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이미 저가형 시장에서 후발 주자인 대만에 밀리고 있는 것 같다. 대만은 본격적 양산체제를 갖춘 지 6개월만에 삼성과 LG필립스 등 세계 1,2위의 한국 기업을 따라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시장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70∼80년대부터 특정 산업 분야에 집중적으로 자원을 배치해 국가적 투자에 나선 대만이 D램 시장에서 한국 등 선발 국가를 따라잡은 것과 비슷한 양상이 나타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우리 수출의 최대 주력군인 반도체 분야도 상황은 크게 좋아지지 않고 있다. 지난해 중반만 해도 전년 동기 대비 수출 증가율이 50% 이상을 유지해왔으나 하반기 이후 계속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수출 주력품목인 64메가D램 가격은 아직도 5달러 선을 밑돌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전자산업진흥회 이우종 상무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수출 물량이 30% 이상 증가해왔지만 올해는 증가폭이 15%정도에 그칠 것 같다”고 내다보면서 “부품 소재 산업을 어떻게 육성하는지가 관건”이라고 말한바 있다.
우리의 ‘월드 베스트’제품 불과 55개에 못 미쳐......
과거 몇 년 동안 흔들림 없는 수출 주력 품목으로 손꼽히던 주요 산업 분야에서 올해 들어서는 어느 해보다 고전이 예상되고 있다. 모든 경제정책의 중심이 구조 조정에 맞춰지다보니 금융과 거시 분야 이외에는 경제정책의 수단을 동원하기가 어려웠다. 이 시점에서 자연스레 21세기 한국 경제의 성장을 이끌어갈 주력 산업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점이 생긴다. IT산업도 아직 국민총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극히 낮고 전통 제조업은 몰락 위기라는 말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 산업 연구원 박중구 박사는 “구조 조정이란 비 핵심 분야를 과감하게 축소하고 핵심 역량을 강화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재무구조 개선에만 집중해왔다. 구조 조정 자체가 경쟁력을 강화하는 성과를 전혀 거두지 못했고 금융과 기업. 정부는 모두 도덕적 해이에 빠졌다. 물류, 유통을 강화하고 e-비즈니스 기반을 확충한다는 ‘산업 정책’은 있었으나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일선 기업들의 목소리는 각종 위원회 같은 기구를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 시장을 파고 들어가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산업 분야를 개발, 지원하는 것이라는 데에 모아지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세계 시장에서 1등을 하는 ‘월드 베스트’제품이 별로 없다는 데에 있다. 전경련 조사에 따르면 세계 시장에서 1위의 경쟁력을 갖고 있는 제품은 독일이 669개, 미국이 618개에 이르고 우리와 경쟁 관계인 일본과 대만이 각각 354개, 206개인데 비해 우리는 55개에 불과하다. 80년대만 해도 한국은 메모리반도체, 초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 등 정보기술산업 분야에서 속속 세계 최정상에 올라섰다. 삼성전자의 메모리반도체나 초박막액정표시장치, 휴맥스의 셋톱박스, 대륭정밀의 위성방송수신기 등은 지금까지도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간판 종목들이다. 또 초음파진단기나 CDMA단말기, 음성인식시스템 등도 신규 시장 개척 당시부터 세계 시장에서 돌풍을 몰고 왔던 아이템들이다. 그러나 생물 산업 등 신규 유망산업에서 이들의 뒤를 이을 새로운 간판 스타를 아직 탄생시키지 못하고 있다.
결국 전통 산업을 어떻게 고부가가치화하는지가 관건이라는 이야기이다. 산업 연구원 박중구 박사는 이를 ‘퓨전’이라는 개념으로 기술간의 교류를 활성화 할 필요가 있다는 것. 말하자면 IT와 바이오, 바이오와 전통 산업간에 기술 교류를 활성화하고 여기에 대해서는 정부가 나서서 각종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 이현식 이사는 “정부가 IT나 바이오산업의 미래에 대해 명확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이를 위해 정부가 정보화 시설 투자에 세액 공제 제도를 도입하는 등 기술적 지원에 힘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과거 한국 경제의 성장을 주도하던 조선, 철강, 반도체, 자동차 등 10대 전략산업에 신소재, 정밀 화학 등 새로운 산업 분야를 접목하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부의 ‘보이지 않는 손’역할 필요
글로벌 스타 기업 성장의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인력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력 양성 정책은 아직도 공급자 위주의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차세대 신주도산업으로 꼽히는 생물 산업 분야만 보더라도 이 분야 종사 인력은 전체 과학기술인력의 6% 수준에 머물고 있다. 연평균 3, 4% 증가하고 있는 수준이지만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서는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바이오 분야와 같은 고도 기술 분야일수록 인력 양성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민간과 정부 부문이 공동으로 전문가 네트워크를 구축해 산업 정책 정보를 공유하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사실 인력 양성 정책이나 IT화 자원 등 기술 인프라 구축을 지원하는 방안 이외에 산업 정책과 관련해 정부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미국의 경우 기술 정책을 중시에 놓고 인력 정책, 통상 전략 지원, 전자 상거래 진흥 정책 등이 정교하게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
아직도 구조 조정에 허덕이고 있는 우리 경제 현실에서는 한번쯤 음미해 볼 만한 대목이다. 정부가 바로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시장 자율을 가장 강조하는 미국의 예를 들어 글로벌 경쟁 시대에도 산업 정책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스스로 불러온 ‘산자부 퇴출론’ 이제 제 역할을 찾아야 할때......
산자부가 산업 정책과 관련,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산자부 관계자들도 인정하는 분위기다. 금융-기업 구조 조정이 개혁의 핵심 과제로 대두되면서 산업 정책이 뒷전으로 밀려난 데다 개각 때마다 장관이 바뀌는 등 산자부 위상이 크게 추락했기 때문이다.
일부 산자부 관계자들은 재경부나 금감원 등 타부처의 견제 때문에 제대로 정책을 입안하기도 힘든 상태라고 말한다. 산자부 관계자는 “작년 워크아웃 제도의 존폐문제가 거론될 때 산자부 실무진이 산업 정책 차원에서 검토하기 위해 금감위에 워크아웃 기업에 관한 자료를 요청했지만 금감위 쪽에서 산자부가 무슨 근거로 그런 자료를 달라고 하느냐면서 거절했다”며 “부처간 정책 협조가 아쉽다”고 말했다.
지식 기반 경제 구축 및 신산업 육성 등 언론의 각광을 받을 만한 정책의 경우 산자부는 다른 부처와 주도권 다툼을 벌였다. 한 관계자는 “재정경제부, 정보 통신부, 과학기술부, 보건복지부 등에서 이와 관련한 정책을 내놓으면서 각자 예산을 확보, 산자부 입지가 약화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문제는 이처럼 각 부처들이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정책이 얼마나 효율적이냐 하는 점이다. 산업 연구원 전수봉 연구 위원은 “산업 정책 차원에서는 물론 경제정책 전반에서 기술 혁신을 고양하고 지식 기반을 확충하기 위한 종합적인 정책과 비전이 세워져 있지 않은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최근에는 산자부 내에서조차 산자부의 무력감은 자업자득이라는 자성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구조 조정과 산업 정책이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는 전제 아래 산자부가 제 역할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산자부가 지난해 역시 한때 ‘퇴출론’에 시달리다 기능과 역할을 재편함으로써 살아남은 미국 상무성을 벤치마킹한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할 만하다. 산자부 관계자들은 산자부 스스로 입지를 좁힌 사례로 ‘빅딜’을 꼽는다. 작년에 실패로 끝난 대우자동차 매각 문제가 그러하다. 산자부는 애당초 대우차 해외 매각과 관련,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원이 정책 결정 과정에서 산자부를 소외시키자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다 정작 포드 자동차가 대우차 인수 포기를 선언하자 기자들에게 “산자부는 대우차 해외 매각 문제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 적극 해명했다.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 좌승희 원장은 “과거처럼 특정 산업을 보호 육성하는 차원의 산업 정책은 불가능하다”면서 “현재 상황에서 최선의 산업 정책은 경쟁 촉진 정책”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줌으로써 기업 스스로 경쟁력을 기르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정부 관계자들 역시 연구 개발 투자 확대, 새로운 인력 개발 정책, 인프라 구축 등 새로운 차원의 산업 정책을 거론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정책 수단은 과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 유병규 실장은 “김대중 정부는 대기업-중화학공업 위주에서 벤처-첨단산업 위주 경제로 방향은 잘 틀었으나 정책 수단은 과거처럼 물량을 쏟아 붓는 식이어서 벤처 거품이 형성되도록 했다”고 지적했다. 벤처-첨단산업 육성이 장기간에 걸쳐 추진해야 할 정책임에도 관료들이 단기 실적주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해 부작용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나온 이야기지만 정권이나 장관 교체에 상관없이 장기적 관점에서 일관된 정책을 지속적으로 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지적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중앙 집중도 이제는 지방 정부를 앞세우는 산업화 전략 필요
연구원 좌승희 원장은 “과거처럼 특정 산업을 보호 육성하는 차원의 산업 정책은 불가능하다”면서 “현재 상황에서 최선의 산업 정책은 경쟁 촉진 정책”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줌으로써 기업 스스로 경쟁력을 기르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정부 관계자들 역시 연구 개발 투자 확대, 새로운 인력 개발 정책, 인프라 구축 등 새로운 차원의 산업 정책을 거론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정책 수단은 과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 유병규 실장은 “김대중 정부는 대기업-중화학공업 위주에서 벤처-첨단산업 위주 경제로 방향은 잘 틀었으나 정책 수단은 과거처럼 물량을 쏟아 붓는 식이어서 벤처 거품이 형성되도록 했다”고 지적했다. 벤처-첨단산업 육성이 장기간에 걸쳐 추진해야 할 정책임에도 관료들이 단기 실적주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해 부작용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나온 이야기지만 정권이나 장관 교체에 상관없이 장기적 관점에서 일관된 정책을 지속적으로 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지적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중앙 집중도 이제는 지방 정부를 앞세우는 산업화 전략 필요.
우리나라는 세계에서도 산업 분야의 중앙 집중도가 가장 높은 몇 안되는 나라로 꼽힌다. 97년 통계에 따르면 국토 면적의 11.8%에 불과한 수도권에 전국 사업체 수의 55%, 총생산의 46%가 집중되어 있다고 보고된 바 있다. 문제는 사업체의 숫자뿐만이 아니라 실물 경제활동의 토양이 되는 인력과 자본의 중앙 집중도는 더욱 높다.
IMF사태 이후 이러한 현상은 두 가지 측면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하나는 국내에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한 외국계 기업들이 금융, 정보 인프라가 탄탄한 서울 등 수도권만을 선호했고, 정보 기술(IT) 산업 진흥을 타고 급속하게 늘어난 벤처업체들이 주로 수도권에 둥지를 틀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정부는 각 지역별로 2∼4개의 주력 산업을 선정해 인프라 구축을 지원한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부산에 자동차와 신발, 대구에 섬유와 메카트로닉스, 광주에 광산업과 가전, 대전에 생물 산업과 소프트웨어 등이 지원 대상 주력 산업으로 꼽혔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이러한 선언으로 지역 경제를 살리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시각이다.
지역 괸계자들은 지역 대학이나 연구 기관들에 대한 정책적 지원 등 중장기적 대책이 더욱 절실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WTO(세계무역기구)에서도 특정 산업이나 기업에 대한 정부의 보조금 지급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WTO는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보조금 대상에서 지역 개발 목적의 보조금은 예외로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선 지방 정부를 앞세우는 산업화 전략이야말로 WTO시대에 맞는 방식이라는 주장을 내놓기도 하고 있다.
박스기사
「김영호 前 산업자원부 장관 밀착 인터뷰」
■재임 당시 산업 정책과 관련해
주력했던 점.
- 취임 당시 나는 ‘제조업 르네상스’를 주장했고 IT산업과 굴뚝 산업의 결합을 주장했다. 한편으로는 금융과 산업이 쌍두마차를 이뤄서 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그 결과, 금년도 산업 기술 분야 예산이 20%이상 증가한 것이다.
■구조 조정과 산업 정책은
어떤 관계를 갖는가.
- 구조 조정을 하고 난 뒤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 조정을 사업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추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채권단이 삼성차를 매각할 때는 무조건 가장 좋은 값을 주는 업체에 넘기고 싶겠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값을 조금 적게 받더라도 해당 차종에 관한 한 아시아 또는 글로벌 플랫폼을 한국에 둘 수 있는 방안을 채택해야 한다. 이것이 고용을 증가시키고 수출 증대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길이다.
■산업 정책이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많은데...
- 미국의 경우 미국 정부는 산업에 필요한 여러 가지 인프라를 제공하고 기술개발 시스템, 정보 시스템 등을 구축해 주고 있다. 일본은 기업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업에 대해 직접 지원하지 않은 것뿐이다. 우리나라도 인프라 측면에서 미국만큼은 해줘야 한다.
■재계에서는 민관합동의 경쟁력 강화 기구를 제안하고 있는데...
- 내가 재임 당시에도 전경련에서 함께 하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았다. 산업 경쟁력 강화는 전경련만 하는 것이 아니라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도 참여해야 하고 산학 협동도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노동자 세력이 경쟁력 강화의 한 축을 형성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범국가적인 경쟁력 강화 체제가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