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_시사매거진DB)
[시사매거진/전북=박재완 기자] 남원시와 한국예총 남원지회에서 「남원항일운동사」 증보판을 발간했다. 이번에 새로 발간된 「남원항일운동사」 증보판은 ‘3.1운동 1백주년’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백주년’을 그리고 광복 74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사업이 아닐 수 없다.
1919년 3.1만세운동은 중앙에서 종교계나 학생운동, 농민운동 등을 통한 하향형식이었다. 그러나 남원의 만세운동은 당시 남원군 덕과면 이석기면장이 주동이 되어 군민이 하나 되어 일으킨 순수한 농민봉기라는데 큰 의미가 있다. 따라서 대개 전국만세운동 현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는데, 남원만세운동 현장에서는 주동자 이석기 면장이 스스로 작성한 격문을 낭독했다.
- 격문(檄文) -
我 同胞諸君이여!
神聖한 檀君의 子孫으로서 半萬年 동안 東方에 雄飛하는
我 朝鮮民族은 庚戌年이 怨讐이다.
錦繡江山을 植民地圖에 出版되고 神聖子孫은 奴隸民籍에 들어갔다.
如斯한 恥辱을 受하고 何面目으로 地下의 聖祖를 보겠느냐?
如何히 하여 列强을 對할고.
蒙古도 獨立을 宣言하고 波蘭도 民族自決을 主張한다.
玆에 發憤 興起하여 滿腔의 熱誠을 다하여 朝鮮獨立을 高唱하자.
萬歲! 萬歲! 朝鮮獨立 萬歲! 大韓獨立 萬萬歲!
‘왜 내아들, 며느리를 죽였느냐?’당시 만세 현장에서 8분이 순절하셨는데, 그중 5분이 한마을 방씨가문이다. 이때에 방극용이라는 분이 맨 처음 순절하자, 그 아내가 빨래를 하다가 빨래방망이를 들고 일본헌병과 대적하다가 역시 총에 맞아 죽었고 그때 아들, 며느리의 죽음을 들은 그 어미가 헌병들에게
살려내라고 항의를 하다가 역시 왜놈의 총에 죽으니 이들이 남원의 ‘삼순절’이다.
이 엄청난 역사의 기록이 출간되기까지는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남원출신 향토작가인 윤영근과 최원식(필명 최정주)은 한참 젊은 나이에, “세상에 지극히 하찮은 일이 터무니없이 과장되어 세인들의 입에서 오르내린가 하면, 여러 사람들이 꼭 알고 기억해야하는 중요한 사실들이 묻혀버리는 안타까움을 일깨우기 위해 선열들의 구국정신을 현대에 새롭게 조명해 보자는 결심에서” 「남원항일운동사」의 발굴에 손을 대게 된 것이다.
그때가 1974년부터 10여 년 동안 윤영근과 최원식은 우선 전국 각지에 독립유공자 후손들로부터 자료를 수집하였고, 남원3.1만세운동 당시 선봉에서 만세를 독려하다가 총상을 입고 생존하셨던 정한익옹(당시 93세), 주동을 하시다가 체포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루고 생존하신 이성기옹(당시 94세) 두 분의 조언에 의해 광복회, 전국신문사, 형무소, 자료보관원, 도서관에서 당시의 판결문, 검찰심문조서, 신문기사 등에서 실마리를 얻어 남원사건이 눈에 띄면 띄는대로 자료를 수집했다.
다음은 윤영근 선생의 인터뷰 전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의병의 행적을 쫓다가 전라도에서 충청도로 경상도로생전에 발 한번 디뎌보지 못한 곳에서 수중에 여비가 떨어져 고생한 일도 있었다.
그렇게 분주한 세월을 몇 년간 헤집고 다닐 때에 최원식과 나는 하루세끼 밥을 먹어 본 일이 거의 없었다. 경비도 경비거니와 식사를 하며 노닥거릴 시간이 없어서였다. 어느날은 간첩신고를 받고 경찰서에서 하루저녁 숙박비 없이 신세를 진 일도 있었다.
자료조사를 위해 어느 면사무소에 갔을 때 내가 찾고자하는 사람이 당시에 사상적으로 수배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의 호적이며 제적등본을 확인할 때에 나 역시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게 되어 간첩신고를 받게 된 것이다.
80년대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휴지조각 같은 종이조각이지만, 그동안 수집했던 최원식과 나에게는 소중한 자료들을 한 장 한 장 풀고 엮어가며 기록으로 정리했다. 이러한 자료들을 정리하다가 보니 어떤 대목에서는 울분이 나서 오기 같은 것이 가슴에 치밀어 올라 손이 떨리기도 했다.
당시 일제는 무단정치로 강압통치를 하면서 조선사람들을 처벌하기위해 특별법으로 소위 ‘치안유지법위반’이니 ‘대정8년제령’이니 하는 특별법을 만들어 조선사람들에게 10년이나 20년 또는 종신형을 내리기도 했고, 이미 일본에서도 잔인한 형벌이라고 해서 폐지되었던 태형(笞刑) 제도를 우리나라에서 부활시켜 매를 때리는 형벌을 가하기도 했다.
의병들에게는 강도, 살인, 강간 같은 파렴치범을 씌워 종신형이나 사형, 교수형 등에 처했다. 당시의 항일투사들의 판결문을 번역하다가 보면 이러한 수치스러운 죄명으로 조선사람들을 처벌하기위한 악랄한 수단을 썼다.
기록으로 남기기에 곤란한 부분이있었다. 1930년대에 항일운동단체 중에서 당시 사회주의 소위 공산당조직(고려공산청년회)을 통한 활동과 학생운동과 신간회, 청년동맹의 활동으로 일제에 옥고를 치룬 이두용, 양판권, 윤규섭 같은 분들은 해방 후 월북을 하였거나, 행방불명이 되었으며, 그 직계후손이 없어서 또는 공산당에서 전향한 사실이 없다고 하여 포상자대상에서 삭제되어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어느 집안 족보 때문에 비분강개한 일이 있었다. 어떤 집안에서 족보를 제시하며, 자기집안 어른이 1919년 4월 4일 북시장만세운동 당시 선봉대에 서서 만세를 지휘하다가 일본헌병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절했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최원식과 내가 수집했던 모든 자료 어디에서도 그 사람의 기록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 후손을 대동하고 당시 북시장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생존하신 이성기옹을(96세) 찾아가서 그 의문의 족보를 보여드렸더니, 노구의 불편한 몸을 벌떡 일으키시며 ‘이것이 무슨 소리냐?’
‘그 놈이 살아 있느냐?’
이성기옹의 설명에 의하면 그 사람은 일본현병대 사환(심부름꾼)이었다고 한다. 그날 만세운동 현장인 북시장터에서 헌병대에 있다는 기만을 부리면서 만세운동을 방해하여, 현장에서 주동자들에게 돌팔매를 맞고 쓰려져 수많은 군중이 짓밟아 버렸는데 그놈이 살아 있을리가 없다고 열을 올렸다.
그 뒤에도 그 후손은 이성기옹은 고령으로 곧 돌아가실 것이며 나와 최원식만 입을 닫아버리면 친일파가 애국지사가 되는 것은 뻔한 일이라며, 돈으로 최원식과 나를 회유하려했다. 최원식과 나는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소설로써 만천하에 고발하기로 하고 「당신의 조상은 떳떳합니까?」라는 제목을 달아 거짓 족보 사실을 조목조목 씹어서 예술문예지「예술계」에 실어버리고 그 글을 그 집안에 우송하여 주었더니 그 뒤로는 잠잠해졌으나 아직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이러한 별의별 일을 감당하면서 10여 년의 각고의 세월 끝에 최원식과 나는 1985년 봄날, 미흡하지만 「남원항일운동사」첫판을 내 놓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항일운동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0여 년 동안 헤집고 다녔던 광복회, 보훈처,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보관소, 신문사 등을 들락거렸고, 막연하지만 소문을 쫒아서 지금은 거의 파기되고 없지만 면사무소에 보관되어있는 수형인명부, 호적등본, 제적등본을 근간으로 이미 발간된 「한국독립운동사」, 「의병사」,「독립운동자료집」등을 대조해가며 다시 1백여 분의 독립지사와 의병을 조사하여 1999년 가을에 재판 「남원항일운동사」를 세상에 내 놓았다.
그리고 자료수집을 멈추지 않고 다시 찾아낸 남원출신 독립지사, 의병 330여 분 가운데 활동자료가 충분하신 160여 분의 구국행적을 기록하여 2019년 8월 15일 증보판 「남원항일운동사」를 세상에 내 놓았다. 새로이 발간된 「남원항일운동사」에는 기존에 발간된 「남원항일운동사」에 수록되지 않은 1백여 분의 항일독립지사를 발굴하여 그 행적을 기록했다.
「남원항일운동사」 증보판은 총 9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장과 제 2장에서는 남원의 역사와 전란사를 기록하였으며, 제 3장부터 제 9장까지는 남원의 항일의병 및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제 3장 의병에서는 50여 명의 남원출신의병들의 행적을 기록하여 선열들의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일제와 투쟁한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제4장에서는 서울에서의 3.1운동을 비롯 전북지방과 남원의 3.1운동의 대략을 기록하였으며, 제 5장에서는 남원3.1운동을 주도하였거나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현장에서 순절하였거나 부상을 당한 인사들을 비롯 일제에 체포당하여 옥고를 치룬 40여 명의 행적을 기록했다.
제6장에서는 남원에서 결성된 조선독립대동단 전라북도지부의 활동과 단원들의 투쟁내용을 기록하였다.
제 7장에서는 남원출신의 독립투사 50여 명의 항일투쟁내용을 기록하였으며, 제 8장에서는 남원의 청년회와 청년동맹, 신간회와 형평사 등의 항일단체의 결성과 활동내용을 상세히 기록하였으며, 제 9장에서는 남원의 농민운동을 기록하여 농민들이 어떻게 항일운동에 동참하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경제왜란이라고도 불리는 일본 아베정부의 경제침략으로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는 이때에 남원에서 발간된 「남원항일운동사」 증보판은 애국선열들의 조국애와 함께 항일 구국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살아있는 교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새로이 발굴 등재된 많은 애국지사들이 그 공훈을 인정받아 그 후손들이 긍지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국가도 하지 못한 일을 일개 향토학자가 그것도 40여년이란 인고의 세월을 견뎌 출간한 이 책은 가히 보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며 존경받아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