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역사를 새로 쓴 타이거 우즈의 성공신화
골프에 대한 개념 재정립, 사회적 역할 파장도 커
골프는 중산층, 특히 백인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상식과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을 과감히 깨고 새로이 골프 역사를 쓰게 한 타이거 우즈(Tiger Woods). 골프가 그만큼 대중화된 일면에는 많은 골퍼들의 노력과 이들을 일선에 내세운 스포츠 마케팅의 역할도 컸다. 타이거 우즈의 스폰서인 나이키 골프는 이 천재적인 골퍼를 통해 극적으로 회생할 수 있었다. 그러한 국가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타이거 우즈가 가진 저력은 상상을 초월케 한다. 우리나라 골퍼들의 해외진출과 각종 대회에서의 선전으로 전국민들의 관심이 급부상하고 있는 시점에서, 체력과 기술, 정신력 등 철저한 자기관리로 세계적 스타로 자리잡은 타이거 우즈의 생애는 여러모로 시사하고 있는 점이 많다.
무서운 질주, 골프의 역사를 새로 쓰다
330야드에 달하는 장타력, 젊은 나이임에도 위기에 대한 차분한 대처, 정교하고 섬세한 퍼팅기술 등 타이거 우즈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금시 그가 가진 흡인력에 매료당하고 만다. 골프의 대명사로 불리던 잭 니클라우스에 버금가는 이 흑인 청년의 무서운 질주는, 1997년 ‘신만이 우승자를 점지한다’는 악명 높은 ANGC에서 61년 마스터즈대회 역사상 최연소 나이(21세)로 그린재킷(대회 우승자에게 수여하는 녹색재킷)을 입으면서 돌풍을 예고케 했다. 그는 최연소 우승 이외에도 최소타(18언더파 270타), 2위와의 최다 점수 타(12타), 유색 인종 첫 우승 등 각종 기록을 장식하며 골프의 역사를 새롭게 쓰게 했다.
그의 골프에 대한 천재성은 어려서부터 빛을 발했다. 아버지에게 골프를 배운 후 16세 때인 1991년에 이어 1992~1993년 연속으로 미국 주니어 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우승하여, 매리 루 리턴 이래 처음으로 3년 연속 우승의 기록을 세웠다. 뒤이어 1994년 US 월드 아마추어, 1995년 워커컵, 1997년 리더컵 대회에 국가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1996년 프로로 전향해 처음으로 PGA투어레 참가, 라스베거스 인비테이셔널, 월트 디즈니 월드/올즈 모빌 클래식 우승을 거둠으로써 1996년 PAG투어 신인상을 받았다. 그 다음해에도 PGA의 메르세데스 챔피언십, 마스터스 토너먼트, GTE 마이런 넬슨 골프 클래식, 모터롤라 웨스턴 오픈을 제개함으로써 프로 골프계를 뒤흔들며 프로 골프사 대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후에도 우즈는 각종 대회에 참여하여 우승을 거머쥐었으며 특히, 2004년 8월 17일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 밸핼러 골프클럽에서 열린 제82회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함으로써, 한 해 동안 벌어지는 4차례 메이저 대회 중 3개를 석권한 트리플 크라운(3관왕)을 석권한 두 번째 선수가 됐다. 또한 US오픈에서 106년 역사상 처음으로 두 자릿수 언더파(12언더파)와 역대 최다 타수 차(15타) 타이기록을 세웠고, 브리티시오픈에서는 역대 메이저대회 최저타 우승기록을 잇따라 수립했다. 최연소 그랜드슬래머 등극에 이어 지금까지 무수한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그의 무서운 질주가 언제까지 이어져갈 지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타이거 우즈 재단’ 설립, 사회 선도적 역할
그의 이러한 승리들은 단순한 대회 우승의 차원을 넘어 경제?사회적 전반에 파급효과를 끼쳤다. 타이거 우즈 열풍은 우즈 1인이 골프산업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만으로도 PGA전체 수입의 절반을 담당할 정도로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우즈가 출전하지 않는 대회는 수입이 급감하거나 ‘반쪽짜리 대회’라는 오명을 면키 어려울 정도로 그의 대중 스타성은 경제적인 면에서도 그 수치를 가늠하기 힘들다. 우즈와의 광고계약 및 스폰서로 줄을 대기 위한 기업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그의 부 또한 상상을 초월하게 한다. 우승상금은 물론 메인 스폰서인 나이키, 자동차회사 뷰익, 아멕스 카드 등 수 없이 많은 계약 등으로 최고의 스포츠스타 갑부에 이름을 올렸다.
우즈가 이렇게 대중적인 스타로 자리잡은 배경에는 매스미디어의 역할도 상당히 컸다. 초기 골프 전설이었던 잭 니클라우스는 “타이거 우즈의 타고난 재능과 현대의 첨단 미디어를 합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골프인구를 창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며 이는 모두를 위해서도 좋은 것”이라며 미디어와 우즈의 결합을 강조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
경제적 가치를 차지하고서라도, 유색인종으로서 프로골프계의 신화를 창조한 그로 인해 골프에 대한 개념의 새로운 정립과 알리와 같이 사회선도적인 인물로의 역할을 기대케 했다. 또한 백인 상류층의 엘리티시즘(Eliticism)을 대표하는 스포츠로 인식되던 골프가 청소년은 물론 다양한 계층을 형성하면서 새로운 중흥의 기회를 맞게 했다.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키면서 우즈는 신화적인 우상이 되었으며, 많은 이들의 희망으로 인식되고 있다. 우즈는 상당 금액을 출연한 ‘타이거 우즈 재단’을 설립하여 도시청소년들에게 골프를 가르치고, 아동교육에서 아동학대 추방에 이르는 광범위한 사회활동까지 해 오고 있다.
타이거 우즈가 이러한 대중적 스타로 자리매김하기까지의 과정을 회자하며 관련된 마케팅과 처세술에 대해 언급할 정도로 그는 신화적 인물이 됐다. 이러한 바탕에는 그의 천재성도 있겠지만, 끊임없는 노력과 자신의 꿈을 향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회적 차별의 벽을 넘어 골프계의 역사로 당당히 우뚝 선 그의 행보를 앞으로도 많은 세인들은 관심과 사랑으로 지켜볼 것이다.
골프에 대한 개념 재정립, 사회적 역할 파장도 커
골프는 중산층, 특히 백인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상식과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을 과감히 깨고 새로이 골프 역사를 쓰게 한 타이거 우즈(Tiger Woods). 골프가 그만큼 대중화된 일면에는 많은 골퍼들의 노력과 이들을 일선에 내세운 스포츠 마케팅의 역할도 컸다. 타이거 우즈의 스폰서인 나이키 골프는 이 천재적인 골퍼를 통해 극적으로 회생할 수 있었다. 그러한 국가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타이거 우즈가 가진 저력은 상상을 초월케 한다. 우리나라 골퍼들의 해외진출과 각종 대회에서의 선전으로 전국민들의 관심이 급부상하고 있는 시점에서, 체력과 기술, 정신력 등 철저한 자기관리로 세계적 스타로 자리잡은 타이거 우즈의 생애는 여러모로 시사하고 있는 점이 많다.
무서운 질주, 골프의 역사를 새로 쓰다
330야드에 달하는 장타력, 젊은 나이임에도 위기에 대한 차분한 대처, 정교하고 섬세한 퍼팅기술 등 타이거 우즈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금시 그가 가진 흡인력에 매료당하고 만다. 골프의 대명사로 불리던 잭 니클라우스에 버금가는 이 흑인 청년의 무서운 질주는, 1997년 ‘신만이 우승자를 점지한다’는 악명 높은 ANGC에서 61년 마스터즈대회 역사상 최연소 나이(21세)로 그린재킷(대회 우승자에게 수여하는 녹색재킷)을 입으면서 돌풍을 예고케 했다. 그는 최연소 우승 이외에도 최소타(18언더파 270타), 2위와의 최다 점수 타(12타), 유색 인종 첫 우승 등 각종 기록을 장식하며 골프의 역사를 새롭게 쓰게 했다.
그의 골프에 대한 천재성은 어려서부터 빛을 발했다. 아버지에게 골프를 배운 후 16세 때인 1991년에 이어 1992~1993년 연속으로 미국 주니어 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우승하여, 매리 루 리턴 이래 처음으로 3년 연속 우승의 기록을 세웠다. 뒤이어 1994년 US 월드 아마추어, 1995년 워커컵, 1997년 리더컵 대회에 국가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1996년 프로로 전향해 처음으로 PGA투어레 참가, 라스베거스 인비테이셔널, 월트 디즈니 월드/올즈 모빌 클래식 우승을 거둠으로써 1996년 PAG투어 신인상을 받았다. 그 다음해에도 PGA의 메르세데스 챔피언십, 마스터스 토너먼트, GTE 마이런 넬슨 골프 클래식, 모터롤라 웨스턴 오픈을 제개함으로써 프로 골프계를 뒤흔들며 프로 골프사 대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후에도 우즈는 각종 대회에 참여하여 우승을 거머쥐었으며 특히, 2004년 8월 17일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 밸핼러 골프클럽에서 열린 제82회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함으로써, 한 해 동안 벌어지는 4차례 메이저 대회 중 3개를 석권한 트리플 크라운(3관왕)을 석권한 두 번째 선수가 됐다. 또한 US오픈에서 106년 역사상 처음으로 두 자릿수 언더파(12언더파)와 역대 최다 타수 차(15타) 타이기록을 세웠고, 브리티시오픈에서는 역대 메이저대회 최저타 우승기록을 잇따라 수립했다. 최연소 그랜드슬래머 등극에 이어 지금까지 무수한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그의 무서운 질주가 언제까지 이어져갈 지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타이거 우즈 재단’ 설립, 사회 선도적 역할
그의 이러한 승리들은 단순한 대회 우승의 차원을 넘어 경제?사회적 전반에 파급효과를 끼쳤다. 타이거 우즈 열풍은 우즈 1인이 골프산업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만으로도 PGA전체 수입의 절반을 담당할 정도로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우즈가 출전하지 않는 대회는 수입이 급감하거나 ‘반쪽짜리 대회’라는 오명을 면키 어려울 정도로 그의 대중 스타성은 경제적인 면에서도 그 수치를 가늠하기 힘들다. 우즈와의 광고계약 및 스폰서로 줄을 대기 위한 기업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그의 부 또한 상상을 초월하게 한다. 우승상금은 물론 메인 스폰서인 나이키, 자동차회사 뷰익, 아멕스 카드 등 수 없이 많은 계약 등으로 최고의 스포츠스타 갑부에 이름을 올렸다.
우즈가 이렇게 대중적인 스타로 자리잡은 배경에는 매스미디어의 역할도 상당히 컸다. 초기 골프 전설이었던 잭 니클라우스는 “타이거 우즈의 타고난 재능과 현대의 첨단 미디어를 합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골프인구를 창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며 이는 모두를 위해서도 좋은 것”이라며 미디어와 우즈의 결합을 강조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
경제적 가치를 차지하고서라도, 유색인종으로서 프로골프계의 신화를 창조한 그로 인해 골프에 대한 개념의 새로운 정립과 알리와 같이 사회선도적인 인물로의 역할을 기대케 했다. 또한 백인 상류층의 엘리티시즘(Eliticism)을 대표하는 스포츠로 인식되던 골프가 청소년은 물론 다양한 계층을 형성하면서 새로운 중흥의 기회를 맞게 했다.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키면서 우즈는 신화적인 우상이 되었으며, 많은 이들의 희망으로 인식되고 있다. 우즈는 상당 금액을 출연한 ‘타이거 우즈 재단’을 설립하여 도시청소년들에게 골프를 가르치고, 아동교육에서 아동학대 추방에 이르는 광범위한 사회활동까지 해 오고 있다.
타이거 우즈가 이러한 대중적 스타로 자리매김하기까지의 과정을 회자하며 관련된 마케팅과 처세술에 대해 언급할 정도로 그는 신화적 인물이 됐다. 이러한 바탕에는 그의 천재성도 있겠지만, 끊임없는 노력과 자신의 꿈을 향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회적 차별의 벽을 넘어 골프계의 역사로 당당히 우뚝 선 그의 행보를 앞으로도 많은 세인들은 관심과 사랑으로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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