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명사/지종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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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명사/지종 스님
  • 취재_김혜현 기자
  • 승인 2007.1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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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을 탓하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보라
소리 가르치며 설법 전하는 지종 스님
창녕군 영명사 주지를 맡고 있는 지종 스님은 우리 전통국악의 계승에 힘쓰고 있는 대표적인 예인이다. 지종 스님은 1987년 한국불교전통음악대학을 수료하고 2002년 중요무형문화재 57호인 경기민요 이수자가 되었으며, 전국국악대전과 경남민속예술경연대회 등 각종 국악대회에서 수상한 바 있다.


지종 스님의 소리는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불우이웃을 돕는다든지 지역의 행사가 있을 때면 항상 발 벗고 나서 음악회를 개최하기 때문이다. 지난 2006년 10월에 열린 경기민요발표공연만 해도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취지로 열린 행사였다. 이 날 지종 스님은 제자
지종 스님에 따르면 이 같은 예술 활동은 국악의 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사회봉사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일종의 ‘보시’이자 ‘수행’이다. 스님이 경기민요를 사사 받기까지의 과정을 듣고 보면 이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경기민요를 사사받기 위해 5년 동안 서울과 창녕을 왕래했습니다. 서울까지는 버스를 4번 정도 갈아타야 도착할 수 있었는데 한 번의 빠짐도 없이 수업에 참관했었습니다. 선생님 살아생전에는 반드시 경기민요를 이수하겠다는 다짐이 있었기에 가능했겠죠.”
출가한 스님이 국악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이도 있다고. 자비사상을 바탕으로 사회봉사를 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저마다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면 그 힘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게 아니겠냐”는 것이 지종 스님의 지론이다. 스님은 음악회를 통해 지역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화합을 장을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음악회의 수익은 불우이웃을 돕는 일에 사용하고 말이다.


규모 대신 내실을 보라
속가 나이 17세에 영명사 주지 임명을 받았다. 그 때는 절세도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고 신도라 해야 고작 열 명 남짓이었다. ‘어린 주지’로서 어려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음은 짐작이 가능하다. 스님은 “80년도부터 영명사를 지킨 지 30년이 다 되어 가네요.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부처님의 가피가 있어 큰 어려움 없이 지금껏 지낸 것 같습니다”라며 욕심을 버리고 겸손하게 살 것을 강조했다.
영명사만 하더라도 스님이 혜안과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다고 해 구름같이 신도들이 몰려들었었다. 스님은 “지금 어느 종교 할 것 없이 모두 외향적인 규모만 커져가는 것 같습니다. 방대한 규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정화와 자중을 통해 내실을 다져야 할 것입니다”라며 부처님의 세계를 공부하고 보니 이런 외형적인 것은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스님은 몇 해 전부터 ‘국악예술원’을 오가며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국악예술원은 진짜 예술을 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공간으로 우리 문화에 관심이 있고, 우수한 우리 전통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언제든 열려있다.


스스로 정화하고 반성하라
지종 스님은 국민기초질서를 강조한다. 상대방을 탓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라고 한다. 스스로 정화하고 반성한다면 기초질서가 갖추어 지고, 기초질서가 바르게 잡힌다면 나라가 부강해 진다는 뜻이다. 스님은 또 “편애하지 말고 모든 사물을 사랑할 것”을 당부한다. 잘난 사람 속에 못난 사람이 있어야 ‘잘난’ 줄 알게 되고, 못난 사람 속에 잘난 사람이 있어야 ‘잘나고 싶은 욕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모두가 사회에 필요한 존재이니 어느 하나만 옳다고 편애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이다. 또한 당당할 자리에서는 당당하게 자신의 뜻을 밝히되 자신을 낮추는 일을 결코 주저하지 말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지종 스님은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청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85년 영명사 주지를 맡았으며 1987년 중요유형문화재 제57호 묵계월 선생으로부터 경기민요 12잡가를 사사받고 2002년 1월 이수자로 선정됐다. 스님은 현재 강병한 전통국악 예술연구원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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