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의 화약고 ‘코소보’ 독립선언으로 다시 불붙다
상태바
발칸의 화약고 ‘코소보’ 독립선언으로 다시 불붙다
  • 글_신혜영 기자
  • 승인 2008.04.0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축제·시위’로 희비교차,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 간의 유혈사태로 악화
발칸반도에 또 다시 긴장이 높아질 정세가 되고 말았다. 세르비아인들에 의해 ‘인종청소’라는 아픔을 겪은 코소보인들, 그들이 마침내 지난 2월 17일 8년 만에 독립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에 이웃 세르비아와 코소보 내 세르비아인 거주 지역에선 연일 독립 반대를 외치는 격렬한 시위가 계속되는 등 연일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급기야 지난 2월 21일,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는 분노한 세르비아 시위대가 미국 대사관에 불을 지르고 세르비아-코소보 국경을 지키는 UN군을 공격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번 코소보 독립선언은 독립을 결사반대한 러시아, 세르비아와 독립만이 인종 충돌을 해결할 수 있다며 독립을 지지한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수년에 걸친 지루한 협상이 결국 접점을 찾지 못하자 코소보 자치정부가 지난 2월 17일 일방적인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하심 타치 코소보 총리는 이날 “코소보가 다시는 세르비아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이라며 “새로 태어난 코소보는 다민족 민주국가로 나아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 갈등 15세기부터 시작
코소보는 인구 200만 명 중 알바니아계가 90%, 세르비아계와 기타 인종이 10%이다. 알바니아계가 절대다수이면서도 세르비아 중앙정부의 끊임없는 탄압을 받아왔다. 코소보에서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 사이에 갈등과 내전을 일으킨 비극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4세기 세르비아 중세 왕조는 두샨왕 때 전성기를 맞았으나 이후 오스만 터키의 침략으로 쇠락의 길을 걷는다. 오스만 터키는 1389년 현 코소보 언덕에서 세르비아가 중심이 된 기독교 연합군을 대파한 뒤 1878년 러시아-터키 전쟁 때까지 500년 동안 이 지역을 지배했다.
터키인들은 이슬람화 된 알바니아인들의 코소보 이주를 장려했고, 많은 수의 알바니아인들이 코소보로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코소보에는 정교도인 세르비아인과 무슬림인 알바니아인들 간의 갈등이 시작됐다. 세르비아인들에게 코소보는 세르비아왕국의 중심지였고, 유서 깊은 종교유적이 남아 있는 지역이면서 동시에 1389년에 오스만 터키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10여만 명의 세르비아인들이 전사한 지역으로서 세르비아인들의 원한이 서려 있는 성지(聖地)이다. 특히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원천인 중세 세르비아 왕국의 중심이 이 지역에 있었고, 세르비아 정교회의 첫 번째 교구가 생긴 곳도 바로 코소보다. 또 세르비아인들에게는 오스만 터키 지배의 길을 터줬지만 끝까지 터키에 저항했던 쓰라린 역사의 현장이 바로 코소보인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며 점차 코소보 인구의 다수를 점하게 된 알바니아인들은 끊임없이 독립의 길을 추구했다.
코소보 내 알바니아인들은 1912년 1차 세계대전 이후 코소보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에 합병되자 두 차례에 걸쳐 독립전쟁을 벌였으나 세르비아 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실패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코소보는 티토군의 점령으로, 유고연방에 편입된다. 티토는 유고연방을 구성하고 있던 6개 공화국 가운데 맹주 역할을 하던 세르비아의 세력 확대를 억누르는 것이 연방을 존속시키는데 불가피하다고 보고 1970년대 들어 코소보의 자치권을 대폭 확대했다. 그러자 코소보 내 세르비아인들은 점차 많은 수가 본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1961년 코소보 전체 인구의 23.6%를 차지했던 세르비아인은 1981년 13.2%로 줄어들면서 행정관서의 대부분의 주요 직위를 차지, 다수의 알바니아인들을 통치하고 있는 반면, 코소보의 세르비아적 요소가 점차 퇴색했다.


코소보 유혈충돌 사태에서 독립선언에 이르기까지
코소보 사태는 신유고연방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알바니아계 코소보 주민과 세르비아 정부군 사이에 벌어진 유혈충돌 사태로 1998년 3월 초 코소보의 알바니아 분리주의 반군들이 세르비아 경찰을 공격하면서 코소보 사태가 시작되었다. 세르비아 경찰은 즉각 반격에 나서 반군은 물론, 반군 거점지역의 주민들을 대량학살 했다. 이에 맞서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코소보해방군(UCK)을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전개했고, 1998년 3월 31일 UN은 유고연방에 대한 무기금수조치를 내렸으며 1998년 4월 세르비아의 탄압에 대한 알바니아계 주민의 시위가 확산되었다. 세르비아는 1998년 5월 3일 대규모 소탕작전을 전개하여 수십 명의 알바니아계 반군을 사살하고 알바니아계 주민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인종청소’작전을 펼쳤다. 이를 피해 코소보로부터 탈출하는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러시를 이루었다.
1998년 6월 코소보 사태에 대한 개입을 선언한 미국과 유럽연합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병력을 코소보 주변에 배치하고 코소보로부터의 세르비아 병력의 철수, 잔혹한 인종청소의 중단을 촉구했다. 그러나 세르비아군은 이를 무시하고 1998년 8월 코소보해방군의 주요거점을 함락시켰다. 이후 10월 나토는 세르비아에 대한 무력 사용을 결정했다. 그러자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1999년 2월부터 3월 말까지 몇 차례에 걸쳐 서방측과 코소보 평화협상을 가졌다. 그러나 협상 모두 실패로 끝나고 3월 24일 나토는 유고연방에 대한 공습을 시작했다. 6월 3일 마침내 세르비아 의회가 유엔의 평화계획을 승인6월 5일부터 나토와 유고연방 간에 군사회담이 열리고 9일에는 군사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나토의 유고공습이 시작된 이래 11주간 계속된 코소보 사태는 수습되고 평화안 이행에 들어갔다. 합의안에 따라 세르비아군은 코소보에서 철수했고, 유엔평화유지군이 코소보에 주둔하게 됐다.
내전이 끝났지만 코소보의 지위에 대한 양측의 입장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코소보는 알바니아계 주민이 전인구의 80% 가까이 차지하지만 영토는 신유고 연방에 속해 있는 자치주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세르비아로부터의 분리독립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세르비아는 민족의 종교적·역사적 성지인 코소보만큼은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코소보 내 소수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들 간의 갈등도 계속됐다. 2004년 3월에는 내전 이후 최대 규모의 유혈사태로 19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하기도 했다.
유엔 안보리는 2005년 10월 마르티 아티사리 유엔 코소보 특사의 중재 하에 코소보 지위 결정을 위한 협상을 개시하는데 합의했으며, 2006년부터 양측의 지루한 협상이 이어졌다. 양측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자 아티사리는 결국 2007년 4월 EU 관할 하에 코소보가 독립의 길을 갈수 있도록 하자는 코소보 최종 지위 결정 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세르비아는 당연히 거부했고,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에서 이 문제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위협하며 예상보다 더욱 강경한 입장을 천명했다.
코소보 독립을 지지하는 미국과 EU는 러시아를 달래기 위해 2007년 8월부터 12월까지 120일간 ‘트로이카’(미국, 러시아, EU)의 중재로 추가 협상을 벌였으나 아무런 성과도 도출하지 못했다. 지난 2008년 1월 내전 당시 게릴라 지도자였던 하심 타치를 총리로 선출한 코소보는 결국 ‘더 이상의 지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서 서방측과의 조율 하에 세르비아로부터 일방적인 독립을 선언하게 됐다.


코소보 내의 세르비아계 분리독립 추진
이런 가운데 코소보 내의 세르비아계가 다시 분리독립을 추진하고 러시아가 무력 사용 가능성을 거론하는 등 코소보 사태가 극도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코소보 내 세르비아계 밀집 거주지역인 미트로비차의 세르비아계 지도자 올리버 이바노비치는 “코소보 북쪽 지역의 분리운동이 시작됐다”며 “세르비아 정부 관계자와 정치단체들이 분리 준비 작업을 지휘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만약 세르비아계가 이곳에 거주하는 알바니아계를 공격하고, 알바니아계가 코소보 내 세르비아계에 대해 보복할 경우 국제사회는 인종청소를 또다시 목격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영국의 일간 텔레그래프 등 외신들은 지난 2월 24일 세르비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코소보 북부지역인 미트로비차의 세르비아계가 코소보로부터 분리준비에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세르비아 내 알바니아계 자치주인 코소보가 17일 독립을 선언한 뒤 세르비아 내에서는 코소보의 국가 지위를 인정한 미국과 영국, 독일 등을 비난하는 반서방 정서가 고조돼 왔다.

코소보 독립을 둘러싼 서방 국가와 러시아 갈등 고조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이 잇따라 코소보 독립 지지선언을 내놓은 가운데, 러시아가 코소보 독립을 승인한 유럽 국가들과 나토를 강력히 비난하면서 무력 사용 가능성까지 배제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혀 코소보 독립을 둘러싼 서방 국가와 러시아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미국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18일(현지시간) “미국은 코소보를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로 공식 인정한다”면서 “외교관계 수립을 긍정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라이스 장관은 나토군이 지난 1999년 코소보 사태에 개입해 폭력사태를 종식시켰다고 지적하며, 코소보가 그동안 독립을 위한 독자적인 제도를 구축해 왔다고 평했다. 탄자니아를 방문 중인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도 이날 코소보의 파트미르 세지우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코소보가 독립, 주권 국가임을 인정한다”며 적극적인 지지의사를 전달했다.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EU 주축국들도 이날 브뤼셀에서 열린 외무장관회의에서 코소보 인정문제를 회원국 자율에 맡기기로 한 뒤 앞 다퉈 코소보 독립을 인정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반면 그리스정교를 믿는 슬라브 형제국 세르비아와 각별한 유대관계를 맺어온 러시아는 코소보 독립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티벳·위구르 등 자국 내 소수 민족의 분리주의 움직임 강화를 우려하는 중국도 러시아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러시아와 서방의 대결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발칸 반도에 전략적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양측의 계산이 깔려있다.
이번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한 배경에는 미국 등 서방권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과 유럽 7개국, 독립선언을 지지하는 공동성명을 발표, 지역의 안정과 치안유지를 위해서는 국제기관감시하의 코소보 독립이 유일한 현실적인 선택안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세르비아의 동맹으로서 코소보가 사실상 서방측으로 넘어가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코소보 독립선언 사태’를 제1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킨 ‘사라예보 사건’에 비유하기도 한다.
지난 3월 2일 푸틴 현 대통령의 후계자로 지명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대선 직전 “코소보의 불법적인 독립선언이 유럽 전체의 안보와 안정을 위협하고 있다”며 “대서양 건너편에서 미국이 선동한 작은 불티가 전 유럽을 불바다로 만들기에 충분하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이어 그는 “코소보의 독립은 유럽 전역에서 조직범죄와 마약 밀매 등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면서 “이는 러시아와 다른 국가들을 위협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구 소련공화국 지도자들과 가진 회담에서 “코소보 독립 지지는 계산착오이며 언젠가 뒤통수를 치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코소보 독립을 지지하는 서방 국가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드미트리 로고진 NATO 주재 러시아 대사는 지난 21일 “유럽연합(EU)이 코소보 독립을 승인하는 쪽으로 통일된 입장을 정하거나, NATO가 유엔에서 위임받은 권한 이상의 일을 할 경우 러시아는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티베트, 신장위구르 자치주 등 분리독립 도미노현상 우려
코소보 독립을 둘러싼 갈등은 코소보와 세르비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코소보는 지난 2002년 인도네시아에서 독립한 동티모르이후 21세기 두 번째 신생국가로 이번 코소보 독립선언으로 자국의 정치문제, 특히 분리주의 움직임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국가들에게는 어떤 득실로 작용할 것인가가 더 큰 관심사다. 코소보가 독립할 경우 인종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발칸반도는 물론 러시아, 중앙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분리독립의 도미노현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인종갈등에 관한 한 유럽도 코소보가 속한 발칸반도 못지않게 고민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나라가 스페인이다. 40년 넘게 바스크족 분리독립을 주장하며 유혈투쟁을 벌이고 있는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라는 반정부 무장단체가 대표적이다. 특히 5월 치러지는 총선을 앞두고 ETA는 분리독립 찬반투표를 10월 실시하겠다고 공언해 사회당 정부를 긴장시키고 있다.
네덜란드 언어권인 북부 플랑드르에서 독립의 목소리가 높은 벨기에, 스코틀랜드 국민당이 2010년 독립 찬반투표를 추진하는 영국도 코소보 사태가 남의 일이 아니다. 이런 분리주의 여파는 아시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대만을 비롯해 티베트, 신장위구르 자치주 등의 분리주의 움직임에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중국 정부는 “코소보의 일방적인 독립선언을 심히 우려한다”는 외무부 성명을 냈다. 타밀 반군의 저항이 격렬한 스리랑카는 독립 선언을 비난했고, 동티모르 사태, 아체 반군 등의 문제를 안고 있는 인도네시아도 입장 표명을 유보했다.
반면, 대만은 “수많은 장벽에도 불구하고 코소보인들은 평화적 독립추구라는 이상을 관철시켰다”는 축하성명을 발표했다. 이처럼 코소보 독립에 고조된 티베트 등 분리독립을 추진해온 소수민족들도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앞으로 그들의 움직임에 세계인들의 이목이 집중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지난 3월 10일 라싸에서 처음 시작된 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하는 티베트의 독립시위가 전 세계로 번지고 있다. 이에 중국 정부는 강경 정책을 고수하고 있어 소요 사태가 장기화될 전망이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