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아티스트/앤디 워홀(Andy Warh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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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아티스트/앤디 워홀(Andy Warhal)
  • 글_김영란 차장
  • 승인 2008.0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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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조영한 예술가 앤디 워홀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
유명한 거장들의 미술작품을 논할 때면 으레 수준높은 구도나 색감 등을 들먹이며 전문용어들을 쏟아내기 일쑤다. 문외한인 사람들은 자연히 화제의 논객에서 제외되고 고매한 예술은 우리의 생활과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최근까지도 많은 작가들이 정형화된 예술의 틀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키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을 해 왔다. 특히 최근 언론에 많이 거론됐던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은 ‘팝아트’라는 장르를 대중들에게 새롭게 각인시키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주관적 엄숙성에 반대하고 대중문화적 시각이미지를 미술 영역 속에 적극적으로 수용한 구상미술의 경향이 바로 ‘팝아트’다.

추상표현주의를 거부하고 대중 속으로
1950년대 영국에서 젊은 작가들의 관심 아래 ‘이것이 내 일이다’라는 전시에서 R.해밀턴이
라는 작가는 ‘오늘의 가정을 그토록 색다르고 멋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최초의 팝아트 작품을 탄생시켰다. 영국의 팝아트는 기존의 규범이나 관심에 대해 비판적인 사회비판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영국 대표작가 중 하나인 해밀턴은 팝아트에 대해 ‘순간적, 대중적, 대량생산적, 청년문화적, 성적(性的), 매혹적, 거대기업적일 것 등 현대 대중문화의 속성을 그대로 압축해 놓은 것’이라 팝아트에 대한 예술의 성질을 정의하기도 했다. 그만큼 팝아트는 대중적이고 일상적이며 범상하고 일상적인 소재들을 미술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이라는 이분법적, 위계적 구조를 불식시키고 산업사회의 현실을 미술 속에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한 긍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성격의 팝아트는 거대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더욱 미국적인 환경이 구체적으로 반영되었다. ‘무의미의 의미’를 가진 새로운 가치세계의 표현인 네오다다이즘 성격을 가진 팝아트는 대중들에게 친숙한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미술의 대중화에도 큰 일조를 했다. 팝아트는 텔레비전, 매스미디어, 상품광고, 쇼윈도, 고속도로변의 빌보드, 거리의 교통판 등 다양하고 일상적인 것 뿐 아니라 코카콜라, 만화 주인공 등의 소재를 사용하여 기본적으로 소재가 가진 선입견을 이용하여 무의미 혹은 새로운 의미로 인식시키게 했다. 미술의 소재가 제품인지, 제품을 예술적으로 광고하는 것인지 모호한 경계 속에서 팝아트는 신사실주의, 신통속주의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지며 미국시장에서 더욱 그 예술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이미 있는 이미지에 작가의 새로운 해석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팝아트는 기성 대중문화 이미지를 고급미술 단계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의 유명한 팝아티스트로는 워홀, 리히텐슈타인, 위셀만, 올덴버그, 로젠퀴스트, 라모스, 에드워드 등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 워홀과 리히텐슈타인이다. 이 두 작가의 작품은 거대 미술시장에서 비싼 값으로 경매되는 인기작이기도 하다. 특히 워홀은 가장 많이 거론되는 작가인데,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등 대중문화 스타나 저명인사들을 캔버스에 반복적으로 묘사하거나 임의적인 색채를 가미해 순수고급예술의 엘리티시즘을 공격하고, 예술의 의미를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작품을 발표하여 많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누구나 15분 만에 유명해 질 수 있다’
‘In the future everyone will be famous for fifteen minute.’ 이는 미국 팝아트 대표작가인 앤디 워홀이 한 유명한 말이다. 매스미디어가 대중의 생활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삶과 욕망에 대한 그 영향력을 말해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물질적 풍요가 넘쳐나는 시대 속에서 상대적으로 개인이 바라는 삶에 대한 기대치들은 ‘대중스타’라는 인물들을 통해 대리 만족되는 양상을 띠어왔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매스미디는 하나의 권력으로 부상하면서 많은 홍보와 광고를 통해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사회로 부추겨 산업발달을 가속화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은 앤디 워홀의 작품세계와 정신세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작품은 1960년대의 미국과 현대소비사회의 모습과 자신의 삶이 투영되어 많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워홀의 이러한 예술적 활동은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로, 팝의 교황, 팝의 디바로 명명되면서 대중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미술뿐만 아니라 영화, 광고, 디자인 등 시각예술 전반에서 혁명적인 역할을 주도했다.
192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이민 온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워홀의 성공기는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맨 몸으로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팝아티스트로 자리잡으면서 부와 명성을 차지한 그는 매스미디어를 이용한 ‘신화 만들기’이라는 전략을 통하여 일반 대중들에게도 낯익은 이름이 되었다. 배트맨, 딕 트레이시, 슈퍼맨 인물시리즈 등 다분히 상업적이던 그의 작품은 초기에는 이를 터부시하던 순수예술 위주의 화상들에게 외면을 당했지만, 1962년 뉴욕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에서 열린 ‘새로운 사실주의자들(New Realists)’전시에 참여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워홀의 작품 소재는 수프 깡통이나 코카콜라, 달러지폐, 유명인의 초상화 등을 실크스크린 판화기법으로 제작되었는데, 대중잡지의 표지나 슈퍼 진열대의 상품 같은 대중적 주제로 그의 스튜디오인 ‘팩토리(The Factory)’에서 조수들과 함께 대량생산을 하기도 했다.

감추기와 드러내기를 통한 미스테리한 이미지
워홀은 ‘스타 중독자’라고 일컬을 정도로 생전에도 자신을 현실 삶에 존재하지 않는 신화적으로 만들어 의도적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미스테리한 인물로 조작해 냈다. 많은 인터뷰와 워홀을 취재한 기사들은 많았지만 정작 워홀의 숨겨진 부분들은 암시적이기만 할 뿐 철저히 모호하고 난해한 부분이었다. 워홀은 “나는 미스테리로 남길 바란다. 나는 결코 나의 배경이 노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그래서 나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서로 다른 질문을 한다”라며 자신을 신비화하는 작업이 충분히 의도된 작업이었음을 암시했다. 이러한 반면에 그는 작품과 관련된 다른 부분들에 대해서는 매스미디어에 대한 노출을 꺼리지 않았다. 미스테리한 이미지를 통해 신비한 인물로 인식되면서 새로운 대중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워홀은 수많은 인터뷰, 대학 강연, 파티 참석, 자신의 공장이라 불리는 ‘Factory’ 작업실을 대중에게 개방함으로써 자신을 노출해 나갔다. 그러면서도 드러낼 것과 감출 것에 대한 경계는 확고했으며, 대중적 스타이긴 하지만 철저히 베일에 싸인 신비한 인물로 부각되었다. 이러한 적절한 구사는 대중화된 스타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재를 신화적인 인물로서 ‘스타화’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으로 비춰지고 있다. 그러한 그의 의지는 상당히 성공적이었으며, ‘앤디 워홀’이라는 인물은 인간이 아닌 신화같은 하나의 이미지로서 대중적인 명성과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회화 이외에도 그는 영화 제작자로서 ‘잠(Sleep)’라는 첫 영화를 시작으로 총 28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워홀은 현대미술의 아이콘으로서 동시대 문화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이를 시각화해내는 직관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현상들을 팝아트와 그의 영화를 통해 담아왔던 그는 자신의 예술을 ‘세상의 거울’이라고 하며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는 파격적 발언과 같이 기계와 같은 미술을 만들어 냈다. 기계를 통해 무한히 복제되는 세상 속에서 그의 작품과 명성은 날로 높아갔다.

대중적 아이콘, 스타 그리고 죽음
앤디 워홀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이 소재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바로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스타’들이다. 그 가운데서 가장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이 ‘마릴린 먼로’의 실크스크린 작품이다. ‘마를린 먼로’의 초상화를 한 캔버스에 쉼 없이 반복시켜 의미 혹은 무의미의 감성으로 조명한 부분은 자체 인물보다 그가 가진 스타성,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미디어적 산물이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워홀의 작품에 나타나는 스타의 이미지는 현대적으로 해석되는 하나의 성인(聖人)의 이미지로 봐야한다”고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워홀이 다룬 스타들은 현대적인 숭배의 대상이며 신성한 종교적 유물과 동일시되는 의미이다. 황금빛 마를린의 해석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몬로가 현대적 의미에서 섹스여신이며, 작품의 배경이 되는 금빛 배경은 중세 비잔틴 모자이크의 금색에서 따와 신화적인 이미지를 연출하며 스타에 대한 신비성과 화려함을 부각시킨 것이다. 그 외에도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인 재클린에 이르기까지 많은 스타들을 부각하며 주요 소재로 사용했다. 한편으로 이러한 그의 시도는 스타의 우상화라는 측면으로 관찰될 수도 있겠지만, 실크스크린 작업을 통해 같은 이미지를 하나의 배경에 무수히 반복 나열함으로써 마치 벽지와 같은 무덤덤한 존재로 만들어 결국 개성이 사라진 하나의 기계적 이미지로 창출되었다. 대중적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스타이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우리의 생활과 아무런 직접적 관련이 없는 무의미한 이미지로서 관념화시킨 셈이다.
스타와 관련된 부분 중에서도 유독 의미심장한 부분은 작품 속에 녹아있는 ‘죽음’에 대한 암묵적 이미지이다. 마를린 몬로, 엘비스 프레슬리,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등은 화려한 대중적 스타였지만, 안타까운 죽음으로 인해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더욱 뚜렷하게 이미지화되어 있는 인물들이다. 이러한 스타들은 생전의 화려함과 명성에 못지않게 죽어서도 자신들에 대한 이미지를 확고히 해 영원한 스타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측면이 바로 앤디 워홀이 관심 기울인 부분이다. 사회적으로 관심이 집중됐던 유명인의 명성과 죽음의 미묘한 상관관계를 통해 육신의 죽음은 실존적인 인물의 소멸이지만, 이미지로서는 살아 존재해 더욱 변형되고 조작되어 대중들에게 어필되고 상품화되는 새로운 부분들이 되는 것이다. 오로지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이 스타들을 통해 신화적인 존재로, 허상적인 존재로 부각되는 양면적 의미들이 그의 작품들이 주는 재미기도 하다. 워홀은 대중스타의 죽음에 있어 일반인들의 죽음도 그의 작품 소재로 활용했다. 1962년부터 시작한 ‘재난시리즈’는 비행기 사고, 자동차 사고, 전기의자, 원폭 등 각종의 많은 무명인들의 죽음을 표현해 냈다. 이 작품들을 통해 워홀은 무명인들의 많은 죽음들이 끝내는 일시적인 화젯거리로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묻히고 마는 사실을 폭로하는 의미였다. 특히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한 각종 매체들의 표지들의 재난 사진들이 미학적 대상이 되어버리는 현실을 풍자하는 일면도 있었다. 화젯거리들이 주는 관심과 감정들이 시간적으로는 점점 무덤덤한 의미로 다가서는 죽음들. 그는 대중과 미디어의 관계에 대한 단면을 그의 작품을 통해 드러냈다.

전통적 예술·작가임을 거부하다
워홀의 작품들 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쉽게 떠 올리는 것에 하나가 캠벨스프(일상용품) 시리즈이다. 워홀은 콜라병, 수프 등 일상적이고 개성없는 용품들을 그의 작품 소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이 나라 미국의 위대성은 가장 부유한 소비자들도 본질적으로 가장 가난한 소비자들과 똑같은 것을 구입한다는 전통을 세웠다는 점이다. TV광고에 등장하는 코카콜라는 리즈 테일러도, 미국 대통령도 그것을 마신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당신들도 마찬가지로 콜라를 마실 수 있다. 콜라는 그저 콜라일 뿐 아무리 큰돈을 준다 하더라도 길모퉁이에서 건달이 빨아대고 있는 콜라보다 더 좋은 콜라를 살 수는 없다. 유통되는 콜라는 모두 똑같다”라는 말로 대량 생산품에 의해 비롯된 소비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우리의 삶이 선전광고에 의해 대량 생산품들과 빈번히 접촉하고 영향 받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일상용품들은 너무 흔하기 때문에 우리가 무덤덤하게 느끼는 캔 깡통이나 음료수 병 같은 존재들을 통해 획일적이고 무비판적인 사회적인 부분들을 투영한 부분이다.
그는 파격적인 예술적 관념으로 기존의 전통적인 예술과 작가의 틀을 거부하며 변화를 시도해 왔다. 특히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Factory’라 부르며 많은 이들에게 개방해 왔는데, 거기에는 저명한 사회 인사들은 물론 사회적으로 터부시되던 동성연애자, 화가, 시인, 영화제작자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그는 이러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제공된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자신의 작품에 반영했으며, 권위적이거나 지배적인 형식이 아니라 수동적 방식으로 자신을 오픈함으로써 대중의 기호와 아이디어를 흡수했다. 이런 모습들이 흡사 워홀이 하나의 미디어 기구로서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흡수해 하나의 새로운 창조물을 생산해 내는 기계와 같은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다. 그는 예술은 누구 개인 하나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 의해서든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예술과 예술가의 범위를 넓혀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실크스크린 기법을 통하여 대량 생산성, 익명성이 주를 이루는 현대 산업사회와 닮음 꼴로 예술작품도 기계적이고 대량생산될 수 있는 하나의 상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워홀은 “돈을 버는 것도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고, 비즈니스야 말로 최고의 예술이다”라고 말하며 기존의 엄숙주의를 거부하고 예술을 대중화시킨 예술가이자 상술가였다. 대중문화와 스타의 이미지가 지배적인 조류가 됐던 1960년대의 미국에서 그가 보여줬던 작품들은 사회의 거울이자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는 말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그는 복잡하고 그러면서도 이내 무의미해져 버리는 세태를 반영하는 진정한 미술계의 거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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