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의 혼과 마음을 담은 예술인
양복의 명인에서 시인에 이르기까지
장인(匠人)은 궁리나 가르침을 뜻하는 장(匠)자에 사람 인(人)자가 합쳐진 단어다. 뜻을 풀이해보면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다. 평생을 고집스럽게 외길로만 걸은 장인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고루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과거를 증언하는 화석”이라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장인, 그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자로서 살아있는 지식을 전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명인의 작품은 그 가치를 매우 높이 인정한다. 의복의 경우만 하더라도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은 제작 기간이 오래 걸리고, 가격도 매우 고가다. 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명인이 만든 작품의 가치는 더욱 올라간다. 질적인 면에서 기성복과 비교가 안될 만큼 최상품을 유지하며, 장인이 만든 제품이라는 자부심까지 더해졌기 때문이다.
‘양치상양복점’은 그 반열의 선두에 있다. 50여 년의 전통을 자랑하며 ‘장인정신’의 혼을 발휘해 맞춤양복을 제작하는 곳으로 ‘한땀 한땀 정성을 다해 품격 있는 신사복을 만드는 곳’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국제기능올림픽대회’ 금메달 수상, 독일 뮐러 디자인 학교에서 유학
양치상이란 이름은 지난 1968년 7월 23일 열린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그의 작품이 양복부문 금메달을 수상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외할아버지 밑에서 곁눈질로 양복 만드는 방법을 익히며, 밤늦도록 홀로 남아 양복과 씨름했던 그였기에 너무도 값진 영광이었다. 당시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故 박정희 대통령에게서 산업훈장증과 대통령 하사금을 받기도 했는데, 이것을 기폭제로 2년여의 준비과정 끝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 건 양복점을 개원하게 된다. 단순한 양복의 차원을 넘어 멋과 세련미, 체형에 꼭 들어맞는 신사복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미 국내에서 최정상을 달리며 명성을 떨치고 있었지만 양 대표는 거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선진화된 기술을 섭렵하기 위해 과감하게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뮐러 디자인 학교’에서 체계적인 공부를 했다. 사람들은 그의 옷을 선호했고, 주문이 쇄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양복을 만들었던 시절을 그는 회상했다. 그렇다고 어려움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당시 대구 중앙로에 있었던 작업장에 불이 났고 모든 것을 잃어야 했다. 그간 시인으로도 활발한 활동했던 양 대표는 정말 한 줄의 시도 쓸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고 얘기한다. 지금은 대구인터불고 호텔에 양치상약복점을 오픈하고 각계각층에서 러브콜을 받으며 제2의 삶을 시작하고 있다.
양복 명인과 시인의 공통점
오랜 시간동안 한 분야에 몰두한 양치상 대표에게는 ‘양복의 명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젊은 시절부터 양복하나만을 위해 쌓아온 열정과 작품이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1941년 만주에서 태어났다. 그 시대에 만주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순탄치 못한 삶을 예고하는 것과도 같다. 만주에서 대전으로, 대전에서 서울로 피난 생활이 이어졌고, 6.25전쟁으로 대구에 삶의 터전을 잡게 된다. 청소년 시절, 그는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외할아버지의 양복점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바느질부터 재단, 봉제에 이르기까지 양복 한 벌을 만들기 위해 며칠 밤낮을 새워가며 일했다. 재능이 있었던 탓인지 남들보다 배우는 속도도 빨랐고, 재미도 느꼈다.
사실 ‘양치상’이란 이름은 양복으로 또 시인으로 유명하다. 단순히 제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창조물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양복도 시도 그에겐 똑같다. 그 시절의 경험은 대한민국 최고의 명인을 만들어 냈고, 그에게 시의 감수성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양복의 명인에서 시인에 이르기까지
장인(匠人)은 궁리나 가르침을 뜻하는 장(匠)자에 사람 인(人)자가 합쳐진 단어다. 뜻을 풀이해보면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다. 평생을 고집스럽게 외길로만 걸은 장인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고루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과거를 증언하는 화석”이라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장인, 그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자로서 살아있는 지식을 전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명인의 작품은 그 가치를 매우 높이 인정한다. 의복의 경우만 하더라도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은 제작 기간이 오래 걸리고, 가격도 매우 고가다. 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명인이 만든 작품의 가치는 더욱 올라간다. 질적인 면에서 기성복과 비교가 안될 만큼 최상품을 유지하며, 장인이 만든 제품이라는 자부심까지 더해졌기 때문이다.
‘양치상양복점’은 그 반열의 선두에 있다. 50여 년의 전통을 자랑하며 ‘장인정신’의 혼을 발휘해 맞춤양복을 제작하는 곳으로 ‘한땀 한땀 정성을 다해 품격 있는 신사복을 만드는 곳’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국제기능올림픽대회’ 금메달 수상, 독일 뮐러 디자인 학교에서 유학
양치상이란 이름은 지난 1968년 7월 23일 열린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그의 작품이 양복부문 금메달을 수상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외할아버지 밑에서 곁눈질로 양복 만드는 방법을 익히며, 밤늦도록 홀로 남아 양복과 씨름했던 그였기에 너무도 값진 영광이었다. 당시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故 박정희 대통령에게서 산업훈장증과 대통령 하사금을 받기도 했는데, 이것을 기폭제로 2년여의 준비과정 끝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 건 양복점을 개원하게 된다. 단순한 양복의 차원을 넘어 멋과 세련미, 체형에 꼭 들어맞는 신사복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미 국내에서 최정상을 달리며 명성을 떨치고 있었지만 양 대표는 거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선진화된 기술을 섭렵하기 위해 과감하게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뮐러 디자인 학교’에서 체계적인 공부를 했다. 사람들은 그의 옷을 선호했고, 주문이 쇄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양복을 만들었던 시절을 그는 회상했다. 그렇다고 어려움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당시 대구 중앙로에 있었던 작업장에 불이 났고 모든 것을 잃어야 했다. 그간 시인으로도 활발한 활동했던 양 대표는 정말 한 줄의 시도 쓸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고 얘기한다. 지금은 대구인터불고 호텔에 양치상약복점을 오픈하고 각계각층에서 러브콜을 받으며 제2의 삶을 시작하고 있다.
양복 명인과 시인의 공통점
오랜 시간동안 한 분야에 몰두한 양치상 대표에게는 ‘양복의 명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젊은 시절부터 양복하나만을 위해 쌓아온 열정과 작품이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1941년 만주에서 태어났다. 그 시대에 만주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순탄치 못한 삶을 예고하는 것과도 같다. 만주에서 대전으로, 대전에서 서울로 피난 생활이 이어졌고, 6.25전쟁으로 대구에 삶의 터전을 잡게 된다. 청소년 시절, 그는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외할아버지의 양복점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바느질부터 재단, 봉제에 이르기까지 양복 한 벌을 만들기 위해 며칠 밤낮을 새워가며 일했다. 재능이 있었던 탓인지 남들보다 배우는 속도도 빨랐고, 재미도 느꼈다.
사실 ‘양치상’이란 이름은 양복으로 또 시인으로 유명하다. 단순히 제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창조물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양복도 시도 그에겐 똑같다. 그 시절의 경험은 대한민국 최고의 명인을 만들어 냈고, 그에게 시의 감수성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슈바빈의 거리
양치상
램프의 가스가
떨어져 가고 있다.
현관을 쪼아대던 새,
돌아오지 않는다.
술에 젖은 가로수에
노시인의 기침소리.
바람은
하수구 너머로 흐르고
종지기의 아이는
종각을 떠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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