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벳 업계 세계 최정상의 자리에 우뚝 서다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내는 데 한 몫을 했던 섬유산업은 과거의 흥성을 뒤로한 채 점차 쇠퇴해가고 있다. 요동치는 국제유가와 환율, 중국 등 후발개도국의 맹추격, 브랜드 확보 및 시장개척 능력 미비 등이 원인으로 꼽히고 있지만 뾰족한 대책이 나오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데 사양 업종인 섬유산업에만 매진해 세계 1등 기업으로 올라선 회사가 있다. 48년 세월을 벨벳산업에만 몰두한 (주)영도벨벳이 바로 그 회사이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란 말이 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뜻으로 오세훈 서울시장이 2008년 신년사에서 언급해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 사례를 찾아볼 필요 없이 영도벨벳이야말로 불광불급의 대표적인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영도벨벳 본사의 쉼터에는 ‘내가 미치지 않으면 고객이 미친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영도벨벳의 사훈도 범상치가 않다. ‘손에는 늘 일이 함께 하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것이 이 회사의 사훈이다. 섬유업계 내에서 신화적인 존재로 불리는 영도벨벳의 범상치 않음은 회사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THE WORLD BEST of VELVET
영도벨벳만이 보유한 설비시설과 기술로 제직하는 자카드 셀비지에는 ‘THREE EAGLE'이 새겨져 있다. ‘브랜드 창조경영’이라는 원칙을 영도벨벳의 모든 제품에 새겨져 있는 자카드 셀비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바로 ‘THREE EAGLE'이 영도벨벳의 대표 브랜드 로고이다. 창업주인 고(故) 이원화 회장이 고안했다고 한다. 하늘을 지배하는 독수리의 기상처럼 비상하겠다는 이 회장의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의 바람대로 오늘날 영도벨벳의 ‘THREE EAGLE'은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 「조르조 아르마니」, 「엔클라인」, 「탈보트」, 「자라」등 세계 최고급 패션브랜드들이 영도벨벳의 ‘THREE EAGLE'을 쓰는 것이다.
이에 힘입어 영도벨벳은 2001년에는 벨벳 산업계에서 생산 1위, 수출 1위 기업으로 도약했고 세계 시장점유율에서도 9.4%로 1위를 기록했다. 명실상부 글로벌 기업으로 입지를 굳힌 것이다. 2006년에는 산업자원부가 영도벨벳이 생산하는 코튼 벨벳과 폴리 벨벳을 차세대 세계일류상품으로 선정하였다. 차세대 세계일류상품은 산업자원부가 3년 이내에 세계 시장 점유율 5위 안에 들 품목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100% 국산제품 생산만을 지켜온 공로를 인정받아 국산상품인증마크도 획득하였다.
영도벨벳은 연사부터 제직, 가공과 완제품까지 일괄생산처리 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벨벳 생산 기업으로 ‘한국 벨벳의 자존심’이라 불리고 있다. 2001년에는 일본산 원사가 아닌 국산 폴리에스테르 원사를 원료로 한 벨벳 개발에 성공하는데 국산 원료 개발에 매진한 지 20여 년 만에 얻어낸 쾌거였다. 이때 개발한 폴리 벨벳은 폴리에스터 분할사를 벨벳 제품에 접목한 세계 최초의 벨벳으로서 왜 영도벨벳이 ‘한국 벨벳의 자존심’이라 불리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벨벳과 함께한 48년
영도벨벳의 류병선 회장은 벨벳산업에서 세계 최정상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던 저력을 “진실한 마음으로 사업을 해야지 이윤을 최고로 여기는 욕심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류병선 회장은 새해 인사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가 아닌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라고 한다. 한 것도 없이 복만 많이 받길 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도벨벳과 류병선 회장이 걸어온 길을 보면 벨벳에 관한 진실한 사랑과 열정을 알 수 있다. 영도벨벳은 1960년 류병선 회장의 남편인 고(故) 이원화 회장이 기계 4대를 빌려 창업하면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솥에 불을 때는 재래방식으로 염색을 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1973년 일본 하세가와사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고급 벨벳 제품 개발에 성공하고 중동 시장에 진출하면서 회사가 조금씩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그러나 영도벨벳의 성장을 경계한 일본 업체들의 견제가 시작된다. 영도벨벳에 제공하던 원료공급물량을 제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 업체들의 견제를 따돌리고자 영도벨벳은 1980년대부터 국산 원료 개발에 착수한다.
영도벨벳 역시 IMF위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1995년 일괄생산을 위한 대대적 설비를 해외 리스를 통해 도입한 것이 견디기 어려운 위기를 불러왔다. 류병선 회장이 1997년 사장으로 경영 일선에 복귀하면서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2004년 워크아웃을 졸업하면서 고비를 넘긴다. 위기를 해결한 1등 공신은 연이은 신제품 개발 성공이다. 워크아웃 상태에서도 영도벨벳은 기술 개발을 중단하지 않았고 2000년에 세계 최초로 벨벳 벽지 개발하였고 이어 2001년에는 순수 국산 기술의 벨벳 원료로 만든 폴리 벨벳이 개발된 것이다. 신제품들은 세계 시장에서 큰 방향을 이끌었고 영도벨벳은 재기에 성공한다. 영도벨벳의 제품은 현재 일본 이토츄패션에도 사용하고 있어 영도벨벳의 성장을 견제해 온 일본에 역수출되고 있다.
영도벨벳은 LCD 러빙(Rubbing)포 개발에 한창이다. LCD 러빙포는 러빙을 통해 액정분자를 일정한 방향으로 정렬시키는 소재이다. 현재 일본이 아기하라 오리모노사와 다이나카사가 독점 생산하고 있는데 의류용 벨벳과는 다르게 뒷면의 코팅 처리가 필요하고 의류용 벨벳의 2배 정도의 높은 밀도로 만들어야 하는 제품이다. 벨벳 산업에만 관련된 특허를 14종이나 보유하고 있는 영도벨벳의 기술력이라면 머지않아 LCD 러빙포 개발이 최종적으로 성공할 전망이다. 섬유업은 사양산업이라는 고정관념을 벨벳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넘어섰기에 가능한 일이다.
영도벨벳이 최고인 이유
영도벨벳은 19년 넘게 노사분규가 없는 무분규 사업장이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류병선 회장은 지난 1월 ‘제11회 경상북도 산업평화대상제’에서 금상을 받았다. “우리 구미가 노사갈등 때문에 문 닫는 일이 없다면 전 세계에서 구미를 찾아올 것입니다.” 함께 위기를 극복해낸 영도벨벳 가족들에게 늘 고맙다는 그는 “회장은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며 직원이라 부르지 않고 ‘영도가족’이라 부르며 정말 가족처럼 대하려 노력한다고 했다. 영도벨벳은 2006년도부터 주5일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으며, 남녀를 불문하고 출산하면 100만 원 출산지원비와 남자직원에게도 유급출산휴가제도를 받을 수 있도록 운영되고 있다. 직원들의 자기계발에도 신경을 써서 미혼인 여성 직원에게는 학기당 100만 원 상당의 학자금도 지원하고 있다.
영도벨벳은 서로 단합을 도모하려고 여러 행사를 여는데 그 중 ‘가족의 밤’이 대표적인 행사이다. 내 가족이라면 내 가족도 나와 같은 곳에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류병선 회장의 지론에 의해 2005년부터는 호텔을 빌려 ‘가족의 밤’을 보낸다. 앞서 소개한 ‘내가 미치지 않으면 고객이 미친다’는 구호도 ‘가족의 밤’ 행사 중에 나왔다고 한다. 회사가 보유한 콘도시설과 골프위락회원권 사용도 생산직 간부들에게까지 열려있는데 이렇게 차이를 두지 않는 회사의 분위기도 다른 회사와 차별화된 영도벨벳만의 특징이다.
“일본에 출장을 나간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누군가가 ‘사장 자리가 좋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어요. 저는 ‘한국에서 사장의 ‘사(社)’자는 죽을 ‘사(死)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어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사람이기 때문에 나중에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내 영도가족들이 우리회사가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 내 소원이다’라고 말했어요. 지금도 제 소원은 변함이 없습니다.”
류병선 회장이 언젠가 인도의 바이어와 두바이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인도의 바이어가 딸의 결혼식에 초청했고 그러겠다고 대답했는데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류 회장은 고객의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을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자 직접 인도로 가겠다고 나섰고 그곳에서 인도 바이어의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벨벳이 있는 곳이라면 죽음의 길이라도 내가 선택해서 가는 모습을 본받게 하고 싶었어요. 저는 많은 재산이나 명예보다는 그런 자세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영도벨벳을 둘러싼 주변 환경은 그리 녹록지 않다. 벨벳제품이 의류시장에서는 규모 자체가 축소되고 있으며 일본, 중국 등이 저가의 벨벳제품을 선보이며 영도벨벳과 경쟁하고 있다. 영도벨벳은 홈데코레이션 산업(침장용제품류, 원단벽지류, 가구용제품류)과 첨단기술 산업(LCD 러빙포 제품)으로 벨벳 사업의 범위를 확장하여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어떤 위기가 닥쳐와도 48년간 닦아온 최고의 벨벳을 생산한다는 자존심을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영도벨벳의 혁신 성공으로 ‘파고들면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 입증된다면 침체한 섬유산업계에도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벨벳 단일기업으로서 최초로 1억 불 수출 기업이 되겠다는 영도벨벳의 계획이 가까운 시일 안에 실현되길 기대한다.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내는 데 한 몫을 했던 섬유산업은 과거의 흥성을 뒤로한 채 점차 쇠퇴해가고 있다. 요동치는 국제유가와 환율, 중국 등 후발개도국의 맹추격, 브랜드 확보 및 시장개척 능력 미비 등이 원인으로 꼽히고 있지만 뾰족한 대책이 나오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데 사양 업종인 섬유산업에만 매진해 세계 1등 기업으로 올라선 회사가 있다. 48년 세월을 벨벳산업에만 몰두한 (주)영도벨벳이 바로 그 회사이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란 말이 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뜻으로 오세훈 서울시장이 2008년 신년사에서 언급해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 사례를 찾아볼 필요 없이 영도벨벳이야말로 불광불급의 대표적인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영도벨벳 본사의 쉼터에는 ‘내가 미치지 않으면 고객이 미친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영도벨벳의 사훈도 범상치가 않다. ‘손에는 늘 일이 함께 하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것이 이 회사의 사훈이다. 섬유업계 내에서 신화적인 존재로 불리는 영도벨벳의 범상치 않음은 회사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THE WORLD BEST of VELVET
영도벨벳만이 보유한 설비시설과 기술로 제직하는 자카드 셀비지에는 ‘THREE EAGLE'이 새겨져 있다. ‘브랜드 창조경영’이라는 원칙을 영도벨벳의 모든 제품에 새겨져 있는 자카드 셀비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바로 ‘THREE EAGLE'이 영도벨벳의 대표 브랜드 로고이다. 창업주인 고(故) 이원화 회장이 고안했다고 한다. 하늘을 지배하는 독수리의 기상처럼 비상하겠다는 이 회장의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의 바람대로 오늘날 영도벨벳의 ‘THREE EAGLE'은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 「조르조 아르마니」, 「엔클라인」, 「탈보트」, 「자라」등 세계 최고급 패션브랜드들이 영도벨벳의 ‘THREE EAGLE'을 쓰는 것이다.
이에 힘입어 영도벨벳은 2001년에는 벨벳 산업계에서 생산 1위, 수출 1위 기업으로 도약했고 세계 시장점유율에서도 9.4%로 1위를 기록했다. 명실상부 글로벌 기업으로 입지를 굳힌 것이다. 2006년에는 산업자원부가 영도벨벳이 생산하는 코튼 벨벳과 폴리 벨벳을 차세대 세계일류상품으로 선정하였다. 차세대 세계일류상품은 산업자원부가 3년 이내에 세계 시장 점유율 5위 안에 들 품목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100% 국산제품 생산만을 지켜온 공로를 인정받아 국산상품인증마크도 획득하였다.
영도벨벳은 연사부터 제직, 가공과 완제품까지 일괄생산처리 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벨벳 생산 기업으로 ‘한국 벨벳의 자존심’이라 불리고 있다. 2001년에는 일본산 원사가 아닌 국산 폴리에스테르 원사를 원료로 한 벨벳 개발에 성공하는데 국산 원료 개발에 매진한 지 20여 년 만에 얻어낸 쾌거였다. 이때 개발한 폴리 벨벳은 폴리에스터 분할사를 벨벳 제품에 접목한 세계 최초의 벨벳으로서 왜 영도벨벳이 ‘한국 벨벳의 자존심’이라 불리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벨벳과 함께한 48년
영도벨벳의 류병선 회장은 벨벳산업에서 세계 최정상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던 저력을 “진실한 마음으로 사업을 해야지 이윤을 최고로 여기는 욕심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류병선 회장은 새해 인사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가 아닌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라고 한다. 한 것도 없이 복만 많이 받길 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도벨벳과 류병선 회장이 걸어온 길을 보면 벨벳에 관한 진실한 사랑과 열정을 알 수 있다. 영도벨벳은 1960년 류병선 회장의 남편인 고(故) 이원화 회장이 기계 4대를 빌려 창업하면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솥에 불을 때는 재래방식으로 염색을 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1973년 일본 하세가와사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고급 벨벳 제품 개발에 성공하고 중동 시장에 진출하면서 회사가 조금씩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그러나 영도벨벳의 성장을 경계한 일본 업체들의 견제가 시작된다. 영도벨벳에 제공하던 원료공급물량을 제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 업체들의 견제를 따돌리고자 영도벨벳은 1980년대부터 국산 원료 개발에 착수한다.
영도벨벳 역시 IMF위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1995년 일괄생산을 위한 대대적 설비를 해외 리스를 통해 도입한 것이 견디기 어려운 위기를 불러왔다. 류병선 회장이 1997년 사장으로 경영 일선에 복귀하면서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2004년 워크아웃을 졸업하면서 고비를 넘긴다. 위기를 해결한 1등 공신은 연이은 신제품 개발 성공이다. 워크아웃 상태에서도 영도벨벳은 기술 개발을 중단하지 않았고 2000년에 세계 최초로 벨벳 벽지 개발하였고 이어 2001년에는 순수 국산 기술의 벨벳 원료로 만든 폴리 벨벳이 개발된 것이다. 신제품들은 세계 시장에서 큰 방향을 이끌었고 영도벨벳은 재기에 성공한다. 영도벨벳의 제품은 현재 일본 이토츄패션에도 사용하고 있어 영도벨벳의 성장을 견제해 온 일본에 역수출되고 있다.
영도벨벳은 LCD 러빙(Rubbing)포 개발에 한창이다. LCD 러빙포는 러빙을 통해 액정분자를 일정한 방향으로 정렬시키는 소재이다. 현재 일본이 아기하라 오리모노사와 다이나카사가 독점 생산하고 있는데 의류용 벨벳과는 다르게 뒷면의 코팅 처리가 필요하고 의류용 벨벳의 2배 정도의 높은 밀도로 만들어야 하는 제품이다. 벨벳 산업에만 관련된 특허를 14종이나 보유하고 있는 영도벨벳의 기술력이라면 머지않아 LCD 러빙포 개발이 최종적으로 성공할 전망이다. 섬유업은 사양산업이라는 고정관념을 벨벳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넘어섰기에 가능한 일이다.
영도벨벳이 최고인 이유
영도벨벳은 19년 넘게 노사분규가 없는 무분규 사업장이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류병선 회장은 지난 1월 ‘제11회 경상북도 산업평화대상제’에서 금상을 받았다. “우리 구미가 노사갈등 때문에 문 닫는 일이 없다면 전 세계에서 구미를 찾아올 것입니다.” 함께 위기를 극복해낸 영도벨벳 가족들에게 늘 고맙다는 그는 “회장은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며 직원이라 부르지 않고 ‘영도가족’이라 부르며 정말 가족처럼 대하려 노력한다고 했다. 영도벨벳은 2006년도부터 주5일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으며, 남녀를 불문하고 출산하면 100만 원 출산지원비와 남자직원에게도 유급출산휴가제도를 받을 수 있도록 운영되고 있다. 직원들의 자기계발에도 신경을 써서 미혼인 여성 직원에게는 학기당 100만 원 상당의 학자금도 지원하고 있다.
영도벨벳은 서로 단합을 도모하려고 여러 행사를 여는데 그 중 ‘가족의 밤’이 대표적인 행사이다. 내 가족이라면 내 가족도 나와 같은 곳에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류병선 회장의 지론에 의해 2005년부터는 호텔을 빌려 ‘가족의 밤’을 보낸다. 앞서 소개한 ‘내가 미치지 않으면 고객이 미친다’는 구호도 ‘가족의 밤’ 행사 중에 나왔다고 한다. 회사가 보유한 콘도시설과 골프위락회원권 사용도 생산직 간부들에게까지 열려있는데 이렇게 차이를 두지 않는 회사의 분위기도 다른 회사와 차별화된 영도벨벳만의 특징이다.
“일본에 출장을 나간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누군가가 ‘사장 자리가 좋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어요. 저는 ‘한국에서 사장의 ‘사(社)’자는 죽을 ‘사(死)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어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사람이기 때문에 나중에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내 영도가족들이 우리회사가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 내 소원이다’라고 말했어요. 지금도 제 소원은 변함이 없습니다.”
류병선 회장이 언젠가 인도의 바이어와 두바이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인도의 바이어가 딸의 결혼식에 초청했고 그러겠다고 대답했는데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류 회장은 고객의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을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자 직접 인도로 가겠다고 나섰고 그곳에서 인도 바이어의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벨벳이 있는 곳이라면 죽음의 길이라도 내가 선택해서 가는 모습을 본받게 하고 싶었어요. 저는 많은 재산이나 명예보다는 그런 자세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영도벨벳을 둘러싼 주변 환경은 그리 녹록지 않다. 벨벳제품이 의류시장에서는 규모 자체가 축소되고 있으며 일본, 중국 등이 저가의 벨벳제품을 선보이며 영도벨벳과 경쟁하고 있다. 영도벨벳은 홈데코레이션 산업(침장용제품류, 원단벽지류, 가구용제품류)과 첨단기술 산업(LCD 러빙포 제품)으로 벨벳 사업의 범위를 확장하여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어떤 위기가 닥쳐와도 48년간 닦아온 최고의 벨벳을 생산한다는 자존심을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영도벨벳의 혁신 성공으로 ‘파고들면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 입증된다면 침체한 섬유산업계에도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벨벳 단일기업으로서 최초로 1억 불 수출 기업이 되겠다는 영도벨벳의 계획이 가까운 시일 안에 실현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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