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 “조선왕조실록에 3천번 이상 이름이 거론되고 4명의 임금을 모셨던 강직한 유학자”
(시사매거진258호=오경근 칼럼니스트) 청명한 가을하늘 아래 연분홍빛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풍요의 계절이 다가왔다. 뭉게뭉게 떠다니는 양떼구름도 푸른 벌판을 누비는 듯 유유자적하다.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1시간 여 달리면 54.8km 지점에서 평택과 안성으로 접어드는 평택제천고속도로를 만난다. 이곳에서 다시 내려온 만큼 1시간 여 더 달리면 50.5km 지점에서 또 다시 35번 중부고속도로를 가로지르는 상경로와 접한다. 11.8km 지점, 이곳이 바로 청주시와 충주시 사이에 위치하는 숨은 ‘은자(隱者)’,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이다.

예부터 홰나무(회양목)이 많아 ‘괴산(홰나무가 자라는 산)’이라 불린 이곳은 무엇보다 소백산맥에서 뻗어 내려 고봉을 이루는 대야산, 조항산, 청화산, 백악산, 덕가산, 금단산 등 높고 험준한 산들이 자리하고 있어 푸르고 청정하다. 그런 이곳에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거론되고, 4명의 임금을 보필한 조선시대 최고의 유학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존재한다. 또한 그를 추모하고 제향하기 위해 노론계 관료와 유생, 문화생 들이 창건한 <화양동서원>이 있다. 단아하고 반듯한 전각과 돌담에서 송시열의 우직한 면모가 엿보인다.
‘괴산 화양동’과 ‘우암 송시열’ 그리고 설화·민요·민속놀이
1975년 충청북도에서 가장 유서 깊은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화양동계곡’은 원래 청주군 청천면 지역으로, 황양목(회양목)이 많아 황양동으로 불리던 곳이다. 이후 조선 효종 때 정치가인 우암(또는 우재) 송시열이 이곳으로 내려와 은거하며 화양동으로 고쳐 불렸다. 무엇보다 우암 송시열은 벼슬에서 물러난 후 이곳에서 글을 읽으며 후진을 양성한 것으로 큰 족적을 남겼다. 중국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서 괴산의 화양동 계곡에 9개의 이야깃거리를 만들고 ‘화양구곡(華陽九曲)’이라 칭했다. 때문에 이곳에는 우암 송시열과 연관된 ‘화양구곡’과 ‘만동묘’ 그리고 ‘화양동서원’과 같은 역사적 건축물과 기념물이 여러 모로 남아 있다.
또한 ‘나무꾼이 신선의 바둑판을 구경하다가 도끼자루가 썩었다’는 설화와 더불어 까마귀가 나무 조각을 물고가 발견케 한 ‘보물 제433호 각연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에 얽힌 설화가 있다. 그리고 증평의 ‘말세우물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옛날 이 마을에 가뭄이 들어 먹을 물조차 없었는데, 지나가던 스님이 마을 앞에 있는 느티나무를 베고 우물을 파면 물 걱정이 없을 것이라 하여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물이 솟아올랐다 한다. 이어 스님은 이 우물은 가물거나 장마가 져도 물이 줄거나 늘지도 않지만 만일 이 물이 세 번 넘치면 말세가 된다고 말하고 가버렸다. 그런데 이 우물은 임진왜란 때 한번, 6·25사변 때 또 한 번 넘쳤고 이제 한 번만 더 넘치면 말세가 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역사적으로, 연풍면 적석리와 칠성면 도정리 등지에 신석기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다량 전래되고 있어 큰 의의를 더한다. 더욱 도정리의 고인돌군 등에서는 산신제의 유습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삼한시대 마한의 금물노국(今勿奴國)과 잉근내국(仍斤內國)이 위치한 곳으로 사학적 가치가 높다.
기원 후 606년(진평왕 28)에는 신라의 장수 찬덕(讚德)이 가잠성을 지키며 백제군의 포위와 공격에도 항복하지 않고 큰 느티나무에 머리를 받아 자결한 충정으로 인해 신라의 태종무열왕이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해 ‘괴산’으로 부르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 산성터 역시 이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삼국시대 전운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지금의 청천면 화양리에는 명나라 의종의 글씨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는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1683년(숙종 9) 화양동에 은거하던 송시열이 바위에 새긴 것이다. 이후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어 도와준 명나라 신종을 위해 만동묘(萬東廟)를 세웠다. 1696년에는 권상하(權尙夏)에 의해서 화양리에 송시열을 봉안하기 위해 노론계 관료와 유학생들이 사액서원이 세워졌다. 또한 괴산 사람 김시민이 진주대첩에서 공을 세웠고, 박세무가 <동몽선습>을 엮기도 했다. 1919년에는 이곳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는 초석을 다졌다.

우암 송시열의 유학 숭상과 정치 철학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이름이 거론되고, 4명의 임금을 보필했던 유학자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그러나 26세 이후 고향을 떠나 이곳 괴산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송자대전>을 남겼다. 또한 조선을 ‘유학의 나라’로 만든 장본인인 동시에 학자 중 최초이자 유일하게 ‘자’자를 붙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나이 27세 때 생원시에서 ‘일음일양지위도’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후일의 효종)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약 1년간의 사부 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간 일체의 벼슬을 하지 않은 채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와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송시열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사헌부장령 등의 관직이 내려졌다. 이때 송시열은 ‘기축봉사’라는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하며 ‘존주대의(춘추대의에 의거하여 중화를 명나라로, 이적을 청나라로 구별하여 밝힘)’와 ‘복수설치(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를 역설해 효종의 북벌정책을 도왔다.
그러나 다음 해 2월, 김자점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 일파가 모두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 뒤 1653년(효종 4)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하지만 1658년 7월 효종의 간언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지만 국구 김우명 일가와 알력다툼을 하다가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낙향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년간 조정에서 극진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을 받았으나 거의 관직에는 나가지 않았다. 다만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고 잠시 조정에 머문 후 다시 재야로 돌아왔다. 그러나 괴산에 은거하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람들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림의 여론은 송시열에 의해 좌우 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송시열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송시열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1675년(숙종 1) 정월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기·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 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숙종 8) 김석주·김익훈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술 삼고변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제자 윤증과의 불화로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후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송시열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해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 해 시장 없이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때부터 덕원과 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중 사액서원만 37개소에 이른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 간에 칭송과 비방이 무성했으나, 1716년의 병신처분과 1744년(영조 20)의 문묘배향으로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다.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송시열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교유관계,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다
송시열은 학계와 정계에서 가졌던 위치와 그 명망 때문에 교우 관계가 넓었고 추종한 제자들이 매우 많았다. 교우의 중심은 김장생·김집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송준길, 이유태, 유계, 김경여, 윤선거, 윤문거, 김익희 등으로 이들과 함께 세칭 ‘산당’으로 불렸다. 한때는 남인 권시, 윤휴와도 절친한 적이 있었다. 벼슬에 나아간 뒤에는 김상헌의 손자들인 김수증·김수흥·김수항 형제들, 민정중·민유중·형제, 이후원·이시백 등 서인 권문세가 인사들과 정치를 같이 하였다. 소론계인 남구만·박세채·이경석과도 친했으나 뒤에 당이 갈려 멀어졌다.
송시열은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풍 때문에 교우관계에서 끝까지 화합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경석·윤휴 및 윤선거·윤증 부자와의 알력은 정치적인 문제를 야기하여 당쟁의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사돈인 권시와도 틈이 생기고, 이유태와 분쟁을 일으키는가 하면 평생의 동반자였던 송준길마저도 뜻을 달리하게 되었다.
제자로는 윤증이 가장 촉망되었으나 그 아버지의 묘문 문제로 마침내 노소분당을 야기하였다. 그리고 송시열의 학통을 이어받은 권상하 외에 김창협·이단하·이희조·정호·이선·최신·오세추·송상민 등이 고제로 일컬어진다. 그 밖에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시로 공부한 문인들은 수백 명에 이르렀다. 권상하의 문하에서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로는 한원진·윤봉구·이간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 들이 대표적이며, 이들의 문인들이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들을 통하여 송시열의 존주대의 이념이 계승되어 조선 말기의 척사위정론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송시열에 의해 재정비된 정통성리학의 체계와 광범한 문인들의 활약과 그 정치적인 비중 때문에 송시열의 학문과 사상은 조선 후기의 가장 강력한 지배 이념으로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러한 송시열은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 자신이 찬술하거나 편집하여 간행한 저서들과 사후에 수집되어 간행된 문집으로 대별된다.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 이정서분류, 논맹문의통고, 경례의의, 심경석의, 찬정소학언해, 주문초선, 계녀서 등이 있다. 또한 문집으로는 1717년(숙종 43) 왕명에 따라 교서관에서 처음으로 편집, 167권을 철활자로 간행하여 <우암집>을 출간했다. 이후 1787년(정조 11) 다시 빠진 글들을 수집, 보완하여 평양감영에서 목판으로 215권 102책을 출간하고 ‘송자대전’을 냈다. 또한 9대손 송병선·송병기 등에 의하여 ‘송서습유’ 9권, ‘속습유’ 1권이 간행되었다. 이들은 1971년 사문학회에서 합본으로 영인한 ‘송자대전’ 7책으로 간행하고, 1981년부터 한글 발췌 번역본인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4책으로 출판해 오늘날에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