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내 교섭단체 구성 논의는 합의 한 달여 전부터 선진당 내에서 아이디어로 제기됐지만 구체적인 성과를 거둔 건 불과 합의 이틀 전부터다. 선진당 이상민 의원이 문 대표와 대전에서 만나 교섭단체 구성을 제의했고 문 대표는 정책연대 형태의 교섭단체 구성에 동의했다. 이 의원은 통합민주당 시절인 지난해 9월 대선후보로 민주당 후보가 아닌 문 대표 지지를 선언한 적이 있을 정도로 친분이 깊은 사이다. ▲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와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가 지난 5월 2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공동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합의한 뒤 악수하고 있다.
이 의원은 5월 22일 오전 이 총재에게 이를 보고했고, 이 총재는 “모든 분야의 공조가 아니라 쟁점별로 따로 가게 되면 괜찮다”며 협상을 지시했다. 이 의원과 창조한국당 김동규 전 대변인은 의원회관에서 구체적인 합의문 작성에 들어가 5월 22일 저녁 전격 타결됐다. 선진당은 무소속 후보 영입이 난항에 부닥친 데다 모두 초선 의원인 창조한국당에는 상임위원장을 배려할 필요가 없어 부담이 없고, 창조한국당도 검찰 수사망이 문국현 대표에게 번지는 것을 어느 정도 차단하는 효과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보수와 진보의 동거 연대
선진당과 창조한국당이 합의문에서 “양당의 견해차를 줄여나가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기로 했다”고 밝혔듯이 보수를 지향하는 선진당과 진보를 지향하는 창조한국당의 성향에는 차이가 많다. 이 총재와 문 대표도 국민에게 야합으로 비치지 않을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이 일반적인 형태인 당 대 당 합당이 아닌 정책연대를 선언한 것도 이런 고민이 반영된 것이다. 지난 대선 당시 후보였던 이 총재와 문 대표는 TV토론 과정에서 대북 문제 등 상당수의 현안에서 시각차를 드러냈다.
한편, 이를 지켜보는 각 당은 ‘야합’이라며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는 의원총회에서 “생각이 다른 사람끼리 이익을 좇아서 위장 결혼한 것 같다”며 “그 분들은 늘 조국과 국가이익을 위해 새로운 정치를 이야기했는데 눈앞의 이익만 따진다”고 지적했다. 민주당 차영 대변인은 “이번 사건은 가수 나훈아와 비가 섞여 이도저도 아닌 니훈아가 된 격”이라고 꼬집었다. 민주노동당 강형구 부대변인은 “정당 민주주의를 해치는 것이고, 국민의 의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논평했다.
선진당과 창조한국당은 의사일정에 대한 원내대표 협의에 참여할 수 있고 각 상임위에 간사를 둘 수 있게 됐다. 18대 원구성 협의에도 참여할 수 있게 돼 선진당은 2석의 상임위원장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선진당은 제3교섭단체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자평하지만 한나라당이 이미 단독으로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기 때문에 영향력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선진당 관계자는 “원래 사귀기 시작하면 결혼도 하는 것 아니냐”며 합당 가능성을 점쳤지만 창조한국당은 합당에 부정적이다.
따가운 시선에 흔들리는 문국현
▲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는 의원총회에서 “생각이 다른 사람끼리 이익을 좇아서 위장 결혼한 것 같다”며 “그 분들은 늘 조국과 국가이익을 위해 새로운 정치를 이야기했는데 눈앞의 이익만 따진다”고 지적했다.
한편,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와 손을 잡은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의 이념적 행보로 인해 안팎에서 후폭풍에 휘말리고 있다. 원내 교섭단체라는 틀로 묶여도 독자적 정체성 유지에는 문제가 없다는 창조한국당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진보·개혁 진영의 대안세력을 자임해 온 문 대표로서는 “정치적 야합을 위해 정체성을 버렸다”는 당 안팎의 역풍에 직면하게 된 셈이다.
문 대표는 선진당과 원내 교섭단체 공동 구성을 전격 합의하면서 ‘창조적 보수’를 새로운 이념 지형으로 내세워 사실상 진보의 꼬리표를 뗐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기업체 대표이사를 13년이나 한 만큼, 원칙을 중요시 한다는 측면에서는 기본적으로 보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며 “동시에 항상 개혁에 앞장서 왔다는 점에서 ‘창조적 보수’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대선 때부터 탈이념, 탈지역, 탈연고를 주장해 왔고, 진보-보수의 20세기식 평면적 이분법은 옳지 않다”며 “따뜻한 포용력으로 약자를 보호하고 유연성을 토대로 통합과 개방, 소통과 실용을 지향하는 제3의 길이 ‘창조적 보수’”라고 말했다.
이같은 스탠스는 대선 과정에서 자신의 이념성향을 “중도에서 약간 진보적인 쪽”이라고 설명했던 것에서 180도 달라진 대목. 그는 당시 구여권의 대선주자 대안카드로 러브콜을 받았으며 민주당 손학규 대표의 구여권 합류에 대해서도 “중도보수이지 진보라 할 수 없다”고 공개 비판했었다. 또 비정규직이나 중소기업 문제 등의 이슈를 주도하면서 기업체 CEO라는 이력에도 불구, 진보 진영 내에서도 ‘왼쪽’으로 한 걸음 이동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 때문에 그의 이념적 노선 수정을 두고 명분 없는 이합집산을 위해 고유 브랜드를 벗어던졌다는 따가운 시선이 적지 않다.
문 대표는 대선이후 핵심 인사 상당수가 그의 독단적 스타일 등을 문제 삼아 줄줄이 당을 떠나면서 사실상 ‘문국현 일당’으로 전락하는 위기에 처했고, 이후 총선에서 여권 실세인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을 누르고 부활에 성공했지만, 곧이어 비례대표 파동으로 검찰 수사선상에 오르는 등 악재에 시달려왔다. 이런 가운데 선진당과의 제휴 카드를 승부수로 던졌지만 ‘악수’를 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당장 내부에서 반발 기류가 심상치 않게 감지되는 등 내홍으로 번질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기존 정당을 ‘구태’로 규정하며 참신성을 강조해 왔지만, 스스로 구태인 이합집산에 발을 담갔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돼 이미지 타격도 불가피하게 됐다. 당의 진보적 정체성을 보고 한 표를 행사한 지지층의 이반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도 뼈아픈 대목이다. 당장 당 홈페이지에 비판의 글이 쇄도하는가 하면 탈당 의사를 밝히는 당원들도 줄을 잇는 등 벌써부터 지지층 이탈 조짐이 가시화되고 있다. 무리수를 감수하고 선택한 선진당과의 공동보조마저 파열음을 낼 경우 문 대표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상처를 받게 될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18대 국회 3자구도로 재편
▲ 통합민주당의 표정은 떨떠름하다. 여야 일대일 구도라면 선명한 여당의 대항마로 자리매김해 정국 주도권을 쥐기 쉽다. 하지만 새 교섭단체가 끼어들면 야권 내부의 의견을 미리 조율해야 하는 등 대여 협상이 불편해질 수 있다.
자유선진당과 창조한국당의 연래로 제 18대 국회가 3개 교섭단체 구도로 재편된다. 두 당은 합당이 아니라 정당 간 연대 형식으로 교섭단체를 구성한다. 서로 다른 당으로 있으면서 정책에 대해 연대한다는 복안이다. 두 당은 18대 국회 개원(6월 5일) 전에 등록을 할 예정이다. 새 교섭단체의 의석수는 18석(선진당)+3석(창조한국당)이다. 또 교섭단체 대표와 명칭에 대해서는 계속 협의해 나갈 방침이다. 헌정 사상 당 대 당 통합이 아니라 연대 형식의 교섭 단체 구성은 이례적이다. 18대 국회가 양대 교섭단체 구도에서 3개 교섭단체 체제로 변화함에 따라 여야 협상도 복잡해지게 됐다.
양 당이 한나라당과 통합민주당에 이어 세 번째 교섭단체가 됨에 따라 우선 국회 운영에서 영향력이 커진다. 의석수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훨씬 못 미치지만, 국회 운영에서는 교섭단체로서 동등한 발언권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 향후 정국 구도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들 두 정당은 종속 변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캐스팅보트’를 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양 당은 대운하 저지, 검역주권과 국민의 건강권 확보가 전제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중소기업 활성화를 위해 공동 노력한다고 합의했다. 이들 문제에서는 한 목소리를 내면서 주요한 역할을 하겠다는 방략이다.
한편 이를 지켜보는 한나라당으로서는 협상 대상이 더 늘어나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해야 하는 난제를 떠안게 됐다. 선진당이 같은 보수 성향이지만 야당이라는 특성상 한나라당에 각을 세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 통합민주당의 표정은 떨떠름하다. 여야 일대일 구도라면 선명한 여당의 대항마로 자리매김해 정국 주도권을 쥐기 쉽다. 하지만 새 교섭단체가 끼어들면 야권 내부의 의견을 미리 조율해야 하는 등 대여 협상이 불편해질 수 있다. 또 당장 야당 몫 상임위원장직 1개도 내놓아야 할 판이다. 민주당의 최재성 원내대변인은 “인위적인 교섭단체를 만든 것은 너무 작위적”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