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티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전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 50년간 중국의 지배에 눌려있던 티벳인들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고 티벳 고유의 불교문화를 압살하며, 중국정부의 지나친 동화정책에 결국 쌓이고 쌓인 티벳인들의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다. 57년에 걸친 공산통치에 20여 년간의 종교 활동 완전금지 조치, 분리독립 운동을 와해시키기 위한 대대적인 ‘사상교육’ 등 무리한 정책들은 오히려 수십년간 억눌릴 티벳인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어 속세를 떠난 승려들까지도 거리로 뛰쳐나왔다.
최근 10여 년간 중국 당국은 티벳 승려들에게 인도에서 49년째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는 달아이 라마를 부정할 것을 강요하며, 한편으로는 평신도들에게도 달라이 라마를 위한 기도 금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불교가 곧 일상생활이고 달라이 라마를 여전히 자신들의 지도자로 믿고 있는 티벳인들에게는 중국정부의 ‘이간정책’은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다. 그러자 최근 들어 학생과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사상교육’에 돌입했다.
中의 지나친 불교문화 말살정책이 직접적 도화선
중국의 이런 막가파식 정책은 오히려 수십년간 억눌리 티벳인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거기에 중국이 2006년 달라이 라마에 대한 공개적인 공세를 재개한 것이 이번 사태를 악화 일로로 내몰았다. 티벳 수도인 라싸에 한족의 집단이주정책과 ‘식민정책’을 그저 지켜봐야만 했던 티벳의 승려들 역시 자신의 정신세계를 파괴하려는 노골적인 시도에 분노했다. 티벳에서는 전통적으로 승려들이 일반 평신도들을 하나로 묶는 사회 지도층의 역할을 해왔고, 중국의 티벳 정책 역시 승려들의 불만을 사회 전체로 확대되지 못하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그동안 티벳 문제와 관련해 중국이 가장 염려했던 것은 승려들이 주도하는 시위에 민초들이 대거 동참하는 것에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그 우려는 이번 사태로 인해 현실화 되었다.
국운을 걸고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던 중국은 최소 10명에서 최대 100명까지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는 이번 유혈참사로 국제사회에서의 이미지 추락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중국군경, 티벳 독립요구시위 무력진압
티벳 자치구 수도 라싸에서 지난 3월 14, 15일 중국 군경의 티벳 독립요구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100여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세계에 타전됐다. 인도 북부의 티벳 망명정부는 15일 “라싸에서 시위사태로 인해 최소한 80여명이 사망하고 72명이 부상한 것을 확인했다”며 “100여명이 숨졌다는 미확인 보도가 있다”고 밝혔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이번 사태로 시민 10여명이 사망했고 공안과 무장경찰 12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전하며 상반된 내용을 전했다. 이로 인해 라싸 도심에는 16일 무장병력이 대거 배치되고 중무장한 장갑차가 순찰을 하는 등 사실상 계엄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티벳 독립시위는 인접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쓰촨성 아바의 티벳인 밀집지역에서 중국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여 최고 7명이 숨졌다는 AFP통신의 보도와 함께 현지 주민은 “승려와 주민들이 관공서와 경찰서를 공격하고 경찰차에 불을 지르자 경찰이 발포했다”고 말했다. 또한 칭하이성 퉁런에서는 승려 100여명이 시위를 벌였고, 간쑤성 란저우의 한 대학교에서는 대학생 100여명이 시위 무력진압을 항의 했다.
티벳 사태로 베이징올림픽 보이콧 움직임
중국이 이번 사태를 수습하고 베이징 올림픽을 무사히 치룰 수 있을지가 최대의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각국 인권단체들이 자국 정부에 압력을 넣고 있다. 또한 유명선수들이 개인 차원에서 올림픽 참가를 거부할 경우 중국의 이미지는 적잖은 상처를 남길 것으로 보인다.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은 상당수의 톱 선수들이 중국 정부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베이징 올림픽을 보이콧하는 문제를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티벳 사태로 인한 베이징 올림픽 보이콧 움직임은 이번이 처음인데 바흐 부위원장은 3월 16일 독일 신문과 인터뷰에서 “일부 스포츠 스타들이 올림픽 경기를 떠올릴 때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있으며 심지어 일부 참가자들은 취소하는 것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의 상황은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을 문제 삼아 미국 등이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하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같은 날 일본에 있는 티벳 망명자들은 자신들만의 올림픽 성화 봉송행사를 가졌다. 티벳 망명자 100명은 이날 도쿄 요요기 공원에서 ‘티벳 올림픽’ 성화 봉송행사를 열고 ‘자유 티벳’‘중국은 티벳에서 떠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중국 정부의 티벳 유혈진압을 항의 했다.
‘티벳 독립지지 시위’ 전세계 확산
티벳 망명정부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중국이 계엄령을 발동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사실상 계엄 상태를 목격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 소요사태는 티벳의 분리 독립을 요구한 1959년 봉기 49주년 기념일인 3월 10일 라싸에서 처음 시작되어 14일 오후 라싸 도심 라모기아사원 인근에서 대규모 폭력시위로 번졌다. 이 과정에서 중국 정부의 강경진압과 160여개 장소에서 차량과 상점에 화재가 발생하며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그러나 티벳 망명정부의 주장과 달리 중국 정부는 이번 시위로 10여명이 사상했다고 발표했다. 시짱자치구 정부 소식통은 3월 15일 “희생자들은 모두 일반 시민으로 불에 타 숨졌다”면서 “사망자 중에는 호텔 종업원 2명과 상점주인 2명이 포함돼 있다”고 말하며, 티벳인들의 폭력사태로 몰아갔다.
하지만 티벳 독립 지지 시위는 라싸를 넘어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와 인도 뉴델리, 호주 시드니 등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인도에 망명 중인 티벳인들의 분리 독립을 위한 ‘대장정 시위’도 재개 되었다.
뉴욕 유엔본부 앞에서는 3월 14일 티벳 독립을 지지하는 40~50명이 “티벳을 독립시켜라, 우리는 정의를 원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호주에서는 15일 시드니 주재 중국 총영사관 밖에서 티벳 독립지지 시위가 열렸다. 네팔 카트만두에서도 같은 날 승려 수십 명을 포함한 약 1,000명의 시위대가 경찰과 심한 몸싸움을 벌이다 승려 12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또한 15일 인도에서는 망명 티벳인 10여명이 히미찰프라데시주 데라에서 행진을 하기도 했다. 중국 서북부 간쑤성 샤허에서는 승려들이 이끄는 3,000~4,000명 규모의 시위대가 라부렁사를 출발해 시청을 향해 행진하면서 경찰과 대치하는 등 중국 내부에서도 티벳 분리 독립에 동조하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며 강경정책으로 치닫고 있다. 시짱자치구 당위원회는 15일 장칭리 서기 주재로 긴급회의를 열고 티벳의 질서 회복을 위한 ‘인민전쟁’을 선언하고 달라이 라마 지원세력에 대한 공격에 나서기로 했다. 이에 앞서 후진타오 국가 주석을 비롯한 정치국 상무위원 9명도 14일 오후 7시경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폐막 직후 긴급회의를 갖고 티벳 사태 수습대책을 논의 한 것으로 알려졌다. 티벳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티벳 시위자들의 시위는 현 정부에 대한 티벳인들의 뿌리 깊은 반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며 “티벳 시위자들에 대한 중국 정부의 잔인한 탄압 행위가 조속히 중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vs 티벳, 갈등원인은 ‘중화민족론’
중국과 티벳의 해묵은 갈등은 티벳을 중국의 한 지방으로 보는 중국과 독립국임을 주장하는 티벳의 인식차이에서 비롯한다. 현재 티벳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한 상태이다. 티벳의 망명정부는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독립이 쉬워보이지는 않는다. 티벳 독립문제에는 중국, 인도, 미국, 영국 등 열강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1951년 티벳을 중국 영토로 접수하고 티벳의 국가적 존재를 부정했다. 중국정부는 티벳이 13세기부터 중국 영토였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티벳인들은 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티벳인들이 중국 정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1950년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었던 이른바 ‘티벳 사변’은 없었을 것이다. 특히 티벳 분쟁의 중심에 있던 샤거파를 비롯한 망명 티벳인들은 중국과 매우 상이한 주장을 펴고 있다. 즉 1951년 5월 23일 중국과 티벳 사이에 ‘17개조 협의’가 체결되기 전까지 티벳은 독립된 국가였다는 것이다. 유럽 열강 중에서도 티벳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나라는 영국이다. 티벳이 영국의 ‘소중한’ 식민지였던 인도와 접해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의 폭풍이 몰려오던 19세기말은 티벳에서도 급변의 시기였다. 인도와 네팔 쪽의 국경지대에서는 인도에 대한 직접 통치에 나선 영국이 티벳에 개방과 통상을 요구했다. 티벳을 자신의 세력범위로 생각하고 있던 부탄은 1861년과 1865년에 영국의 세력범위로 편입됐다. 또 네팔은 1860년 영국-네팔 조약을 맺어 친영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티벳 당국에 위협을 가했다. 이런 영국의 위협에 티벳인들은 강경하게 대응했고 1851∼1861년에는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승려와 관리들은 종교가 다른 서양인과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서약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당시 청나라의 왕조는 티벳을 개방하라는 영국의 강한 요구와 티벳의 완강한 문호 폐쇄 방침에 직면하고 있었다. 외국인의 티벳 접근이 문제가 된 것은 ‘옌타이 조약’ 체결 이후였다. 1876년 영국은 청정부와 ‘옌타이 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중 영국인이 여권을 가지고 티벳을 거쳐 인도와 중국을 오갈 수 있다고 규정한 조항이 있었다. 티벳인들은 이 조항과 관련해 주장대신이 영국인을 비호할 거라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1887년 티벳 정부 까샤(티벳에서 내각은 까샤로 불림)는 룽툴라 산의 다지링(大吉嶺)에 감시초소를 설치하였다. 영국은 이를 빌미로 티벳과 국경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중국의 한 ‘지방’으로 규정한 17조 협의
1940년대에 들어 티벳에서 독립 추진의 기운이 다시 나타났다. 1941년 친중적인 라쳉 활불이 실각하고 친영적인 따자 활불이 티벳 정권을 장악했다. 1943년 까샤에 외교국을 설립했고 1947년에는 티벳 대표단이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범아시아 회의’에 참석했다. 1947년 10월 티벳 정부는 상무대표단의 이름으로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외교활동을 벌었다. 하지만 대표단은 800만 달러의 차관을 들여와 티벳 화폐의 준비금으로 사용하려고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내부적으로 티벳 정부는 1949년 7월8일에 몽장위원회에 근무하는 한족에게 티벳를 떠나라고 요구했다. 1950년 1월 티벳 ‘친선사절단’이 영국, 미국, 인도, 네팔 등지에서 티벳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군수지원국을 설립하고 외국에서 대량의 무기와 무선설비를 도입해 민병을 훈련하고 티벳군 일부를 아리와(黑河), 창두, 진사장 일선에 배치했다. 이런 상황에서 1950년 10월 중국 정부의 인민해방군은 티벳군의 주력군이 주둔하는 창두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티벳군 5,700명이 죽고 2,000여 명이 인민해방군에 투항했다. 중국에 군사적으로 대항할 여력이 없었던 티벳은 저항을 포기했고 결국 1951년 5월23일 중국인민정부와 티벳 정부는 ‘티벳의 평화적인 해방 방법에 관한 협의 17조’를 체결했다. 17조 협의는 티벳를 독립국가가 아닌 ‘민족구역자치’를 시행하는 중국의 한 ‘지방’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티벳의 독립성을 부정하는 이런 조치에 대해 저항의 불씨가 커져갔고 1951년 11월 인민해방군이 티벳에 진주할 때 티벳 씨뢴 루캉와와 로쌍 짜시는 라싸에서 ‘인민회의’를 조직하고 루캉와는 인도 칼림퐁에서 저항운동을 벌였다.
이처럼 티벳 분쟁의 근원은 ‘티벳를 독립된 주권국가로 보느냐’‘중국의 한 지방으로 보느냐’는 인식의 차이에 있었다.
80년대 이후 국제사회의 관심 고조
1980년대에 들어 중국에 몰아친 개혁·개방 물결은 티벳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티벳 여러 도시에서 티벳인들보다는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경제권을 장악했다. 이런 와중에서 티벳어는 쓸모없는 언어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편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채택하기 이전에 티벳 문제에 대한 국제 사회의 관심은 매우 저조한 편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미국이 티벳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80년대는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중국의 민족문제도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할 때였다. 1987∼88년에 티벳에서는 여러 차례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지만 중국정부는 이를 철저히 탄압했다. 국제사회는 중국정부의 인권탄압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고, 중국 정부는 이를 내정 간섭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