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발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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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발의 정치학
  • 박희윤 기자
  • 승인 2019.10.07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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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삭발의 역사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에 반대하며 삭발을 하고 있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사진_뉴시스)

[시사매거진 258호=박희윤 기자] 정치권에서는 삭발을 단식, 장외 투쟁과 함께 야당이 여당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 꼽는다. 삭발은 단식보다 부담은 덜하면서 자신의 뜻을 ‘시각적’으로 가장 극대화할 수 있는 투쟁 수단이다. 요구를 관철하고, 투쟁을 독려하며,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효과가 있다. 꼭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이목을 한번에 끌 수 있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주로 활용한다. 투쟁의 절박함을 국민에게 호소하는 차원도 있다. 반면 괜히 머리만 밀고 실리는 못 챙긴 채 웃음거리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비관론과 자칫 국민에게 ‘정치 혐오’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 정치사에서 정치인들이 삭발을 했던 시기와 주장을 통해 정치인들의 삭발의 의미를 살펴본다.

1987년 김영삼과 김대중이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자 이에 동참하여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기도 한 박찬종 전 의원은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양 김이 분열하자, 이철·조순형·홍사덕·장기욱·허경구 등과 함께 끝까지 후보단일화를 주장하면서 양김의 통합을 촉구하는 삭발시위를 하기도 했다. 당시 같은 당 소장파 의원들이 집단 삭발을 할 계획이었으나, 박 전 의원은 “앞으로 할 일이 많을 테니내가 대표로 하겠다”고 만류,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10분 만에 삭발을 마쳤다. (사진_유튜브 캡쳐)

1980, 90년대 정치인 삭발의 역사

정치권의 삭발 원조로는 박찬종 전 통일민주당 의원이 꼽힌다. 1987년 김영삼과 김대중이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자 이에 동참하여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기도 한 박 전 의원은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양김이 분열하자, 이철·조순형·홍사덕·장기욱·허경구 등과 함께 끝까지 후보단일화를 주장하면서 양 김씨의 통합을 촉구하는 삭발시위를 하기도 했다.

당시 같은 당 소장파 의원들이 집단 삭발을 할 계획이었으나, 박 전 의원은 “앞으로 할 일이 많을 테니 내가 대표로 하겠다”고 만류,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10분 만에 삭발을 마쳤다. 결국 단일화가 무산되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선되자 박 전 의원은 탈당 후 무소속으로 나서 13~14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됐다.

1997년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항의한 김성곤 전 국민회의 의원이나 1998년 나주시장 공천헌금 의혹에 연루, 선거법 위반으로 검찰 수사를 받았던 정호선 전 새정치국민회의 의원도 삭발로 항의 의사를 표시했다.

2000년대의 삭발

2004년 3월 22일, 당시 설훈 민주당 의원은 탄핵철회 및 지도부 사퇴, 노무현 대통령 사과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무기한 삭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설 의원은 이날 오전 9시 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탄핵안을 발의하고 가결시킨 193명의 국회의원은 국민 앞에 진지하고 분명하게 사과하고, 민주당 지도부는 즉각 총사퇴 할 것 △국민의 뜻을 거스른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철회 △노 대통령은 사태를 파국으로 이끈 것에 대해, 국가적 위기 상황을 방치한 것에 대해 책임지고 사과할 것 등 세 가지를 요구했다.

설 의원은 정치인의 삭발에 대해 “목숨을 걸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며 “모든 것을 내던지겠다는 절박함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2007년에는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김충환·신상진·이군현 원내부대표 3명이 사립학교법안의 재개정을 관철하기 위해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삭발식을 했다. 삭발식 다음 날,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원내대표 회담을 갖고 한나라당의 요구인 사학법 재개정과 열린우리당의 요구였던 주택법 개정안을 합의했다.

2009년 10월 26일에는 민주당 충남도당 양승조 위원장과 박수현 민주당 충남 공주·연기 지역위원장과 박정현 부여·청양 지역위원장이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앞에서 정부가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시)를 원안대로 추진하지 않는 것에 항의 표시로 삭발투쟁을 벌였다.

2010년대의 삭발

2010년 1월 11일 정부부처 이전 백지화를 골자로 한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이 공식발표되자 자유선진당과 민주당은 세종시 수정안 결사저지를 위한 투쟁에 들어갔다. 당시 선진당은 결의문을 통해 “오직 조상대대로 뼈 묻고 살아온 삶의 터전에서 몇 푼 보상금을 손에 쥐고 쫓겨나다시피 한 연기와 공주주민을 볼 면목이 없고, 국가의 대의(大義)를 묵묵히 받아준 500만 충청지역민에게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을 뿐”이라며 “이에 우리 의원 일동은 이명박 정권의 대국민 기만극인 세종시 수정안을 분쇄하고, 원안을 사수하기 위한 결전의 선봉에 서고자 강철 같은 의지로 삭발을 결행코자 한다”며 삭발식을 단행했다.

이날 삭발은 당시 류근찬 원내대표, 이상민 정책위의장, 김낙성 사무총장 등 당 3역을 비롯해 임영호 총재비서실장, 김창수 원내수석부대표 등 의원 5명이 대표로 단행했다. 결국 2010년 6월 세종시 수정안은 국회에서 부결됐다.

2013년 11월에는 통합진보당 소속 의원 5명이 정부의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에 반발해 함께 머리를 밀었다. 이때 김재연·김미희 통합진보당 의원이 여성 국회의원으로는 처음 삭발했다. 그들은 정당 해산심판 청구를 위헌적이고 불법적인 행위로 규정하며 강력 반발하며 삭발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2014년 12월, 통진당 해산을 결정했다.

지난 5월 2일 오전 국회 본청 앞에서 진행된 자유한국당 의원과 당협위원장이 패스트트랙 법안 철회를 위한 삭발식을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윤영석, 이장우, 김태흠, 성일종, 이창수 천안병 당협위원장. 김태흠 의원은 “패스트트랙 법안 지정은 이 정권이 좌파독재의 길로 가겠다는 선언이자, 좌파독재의 고속도로를 만든 것”이라며 “오늘 삭발식은 사생취의(捨生取義·목숨을 버리고 의리를 좇음)의 결기로 문재인 좌파독재를 막는 데 불쏘시개가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 (사진_뉴시스)

‘패스트트랙 무효’ 집단 삭발

통합진보당 소속 의원 5명의 집단 삭발 이후 5년 반만인 지난 5월 2일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여야 4당의 선거제·개혁입법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에 반발해 집단 삭발했다.

지난 4월 30일 박대출 의원이 스스로 머리를 민 데 이어 김태흠·윤영석·이장우·성일종 의원과 이창수 충남도당 위원장이 이날 오전 국회 본관 앞 계단에서 삭발식을 가졌다. 김태흠 의원은 “패스트트랙 법안 지정은 이 정권이 좌파독재의 길로 가겠다는 선언이자, 좌파독재의 고속도로를 만든 것”이라며 “오늘 삭발식은 사생취의(捨生取義·목숨을 버리고 의리를 좇음)의 결기로 문재인 좌파독재를 막는 데 불쏘시개가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

전희경 대변인은 “한국당의 삭발식은 폭주하는 거대 권력의 횡포에 맞서는 비폭력 저항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반대 삭발

지난달 10일 오전 국회 본청 계단에서 무소속 이언주 의원이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사망하였다”는 현수막을 펴놓고 문재인 대통령의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에 반발하며 삭발식을 거행했다.

이 의원은 삭발식에 앞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문재인 대통령의 아집과 오만함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타살됐다”면서 “저항과 투쟁의 의미로 삭발을 결정했다. 많은 분들이 뜻을 함께 해주시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음날인 11일 박인숙 자유한국당 의원과 김숙향 동작갑 당협위원장도 조 장관 임명에 반말하며 삭발을 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지난달 16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문재인정권의 헌정유린 중단과 조국 파면 촉구하는 삭발 투쟁식에 참여했다. 제1야당 대표가 대정부 투쟁을 하면서 삭발한 것은 처음이다.

삭발을 마친 황 대표는 입장문을 통해 “오늘 제1야당 대표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문재인 대통령과 이 정권에 항의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며 “참으로 비통한 마음”이라고 밝혔다. 이어 “문 대통령에게 경고한다. 더 이상 국민의 뜻을 거스르지 말라”며 “조국에게 마지막 통첩을 보낸다. 스스로 그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촉구했다.

황 대표에 이어 지난달 17일에는 강효상 의원이, 18일에는 이주영 의원이 현역 국회 부의장으론 최초로 머리를 깎았다. 이날 5선 중진 심재철 의원도 삭발했다. 19일에는 김석기·송석준·이만희·장석춘·최교일 의원이 삭발했고, 20일 부산 장외 집회에서 이헌승 의원이 마지막으로 삭발대열에 합류했다.

무소속 이언주 의원이 지난달 10일 국회 본청 계단 앞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을 규탄하는 삭발을 하고 있다. 이 의원은 삭발식에 앞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문재인 대통령의 아집과 오만함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타살됐다”면서 “저항과 투쟁의 의미로 삭발을 결정했다. 많은 분들이 뜻을 함께 해주시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진_뉴시스)

삭발에 대한 평가

이언주 국회의원의 삭발에 대해 박지원 의원은 SNS 게시글의 댓글을 통해 “국회의원이 하지 말아야 할 3대 쇼 1. 의원직 사퇴 2. 삭발 3. 단식 왜? 사퇴한 의원 없고 머리는 자라고 굶어 죽은 사람 없어요”라는 댓글을 달았다. 반면 홍준표 전 대표는 자신의 SNS에 “얼마나 아름다운 삭발이냐? 야당 의원들은 이언주 의원의 결기 반만 닮았으면 좋으련만 조국 대전에 참패하고도 침묵하고 쇼에만 여념 없는 그 모습은 참으로 보기가 딱하다”고 평가했다. 정의당은 “자신의 신체를 담보로 투쟁하는 것은 약자들이 최후에 하는 방법”이라며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삭발에 대해 ‘약자 코스프레가 가소롭다’고 맹비난한 바 있다.

정치권에서는 삭발을 단식, 장외 투쟁과 함께 야당이 여당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 꼽는다. 삭발은 단식보다 부담은 덜하면서 자신의 뜻을 ‘시각적’으로 가장 극대화할 수 있는 투쟁 수단이다. 요구를 관철하고, 투쟁을 독려하며,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효과가 있다.

꼭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이목을 한번에 끌 수 있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주로 활용한다. 투쟁의 절박함을 국민에게 호소하는 차원도 있다. 반면 괜히 머리만 밀고 실리는 못 챙긴 채 웃음거리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비관론과 자칫 국민에게 ‘정치 혐오’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정치인들의 삭발은 당사자의 절박함과 얼마나 많은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성패가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정치는 대화와 타협의 산물이라고 한다.

관용과 타협보다는 개인 간, 집단 간, 세대 간 불신과 갈등이 커진 한국 사회에서 편을 가르고 오직 자기만 옳다고 말하는 정치가 아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정치는 과연 언제 가능할까? 극한투쟁이 아닌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합리적인 결정으로 국민들이 정치에 공감하고 박수를 쳐 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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