은 그룹 전체와 맞먹는 하이마트를 2조 원에 사들였지만 역시 유동성 위기에 시달리다 결국 보유 부동산 매각과 사업 구조조정이라는 자구책을 내놓기도 했다.
금호아시아나 역시 대우건설·대한통운 등을 잇따라 인수하며 덩치는 커졌지만 그다지 실속은 없었다는 업계의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대우그룹은 당대 최고의 M&A 귀재인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회사를 설립하기보다는 기존 회사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사세를 키워나가면서, 수익성 및 경쟁력 제고 등 내실 경영을 외면한 채 세계경영을 내세워 무리한 확장경영에만 몰두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 M&A의 성패는 주력 사업과 연관 있는지, 또 감당할 체력이 되는지에 달려있다”며 “경기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M&A를 잘못했다가 기업에 큰 타격을 입힐 수도 있다”고 말했다.
기업들은 M&A를 통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몸집을 키우는 대신, 재무안정성과 M&A후 이질적인 조직의 완전한 개편과 통합을 뜻하는 PMI(Post-Merger Integration) 등 해결해야 할 숙제를 떠안게 된다. 특히 기업이 빠른 시일 내에 재무안정성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PMI를 제대로 추진도 하기 전에 혹독한 시장의 평가를 받거나 다시 인수한 기업이나 사업 부문을 매각해야 하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M&A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잡아라
▲ 신규 사업의 M&A를 적극 검토하고 있는 남용 LG전자 부회장은 “매출이 50조 원에 육박하는 대기업이 내부 사업만으로 해마다 두 자릿수 성장률을 달성하기는 힘들다”면서 M&A에 대한 관심을 시사했다.
기업들은 생리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면서 신사업에 투자하기 보다는 기존 기업을 M&A하는 전략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된 기업환경에서 M&A를 바라보는 기업들의 시각도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업계에 따르면 최근 유통, 증권업계에서 대형 M&A가 성사된 데 이어 현대건설, 대우조선해양, 하이닉스 등 초대형 매물의 M&A가 임박하자 대기업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금융위원회 이창용 부위원장이 지난 5월 29일 헤지펀드 코리아 콘퍼런스에서 일반 기업들의 M&A를 위한 자금 차입이 과도한 수준이 아닌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며 우려를 제기했지만 M&A 시장의 열기는 식을 줄 모르고 있다. 한화그룹은 지난달 글로벌 경영 전략회의를 열어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하는 데 그룹 역량을 집중하기로 했다. 김승연 한화 회장은 특히 ‘제2의 창업을 한다는 각오로 인수를 준비하라’는 주문으로 임직원들의 분발을 촉구함으로써 한화가 이번 인수전에 임하는 의지를 엿보게 했다. 한화는 계열사의 에너지 사업과 플랜트 시공 경험, 방위산업 부문이 대우조선해양의 에너지, 해양플랜트, 함정(艦艇) 사업과 연계되면 시너지 효과를 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최대 6조 원에서 8조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인수 자금은 3조원 정도의 자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한화로서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되고 있다. 이미 GS그룹과 포스코가 대우조선해양 인수 의지를 분명히 했고, 최근에는 두산인프라코어도 인수 경쟁에 가세했다.
LG전자는 향후 5년 내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조정하기로 하고 태양전지 사업을 포함한 에너지 분야와 B2B 솔루션, 헬스케어 등 신규 사업 M&A를 적극 검토하고 있다. 남용 LG전자 부회장은 “매출이 50조 원에 육박하는 대기업이 내부 사업만으로 해마다 두 자릿수 성장률을 달성하기는 힘들다”면서 M&A에 대한 관심을 시사했다. LG전자가 M&A 의사를 밝힌 것은 1995년 미국 TV업체 제니스를 인수한 이후 13년만이다. LG전자는 또 신성장 동력 확보를 위한 M&A와는 별도로 대어급 매물인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의 가전사업부에 대해서도 ‘인수 효과’를 검토하며 인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재벌간 ‘자존심 싸움’ 불러오는 M&A ▲ 한화의 김승현 회장은 ‘제2의 창업을 한다는 각오로 인수를 준비하라’라며 대우조선해양의 인수전에 굳은 의지를 엿보였다. 특히 이번 합병을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기업 인수에 따른 경제적 득실과 관계없이 재벌간 자존심 싸움이 더 주목을 끌고 있는 M&A도 속출하고 있다. 현대그룹에서 갈라져 나온 현대기아차그룹에 이어 현대중공업까지 M&A로 증권업계에 진출하자 현대가(家) 내부에서 마찰음이 들려오고 있다. 실제로 현대기아차그룹은 신흥증권을 인수해 ‘현대IB증권’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현대’ 명칭을 사용하지 말라는 현대증권과 법적 분쟁 끝에 간판을 내리고 ‘HMC 투자증권’으로 간판을 바꿨다. 현대증권이 고객을 독차지했던 울산 지역에서는 현대중공업의 CJ투자증권 인수로 현대가의 형제 증권사간의 경쟁이 치열해 졌다. 여기에 현대그룹과 현대중공업은 증권에 이어 현대건설을 놓고도 대립 양상을 하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2006년 현대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현대상선 지분을 대거 매입하며 현대그룹 경영권을 확보하려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어에 막혀 일단 물러난 상태이고, 현대중공업 동향에 촉각을 세우고 있는 현대그룹은 현대건설 매물 ‘사냥’을 위해 3조원의 ‘실탄’을 장착 중이다.
STX그룹은 지난 2001년 5월 자산 4,000억 원대 규모로 출범해 7년 만에 16조 원대(해외법인 포함) 자산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주력 계열사인 STX조선과 STX팬오션이 사상 초유의 호황을 타고 쉼 없이 성장해왔고 수직 계열화된 계열사들의 시너지 효과가 높게 발휘된 덕이다. 이에 재계 순위도 올해 자산 기준으로 12위(공기업 제외)에 올라서며 지난해 대비 10계단이나 뛰어올랐다. 또 그동안 몸집만 커진 것이 아니다. 경영의 질적인 부분도 초일류 기업 수준으로 성장시켰다. 다른 기업보다 빨리 지주회사 체제를 도입함으로써 경영 효율성 합리화를 진전시켰다. 또 각종 사회공헌 활동을 펼치며 지속가능한 기업 문화를 닦았다. 몸과 마음이 함께 커지며 재계의 일원으로서 제 역할을 해나가고 있는 셈이다.
외형과 내실의 균형을 추구해온 STX그룹은 이제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한 미래 전략을 세우고 있다. ‘조선기자재-엔진제조-선박건조-해상운송-에너지’로 이어지는 STX만의 사업포트폴리오를 확대하는 ‘개발형 사업(Biz Developing)’을 펼치는 것으로 7년 뒤에는 STX그룹 매출을 50조 원대로 성장시켜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