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과 미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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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과 미술품
  • 글_김영란 차장
  • 승인 2008.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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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눈물’속에 가려진 시대의 어두운 잔상
2007년 ‘신정아 사건’에 이어 ‘삼성 비자금 조성’에 연루된 명작들이 제대로 세상의 빛을 보기도 전에 몸살을 앓고 있다. 신정아가 대기업을 상대로 작품을 팔면서 많은 차액을 챙긴 부분이나, 삼성 비자금관련 검찰수사를 지켜보면서 작품 자체로의 평가보다는 재벌의 부(富) 증식을 위해 악용됐다는 의혹들은 예술성 자체에 대한 모독 같아서 왠지 기분마저 씁쓸해지게 한다. 최근 펀드 등 미술품을 통한 투자에 대해 일반인들의 관심이 늘어나면서 자본과 예술의 이러한 이상한 공생과 미술품 유통시장 개혁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져 가고 있다.

행복하지 않는 ‘행복한 눈물’
최근 삼성 비자금에 관련된 수사가 급물살을 타면서 특히 세인들의 관심에 오른 작품이 팝 아티스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다. 이 작품은 2002년 경매에서 당시 환율로 90억 원(715만 9,500달러)이라는 고가에 낙찰된 것으로, 1964년 세코스키의 만화를 본 떠 그려졌다. 리히텐슈타인의 작품 중 가장 고가로 서미갤러리에 팔린 ‘행복한 눈물’은 수사 진행 중에 행방이 묘연했다가, 지난 2월 1일 홍성원 서미갤러리 대표가 세상에 전격 공개했다. ‘행복한 눈물’은 초등생도 그 작품을 알아볼 정도로 세간에서 유명한 작품으로 등극했지만, 이러한 배경이 미술작품에 대한 우리나라의 발전상에 힘입은 것이 아니라 한 대기업의 비자금 조성과 관련된 어두운 의혹 속에서 정치?사회화 되었다는 점은 많은 미술 애호가들의 마음을 착잡하게 하고 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아내이자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인 홍라희 씨가 세계적인 미술품 시장인 미국에서 고가의 작품을 사들이는데 다리역할을 했다는 서미갤러리 홍송원 대표는 2002년 프랭크 스텔라의 ‘베들레헴 병원’을 8백만 달러에, 마크 로드코의 그림을 9백 2십만 달러에,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을 7백만 달러에 사들인 것으로 검찰 수사결과 확인됐다. 작품을 사들인 당시에 가격축소 신고 및 외국환거래법 위반 혐의로 홍라희 씨가 적발되고, 홍송원 대표는 거액 외환유출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서 수사를 착수했지만 이상하게도 다시 서울지검으로 사건이 넘겨지면서 자금출처에 대한 수사도 없이 벌금형만 선고 받았었다. 이러한 괴상한 사건이 결국 삼성 비자금에 대한 비리를 주장한 김용철 변호사에 의해 다시 여론의 도마에 오르게 된 것이다. 한국 최고 재벌인 삼성의 불법 비자금 조성?관리를 파헤치기 위한 검찰의 수사는 해당 관련자들의 미지근한 응대 속에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용인 창고로 옮겨졌다는 관련 업자들의 증언에 따라, 특검은 에버랜드 용인 창고를 압수 수색했지만, 김용철 변호사가 비자금으로 샀다고 주장한 구입목록 작품 30점 중 최고 핵심 작품인 ‘행복한 눈물’과 ‘베들레헴 병원’은 발견되지 않았다. 수사 관계자들은 “문제화되기 전에 작품을 미리 옮겨놨을 것”이라며 한탄들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창고에 남아 있는 수천 점의 미술품에 대한 구입 자금에 대한 부분들은 또 다른 비자금 의혹으로 이어져 대기업의 미술품 구입은 더욱 뜨거운 논란거리로 부상하고 있다. 현재 미술계에서는 ‘행복한 눈물’이 구입 전보다 3~4배 가격이 오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작품에 대한 작품성과 진정한 가치를 매기기보다 재벌의 부조리한 재산증식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작품 속 여인조차도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우울함을 선사하고 있다.

재벌은 왜 미술품에 집착하는가
재계 안방마님들의 모임인 ‘아름지기’에서 실세로 통하고 있는 삼성 리움 홍라희 관장은 서울대 응용미술학과 출신으로, 지난 2005년에는 현대미술관회 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미술품에 대해 높은 식견을 갖추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부를 가진 사람이 좋아하는 작품 몇 점을 샀다고 해서 과연 무슨 문제가 된단 말인가. 더군다나 미술을 전공한 재원이자 국내 굴지의 갤러리 관장이라면 욕심나는 작품에 대해 그만한 가치를 지불하고 구매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고가에 거래된 이 미술품들에 대한 음성적인 의혹들이 끊이지 않는 것은 자본과 연계된 예술작품들의 야릇한 관계에서 연유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전시작품의 질이나 규모 등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해온 삼성 리움 미술관이 특히 그 논란의 핵심으로 떠오른 것은, 그간 미술계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그림 구매를 가장한 자금세탁이나 불법 재산증여?증식에 대한 의혹이 본격적으로 제기되면서였다. 김용철 변호사가 공개한 삼성가 여인들의 해외 경매 비자금 구입 목록 공개와 함께 이후, 특검에서는 김 변호사 등의 차명계좌에서 서미갤러리, 국제갤러리 등으로 약 1천억 원대의 거액이 흘러 나간 것을 확인했다. 차명계좌나 금품수수의 경우 당사자끼리 말을 맞추면 입증이 쉽지 않은 반면, 고액의 미술품 구입은 비자금 세탁과 재산 증식에 가장 효율적이며 뒤탈이 없는 상속기반이다. 특히 경매 등 거래에서 구입자 신분에 대한 기밀 보장과 보유세, 양도소득세도 없으며 시세차익과 투자가치 상승효과까지 있다. 또한 작품을 상속품으로 자진신고하지 않는 한 상속?증여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 이건희 회장이 아들 이재용 삼성 전무에게 전화사채(CB)를 헐값에 몰아줬다가 꼬투리를 잡힌 부분에 비춰본다면, 이러한 미술품 사재기는 뒤처리 깔끔한 좋은 상속 수단인 셈이다. 미술관과 재단을 설립해 합법적인 문화사업으로 포장함으로써 세간의 시선에서부터도 훨씬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다는 점도 만만치 않은 유혹이다. 미술계 관계자 모 씨는 “그림이 예술작품으로서가 아니라 재벌의 투기와 탈세, 불법 상속의 대상으로 변모해 버린 현실을 바라보며 새삼 예술의 가치와 존재방식을 묻게 된다”며 한숨 섞인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작년 한 해를 뜨겁게 달군 ‘신정아 사건’에서도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 부인인 박문순 성곡미술관장이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으며, 최근 ‘삼성 사건’ 역시 홍라희 씨와 시누이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 사돈인 박현주 대상 부회장과 함께 비자금으로 그림을 사들였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상태다. 현재 경주 아트선재미술관과 서울 아트선재센터의 관장을 겸하고 있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부인 정희자 씨 또한 김우중 전 회장의 비자금이 미술품으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라는 세간의 의혹을 받고 있는 상태다. 재벌가들의 미술품에 대한 고상한 취미들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아트센터나비를 관리하고 있는 최태원 SK그룹 회장 부인 노소영 씨, 금호미술관 관장을 맡고 있는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 누나 박강자 씨 등 재벌을 비롯해 재벌가 여성들의 크고 작은 미술관 운영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삼청동 몽인 아트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채형석 애경그룹 부회장 부인 홍미경 씨, 평창동 소재 화정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는 한국베링거잉겔하임 한광호 명예회장 딸 한혜주 씨 등 재벌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미술관 운영방식들은 그들 스스로가 투명하고 획기적으로 개선하지 않는 한 세상 의혹의 눈빛들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 특검 진행 후 급격히 얼어붙은 미술계
1980년대 들어 고속 경제성장을 통해 부를 축적한 기업들이 미술관 운영에 상당한 관심을 쏟으면서, 기업들은 문화재단을 설치하고 미술관을 건립해 지원?운영해 왔다. 특히 이들 문화재단이나 미술관들의 운영자들 대부분이 재벌가 여인들로서 미술관 운영은 곧 ‘내조’를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울러 이러한 문화재단의 대외활동을 통해서 기업 이미지를 제고하고 사회적 기능을 확대하는데 적극 활용되어 왔다. 하지만 이번 삼성 특검을 통해 이러한 기관들이 비자금 조성 의혹의 대상으로 떠오르자, 국내 ‘빅 5’로 인식되고 있는 미술관을 비롯한 각 재단들조차 불신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지난 해 ‘아트 펀드’와 ‘경매 활성화’ 등으로 호황을 누리던 미술계 경기가 재벌과 미술품 시장의 연관관계를 반증이라도 하듯, 삼성 특검이 가속화되고 있는 가운데 급격히 얼어붙고 있다. ‘신정아 사건’으로 가슴 졸인 채 정황을 지켜보다 가슴을 쓸어내린 지 얼마 안 돼 ‘삼성 특검’이라는 거대한 핵폭탄을 맞은 미술계는 현재 고사 직전이다. 삼성 특검 가운데 비자금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화랑계가 지목되자 거래는 중단되고 숨마저 쉬기 힘들 정도로 위축된 분위기다. 일각에서는 “홍라희 관장이 보여준 컬렉트의 모습은 사실상 국내 화랑계의 ‘큰 손’ 역할을 넘어 미술계에서 가장 막강한 파워를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는 여론 동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우려와 작금의 현실은 미술관이나 재단이 사회공익적인 측면보다 개인 사유화 측면이 강해 ‘재산’이라는 부분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것과 잇닿아 있다. 전시는 차지하고서라고 재벌 운영 미술관이 소수 재벌 집안의 사적인 부분과 대기업 총수들 간의 자존심 대결에서 파생되었다는 어두운 그늘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화랑계가 대기업 미술관 경제력에 종속되었다는 의혹의 불신은 피할 수 없게 됐다. 삼성 특검의 정황을 보며 “자칫 자신들에게도 ‘불똥이 튈까’싶어 숨죽이고 있는 일부 대기업의 모습도 과히 정상적으로 비춰지진 않는다”는 세간의 따가운 시선도 더욱 짙어지고 있다. 국내 굴지의 갤러리 대표가 재벌가를 대신해 거액의 작품을 사들이고, 이에 재벌의 비자금이 흘러 들어갔다는 것은 대기업과 미술계가 단순한 매매를 위한 과정 선상이 아닌, 미술계 자체의 사활을 건 비정상적인 밀접한 시스템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익명의 미술계 한 인사는 “국내에서 활동 중인 상당수의 미술계 인사들은 작품 활동 초기부터 화랑을 중심으로 한 스폰서들이 집중적으로 관리?육성하고 있다. 해외 유학은 물론 전시회에 있어 이들 대기업이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라고 귀띔했다. 또 미술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중견 작가는 “대기업의 후원이 지난 해 신정아 사건 이후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유럽에서 활동 중인 많은 신진 작가들이 국내에 속속 복귀하고 있는 것이 현재 국내 미술계의 사정이다. 복귀하고 있는 작가들은 생계를 위해 차라리 국내 미술학원에서 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라며 삼성 특검 이후 얼어붙은 미술계 분위기를 전했다. 이처럼 경직된 미술계를 염려한 관계자는 “이대로 자다간 한국 미술계는 반년 안에 미래를 보장 받을 수 없을 만큼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데, 그동안 자성적인 발전을 외면한 채 대기업에 의존한 것에 대한 참담한 결과”라며 참담한 심정을 토로했다. 예술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사이의 이러한 괴리에 대해 수수방관만 하고 있다가는 기존 미술업계는 물론 대기업 이미지까지도 악영향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시대의 전형을 반영한다는 팝아트 개론에 비춰볼 때 ‘행복한 눈물’에 의해 파헤쳐진 거대 자본과 유착된 미술계의 얼룩진 잔상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길 잃은 미술계, 해결의 돌파구는
최근 미술품을 둘러싸고 경매, 아트펀드 등 대규모 자본이 유입되면서 미술시장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분분하다. 한 미술계 관련 전문가는 “금융화의 진전과 함께 현대미술 작품은 증권, 선물 등 투기성 자본의 중요한 상품으로 부각되는 등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미술계 시스템에 따라 작가를 발굴?양성하여 그 예술성과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게 하는 역할을 하는 전문인들이 늘어나면서 예술가는 자본과 미술이라는 사각지대에서 고뇌하고 있다. “마케팅에 성공한 작가가 시장을 지배할 수밖에 없다”는 관련업계 인사의 지적은 이제 예술 장르에도 ‘경영’이 접목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대변하고 있다. 일부 인사들에 의해 흐려진 시류로 인해 미술계에 투입되는 자본들이 다 음성적이고 부조리하다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세계시장에 비해 국내시장은 정보가 부족하고 시장이 한정되어 있어 국가 경쟁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실력은 있지만 총체적으로 관리가 버거운 작가를 대신해 이들을 육성하고 관리해 주는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 반가운 부분이다. 특히 일부 작가들에 국한되어 양극화와 편중현상의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한국 미술시장의 현실을 본다면, 더욱 많은 작가들이 발굴돼 국가 경쟁력이나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말 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미술품이 물질적인 형태의 가치로 인식되면서 그와 관련한 미술품 유통시장에 대한 투명하고 체계적인 관리시스템의 부재가 먼저 선행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우리나라에 미술품이 본격적으로 거래되고 있는지도 30여 년이 훨씬 넘은 시점에서 일어난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혼탁한 시대의 어두운 잔상을 반영하고 있는 듯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리히텐슈타인이 만났던 전설적인 화상 레오 카스텔리처럼 작가를 보는 뛰어난 안목을 가진 전문가, 필요한 부분에 대한 적절한 투자는 우리나라에서도 세계의 위대한 예술가를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상업주의’는 예술이 가진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게 하고, 인기에 영합한 작품들만 쏟아내게 함으로써 다양한 창작의 장르를 방해하는 장애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술관이 공익성이나 교육을 목적으로 작품을 전시하고, 화랑이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날 수 있도록 진정한 소임을 다한다면 이러한 명작들의 수난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명작들이 누구 개인에 의해 소유되고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것보다, 대중과 가깝게 호흡하고 작가의 위대함과 예술혼을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세상 어디선가 어둠 속에서 울고 있는 작품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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