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삶을 살다간 ‘불멸의 화가, 반 고흐 展’
10여 년 간의 짧은 작가활동 중에도 2,000여 점의 다작 남겨
강렬한 색체와 격렬한 필치로 자신만의 작품을 확립해 현대미술사 표현주의 흐름에 강한 영향을 끼진 세기의 거장 빈센트 반 고흐. 그는 렘브란트 이후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일반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사랑받고 있는 작가 중 하나이기도 하다. 37세의 젊은 나이에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고흐는 10여 년간 예술가의 삶을 살면서, 불꽃같은 그의 정열과 젊음을 화폭에서 불살랐다. 그 기간 동안 고흐는 유화 850여 점, 드로잉 1,100여 점 등 총 2,000여 점이라는 다작을 남기고 시간 속에 사라진 진정한 시대의 거장으로 인식되고 있다.
자신을 던져 불사른 예술혼, 미술사의 신화 ‘반 고흐’
1853년 네덜란드 준데르트에서 개신교 목사의 6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난 고흐는 16세 때부터 숙부가 일하고 있는 구필화랑의 헤이그 지점에서 수습사원으로 일했다. 날마다 예술작품을 접하면서 예술적 감수성을 일깨웠으며, 렘브란트와 할스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와 당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던 프랑스 화가 밀레와 코로를 가장 경외했다. 실연에 의해 인간적 애정을 얻고 싶은 욕망이 좌절되자 점점 더 고독해지고 인생관이 어두워진 그는, 인간에 대해 헌신하고자하는 욕망을 품고 성직자가 되려고 했지만 정통교리에 대한 교회 당국과의 충돌은 그 마저도 허락지 않았다. 선교사업 시 느낀 현실과의 괴리감 속에서 그는 절망 속에 모든 사람들과 인연을 끊었고, 그와 동시에 그림을 시작하면서 1880년에 이르러서는 그 길이 자신의 천직임을 발견해 냈다. 그는 예술을 통해 인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 여겼으며, 자신의 창조력을 깨달으면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1880년 27세 나이에 예술가의 길로 입문한 고흐는 독학의 한계를 느끼고 미술아카데미에 등록을 했지만, 창의성이 결여된 학계의 가르침을 거부하면서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에텐과 헤이그, 드렌테, 뉘넨, 안트베르펜 등을 전전하며 ‘슬픔’과 ‘감자먹는 사람들’ 같은 작품들도 탄생시켰지만, 대부분 인물묘사의 습작들이나 명암의 처리 등을 위한 여러 습작들과 드로잉 작품들을 주로 했다. 자연적인 주제를 선호했던 그는 밀레처럼 농민화가가 되기 위해 여러 농촌을 방문하여 습작들을 남겼다. 가난한 농민사회의 처참한 생활상을 화폭에 담으며 미술을 통해 인류애를 실현하고자 한 그의 예술적 의지가 돋보이는 시기였다. 1886년부터 테오와 함께 지낸 파리생활은 여러 면에서 고흐의 화풍을 정립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인상주의 영향을 받은 파리에서 그의 작품은 점점 밝아지게 되고, 폴 시냑과 조르쥬 쉬라로 대변되는 신인상주의의 점묘법에도 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의 일생 자화상 40여 점 중 35점을 파리시기에 그린 것도 눈여겨 볼만하다.
이상향을 꿈꾸며 색채의 무한한 신비를 마음껏 구현한 아를르 시기에는, 남프랑스에서 화가들과 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해 그 유명한 ‘노란집’도 빌리고 파리에서 고갱도 초청하여 활발한 시기를 보낸다. 주요걸작들을 탄생시킨 가장 활발한 화가생활을 보낸 시기였지만, 고갱과의 불화로 자신의 귀까지 잘라냈을 정도로 심적으로는 많은 갈등을 겪던 고비의 순간으로 여겨진다.
불타는 예술혼을 자연의 묘사를 통해 분출했던 셍레미 시기에는 그의 37세 여정 중 가장 처절하고 힘들었지만 자연의 빛과 형태를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양식으로 발전시켜, 회화를 통한 구원의 길로 접어든 시기다. 정신요양원에서도 정신이 돌아오면 미친 듯 그림에 몰두했던 그는 그 시기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명작들을 쏟아냈다.
고흐가 3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기 전에 보냈던 마지막 2달 오베르 쉬르 우아즈 시기는, 아마추어 화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가쉐 박사를 소개받고 67일간 70여 점의 작품을 그리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그는 가쉐 박사와의 불화, 동생 테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경제적 죄의식, 예술가로서 성공하지 못한 자신의 삶을 심히 비관했다. 주위와 단절한 채 오로지 작품 활동에만 몰두했던 그는 어느 날 자신에게 주어진 예술과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불행이다”라고 말한 그의 말을 보더라도 얼마나 고흐 자신이 가난과 좌절로 점철된 비운의 삶을 살면서 고통스러워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고흐의 작품세계
고흐의 작품과 주고받은 서신 내용을 보면 네덜란드에 머무는 동안 자연의 위대함과 진실함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885년 그는 ‘감자먹는 사람들’에서는 가난을 드러내기 위해 더러운 감자의 색깔과 둔중하고 단순화된 형태들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당시 수습 선교사이기도 했던 고흐는 농부들의 비참한 삶을 함께 하며, 가능한 한 그 표현을 명료하게 하기위해 종래의 자연주의의 한계를 뛰어 넘고자 노력했다.
그는 끊임없는 연구와 시도 속에서 루벤스의 단순한 표현수단, 솔직한 표현방법, 색채들을 결합해 분위기를 표현하는 능력 등에 영감을 얻었다. 일본 우키요에와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강렬하고 격렬한 필치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루벤스의 단순한 표현수단, 솔직한 표현방법, 색채들을 결합하여 분위기를 표현하는 능력 등은 고흐에게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다.
고흐는 1888년 아를르에서 그린 ‘밤의 카페’에서 눈부신 불빛과 현기증을 일으키게 하는 원근법, 웅크리고 있는 외로운 손님들의 악몽같은 분위기를 묘사하며, 색채의 상징주의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는 “황록색과 거친 청록색을 사용함으로써, 싸구려 술집의 어두운 힘, 유황 냄새 풍기는 악마의 용광로 같은 분위기의 모든 것을 나타내야 했다”는 말고 자신이 고갱과 함께 단골로 찾던 작은 카페를 어둡게 그려냈다. 하지만 이내 곧 그의 작품은 눈부신 빛을 찾아내어 담기 시작한다. 고흐는 아를르의 밝은 태양에 감격했으며 ‘아틀의 도개교’ ‘해바라기’같은 걸작들을 제작해 내면서 20세기 야수파 화가들의 지표가 되었다.
고흐는 절친한 벗이자 정신적 의지처였던 고갱과의 불화 속에서 자신의 귀를 잘랐고,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후 스스로 쌩 레미의 정신요양원에 입원하면서 그의 작품은 앞전과 다른 큰 변화를 가지게 된다. 고정된 물체 속에서 역동적 힘을 발견하는 것, 그러한 힘의 변형이 화폭에 옮겨지면서 마치 하늘로 피어오를 듯한 ‘측백나무와 별과 길’를 그리며 하늘의 구름과 별, 달을 자주 그리게 된다. 그는 “이 나무들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만큼 아름다워. 마치 햇살이 눈부신 풍경 속에 검은 얼룩이 찍힌 것 같아”라고 표현했고, 이 작품은 ‘흙에서 타오르는 검은 불꽃’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는 희미해지는 정신세계를 통해 자신과의 내면과 마주하면서, 무의식과 의식의 불일치와 불만족을 그림으로 그려내려고 했다. ‘사람의 영혼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그림을 통해 그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고흐는 살아있는 동안 작품에 대한 찬사보다는 비평을 더 받았던 예술가였다. 그가 동생 테오에게 쓴 서신을 보면 “그림을 그린다는 일이 나를 혼란시키고 있다. 그러나 내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이보다 더욱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며 이러한 그림에 대한 논란들 속에서 심하게 갈등하고 고뇌한 흔적들을 엿볼 수 있다. 많은 다작과 파격적인 화풍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그의 작품에 대해선 관심을 갖지 않았다. 사후엔 미술사의 신화적인 인물로 칭송받는 고흐였지만, 살아선 철저히 소외당하고 외면 받는 외로운 작업 속에서 그는 불멸의 명화들을 그려냈던 것이다.
고흐, 10년간의 예술혼을 더듬다
지난해부터 올해 3월 16일까지 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불멸의 화가, 반고흐 展’은 10년 동안 짧은 예술가의 삶을 살면서 고흐가 남긴 불후의 명작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국내 초유의 회고전이다. 한국일보사, 서울시립미술관, KBS 한국방송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이번 전시는 네덜란드 반 고흐 미술관과 크뢸러 뮐러 미술관의 협력으로 엄선된 진품 유화작품 45점과 드로잉 및 판화작품 22점, 총 67점을 한자리에 전시해 국내 미술전시의 한 획을 긋는 기념비적 전시가 될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1885년 ‘감자먹는 사람들’, 파리시기의 ‘자화상’, 아를르 시기의 ‘해바라기’, 생레미 시기의 ‘아이리스’, 오베르 시기의 ‘오베르 교회’는 반 고흐의 5대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는 고흐 작품 중 ‘자화상’과 ‘아이리스’ ‘씨 뿌리는 사람’ ‘노란 집’ ‘우체부 조셉 룰랭’ 등 시기별 대표작을 선보이며 그의 예술적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번 전시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아이리스’는 반 고흐 미술관이 설립된 후 단 한 번도 외부 반출이 없었던 작품으로 최초의 해외 나들이가 바로 ‘서울’이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를 고조시키고 있다.
반 고흐전은 전 세계 모든 미술관들이 가장 열고 싶어 하는 미술 전시로서, 한 국가에서 백년에 한 번 기대할 수 있는 ‘미술 전시의 꽃’이다. 그만큼 대중적 인지도와 작품에의 명성을 누리는 화가이기 때문에 이번 미술전의 유치 성사는 ‘미술 전시의 월드컵’이라 평해지고 있다. 이러한 희소성과 기대치 때문에 이번 전시작품에 대한 보험가액이 약 1조 4,000억 원으로 책정된 미술 전시사상 전무후무한 최고가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점들은 엄청난 가치를 지닌 작품을 통해 이번 전시가 갖는 작품의 질적 우수성과 가치를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반 고흐 작품의 탄생과 변천과정을 손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연대기 순으로 구성한 이번 전시는, 그의 작품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유일무이한 기회이자 전설 속의 인물로 자리한 한 예술가의 삶과 예술을 유추해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젊은 나이에 예술가의 삶을 마감한 고흐는 세상을 향한 인류애를 오직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노력했지만, 정작 인간에게 소외되고 외면당한 너무나 인간적인 화가였다.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예술가로서 가난과 좌절로 점철된 쓰라린 인생을 살다 스스로의 삶을 마감한 비운의 화가 반 고흐는, 창작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독특한 화법과 내면중심의 표현력으로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가장 위대한 화가로 여겨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영혼 구도적인 강렬한 작품으로 사후 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대중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동시대의 어떤 예술가보다도 처절한 삶을 살았으며, 예술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걸었고, 말로 할 수 없는 영혼적인 삶의 모든 것을 담아내려고 했다. 인생에서 그렇게 찾고 싶어 했던 사랑에 모두 실패하기도 한 그에게 예술은 유일한 피난처였고, 오직 예술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창조력 넘치는 삶으로 바꾸어 놓으려 했다. 태양을 찾아 남프랑스로 내려간 그는 정신적 고통과 영혼의 구도적인 길을 찾아 불꽃같은 작품들을 탄생시켰고, 미술사상 유례없는 걸작들을 남겼다.
10여 년 간의 짧은 작가활동 중에도 2,000여 점의 다작 남겨
강렬한 색체와 격렬한 필치로 자신만의 작품을 확립해 현대미술사 표현주의 흐름에 강한 영향을 끼진 세기의 거장 빈센트 반 고흐. 그는 렘브란트 이후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일반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사랑받고 있는 작가 중 하나이기도 하다. 37세의 젊은 나이에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고흐는 10여 년간 예술가의 삶을 살면서, 불꽃같은 그의 정열과 젊음을 화폭에서 불살랐다. 그 기간 동안 고흐는 유화 850여 점, 드로잉 1,100여 점 등 총 2,000여 점이라는 다작을 남기고 시간 속에 사라진 진정한 시대의 거장으로 인식되고 있다.
자신을 던져 불사른 예술혼, 미술사의 신화 ‘반 고흐’
1853년 네덜란드 준데르트에서 개신교 목사의 6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난 고흐는 16세 때부터 숙부가 일하고 있는 구필화랑의 헤이그 지점에서 수습사원으로 일했다. 날마다 예술작품을 접하면서 예술적 감수성을 일깨웠으며, 렘브란트와 할스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와 당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던 프랑스 화가 밀레와 코로를 가장 경외했다. 실연에 의해 인간적 애정을 얻고 싶은 욕망이 좌절되자 점점 더 고독해지고 인생관이 어두워진 그는, 인간에 대해 헌신하고자하는 욕망을 품고 성직자가 되려고 했지만 정통교리에 대한 교회 당국과의 충돌은 그 마저도 허락지 않았다. 선교사업 시 느낀 현실과의 괴리감 속에서 그는 절망 속에 모든 사람들과 인연을 끊었고, 그와 동시에 그림을 시작하면서 1880년에 이르러서는 그 길이 자신의 천직임을 발견해 냈다. 그는 예술을 통해 인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 여겼으며, 자신의 창조력을 깨달으면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1880년 27세 나이에 예술가의 길로 입문한 고흐는 독학의 한계를 느끼고 미술아카데미에 등록을 했지만, 창의성이 결여된 학계의 가르침을 거부하면서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에텐과 헤이그, 드렌테, 뉘넨, 안트베르펜 등을 전전하며 ‘슬픔’과 ‘감자먹는 사람들’ 같은 작품들도 탄생시켰지만, 대부분 인물묘사의 습작들이나 명암의 처리 등을 위한 여러 습작들과 드로잉 작품들을 주로 했다. 자연적인 주제를 선호했던 그는 밀레처럼 농민화가가 되기 위해 여러 농촌을 방문하여 습작들을 남겼다. 가난한 농민사회의 처참한 생활상을 화폭에 담으며 미술을 통해 인류애를 실현하고자 한 그의 예술적 의지가 돋보이는 시기였다. 1886년부터 테오와 함께 지낸 파리생활은 여러 면에서 고흐의 화풍을 정립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인상주의 영향을 받은 파리에서 그의 작품은 점점 밝아지게 되고, 폴 시냑과 조르쥬 쉬라로 대변되는 신인상주의의 점묘법에도 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의 일생 자화상 40여 점 중 35점을 파리시기에 그린 것도 눈여겨 볼만하다.
이상향을 꿈꾸며 색채의 무한한 신비를 마음껏 구현한 아를르 시기에는, 남프랑스에서 화가들과 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해 그 유명한 ‘노란집’도 빌리고 파리에서 고갱도 초청하여 활발한 시기를 보낸다. 주요걸작들을 탄생시킨 가장 활발한 화가생활을 보낸 시기였지만, 고갱과의 불화로 자신의 귀까지 잘라냈을 정도로 심적으로는 많은 갈등을 겪던 고비의 순간으로 여겨진다.
불타는 예술혼을 자연의 묘사를 통해 분출했던 셍레미 시기에는 그의 37세 여정 중 가장 처절하고 힘들었지만 자연의 빛과 형태를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양식으로 발전시켜, 회화를 통한 구원의 길로 접어든 시기다. 정신요양원에서도 정신이 돌아오면 미친 듯 그림에 몰두했던 그는 그 시기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명작들을 쏟아냈다.
고흐가 3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기 전에 보냈던 마지막 2달 오베르 쉬르 우아즈 시기는, 아마추어 화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가쉐 박사를 소개받고 67일간 70여 점의 작품을 그리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그는 가쉐 박사와의 불화, 동생 테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경제적 죄의식, 예술가로서 성공하지 못한 자신의 삶을 심히 비관했다. 주위와 단절한 채 오로지 작품 활동에만 몰두했던 그는 어느 날 자신에게 주어진 예술과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불행이다”라고 말한 그의 말을 보더라도 얼마나 고흐 자신이 가난과 좌절로 점철된 비운의 삶을 살면서 고통스러워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고흐의 작품세계
고흐의 작품과 주고받은 서신 내용을 보면 네덜란드에 머무는 동안 자연의 위대함과 진실함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885년 그는 ‘감자먹는 사람들’에서는 가난을 드러내기 위해 더러운 감자의 색깔과 둔중하고 단순화된 형태들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당시 수습 선교사이기도 했던 고흐는 농부들의 비참한 삶을 함께 하며, 가능한 한 그 표현을 명료하게 하기위해 종래의 자연주의의 한계를 뛰어 넘고자 노력했다.
그는 끊임없는 연구와 시도 속에서 루벤스의 단순한 표현수단, 솔직한 표현방법, 색채들을 결합해 분위기를 표현하는 능력 등에 영감을 얻었다. 일본 우키요에와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강렬하고 격렬한 필치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루벤스의 단순한 표현수단, 솔직한 표현방법, 색채들을 결합하여 분위기를 표현하는 능력 등은 고흐에게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다.
고흐는 1888년 아를르에서 그린 ‘밤의 카페’에서 눈부신 불빛과 현기증을 일으키게 하는 원근법, 웅크리고 있는 외로운 손님들의 악몽같은 분위기를 묘사하며, 색채의 상징주의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는 “황록색과 거친 청록색을 사용함으로써, 싸구려 술집의 어두운 힘, 유황 냄새 풍기는 악마의 용광로 같은 분위기의 모든 것을 나타내야 했다”는 말고 자신이 고갱과 함께 단골로 찾던 작은 카페를 어둡게 그려냈다. 하지만 이내 곧 그의 작품은 눈부신 빛을 찾아내어 담기 시작한다. 고흐는 아를르의 밝은 태양에 감격했으며 ‘아틀의 도개교’ ‘해바라기’같은 걸작들을 제작해 내면서 20세기 야수파 화가들의 지표가 되었다.
고흐는 절친한 벗이자 정신적 의지처였던 고갱과의 불화 속에서 자신의 귀를 잘랐고,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후 스스로 쌩 레미의 정신요양원에 입원하면서 그의 작품은 앞전과 다른 큰 변화를 가지게 된다. 고정된 물체 속에서 역동적 힘을 발견하는 것, 그러한 힘의 변형이 화폭에 옮겨지면서 마치 하늘로 피어오를 듯한 ‘측백나무와 별과 길’를 그리며 하늘의 구름과 별, 달을 자주 그리게 된다. 그는 “이 나무들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만큼 아름다워. 마치 햇살이 눈부신 풍경 속에 검은 얼룩이 찍힌 것 같아”라고 표현했고, 이 작품은 ‘흙에서 타오르는 검은 불꽃’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는 희미해지는 정신세계를 통해 자신과의 내면과 마주하면서, 무의식과 의식의 불일치와 불만족을 그림으로 그려내려고 했다. ‘사람의 영혼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그림을 통해 그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고흐는 살아있는 동안 작품에 대한 찬사보다는 비평을 더 받았던 예술가였다. 그가 동생 테오에게 쓴 서신을 보면 “그림을 그린다는 일이 나를 혼란시키고 있다. 그러나 내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이보다 더욱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며 이러한 그림에 대한 논란들 속에서 심하게 갈등하고 고뇌한 흔적들을 엿볼 수 있다. 많은 다작과 파격적인 화풍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그의 작품에 대해선 관심을 갖지 않았다. 사후엔 미술사의 신화적인 인물로 칭송받는 고흐였지만, 살아선 철저히 소외당하고 외면 받는 외로운 작업 속에서 그는 불멸의 명화들을 그려냈던 것이다.
고흐, 10년간의 예술혼을 더듬다
지난해부터 올해 3월 16일까지 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불멸의 화가, 반고흐 展’은 10년 동안 짧은 예술가의 삶을 살면서 고흐가 남긴 불후의 명작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국내 초유의 회고전이다. 한국일보사, 서울시립미술관, KBS 한국방송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이번 전시는 네덜란드 반 고흐 미술관과 크뢸러 뮐러 미술관의 협력으로 엄선된 진품 유화작품 45점과 드로잉 및 판화작품 22점, 총 67점을 한자리에 전시해 국내 미술전시의 한 획을 긋는 기념비적 전시가 될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1885년 ‘감자먹는 사람들’, 파리시기의 ‘자화상’, 아를르 시기의 ‘해바라기’, 생레미 시기의 ‘아이리스’, 오베르 시기의 ‘오베르 교회’는 반 고흐의 5대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는 고흐 작품 중 ‘자화상’과 ‘아이리스’ ‘씨 뿌리는 사람’ ‘노란 집’ ‘우체부 조셉 룰랭’ 등 시기별 대표작을 선보이며 그의 예술적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번 전시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아이리스’는 반 고흐 미술관이 설립된 후 단 한 번도 외부 반출이 없었던 작품으로 최초의 해외 나들이가 바로 ‘서울’이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를 고조시키고 있다.
반 고흐전은 전 세계 모든 미술관들이 가장 열고 싶어 하는 미술 전시로서, 한 국가에서 백년에 한 번 기대할 수 있는 ‘미술 전시의 꽃’이다. 그만큼 대중적 인지도와 작품에의 명성을 누리는 화가이기 때문에 이번 미술전의 유치 성사는 ‘미술 전시의 월드컵’이라 평해지고 있다. 이러한 희소성과 기대치 때문에 이번 전시작품에 대한 보험가액이 약 1조 4,000억 원으로 책정된 미술 전시사상 전무후무한 최고가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점들은 엄청난 가치를 지닌 작품을 통해 이번 전시가 갖는 작품의 질적 우수성과 가치를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반 고흐 작품의 탄생과 변천과정을 손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연대기 순으로 구성한 이번 전시는, 그의 작품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유일무이한 기회이자 전설 속의 인물로 자리한 한 예술가의 삶과 예술을 유추해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젊은 나이에 예술가의 삶을 마감한 고흐는 세상을 향한 인류애를 오직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노력했지만, 정작 인간에게 소외되고 외면당한 너무나 인간적인 화가였다.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예술가로서 가난과 좌절로 점철된 쓰라린 인생을 살다 스스로의 삶을 마감한 비운의 화가 반 고흐는, 창작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독특한 화법과 내면중심의 표현력으로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가장 위대한 화가로 여겨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영혼 구도적인 강렬한 작품으로 사후 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대중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동시대의 어떤 예술가보다도 처절한 삶을 살았으며, 예술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걸었고, 말로 할 수 없는 영혼적인 삶의 모든 것을 담아내려고 했다. 인생에서 그렇게 찾고 싶어 했던 사랑에 모두 실패하기도 한 그에게 예술은 유일한 피난처였고, 오직 예술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창조력 넘치는 삶으로 바꾸어 놓으려 했다. 태양을 찾아 남프랑스로 내려간 그는 정신적 고통과 영혼의 구도적인 길을 찾아 불꽃같은 작품들을 탄생시켰고, 미술사상 유례없는 걸작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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