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매거진/전북=오운석 기자] 광복회전북도지부 회원 29명의 3.1독립운동 100주년 맞이 연해주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를 떠나 시사매거진전북본부 자문위원 우종상 회원의 답사기를 6회에 걸쳐 싣는다.
<5회>
답사 넷째 날 : 대접받지 못하는 항일운동의 본산
2019. 05. 30(목)
답사일정 내내 꾸무럭했던 날씨가 어제 오후부터는 매우 맑아졌다. 마치 우리나라의 가을하늘처럼 맑았고, 공기는 매우 상쾌해 여행하기에는 최고의 날씨를 보여줬다.
어제 오후에는 독립운동의 본거지이었던 ‘신한촌’을 방문하고, 러시아인들의 생활상을 보기위해 ‘아르바트’거리를 찾아봤는데 관광객의 90%가 우리 한국사람들이었다.
주변의 카페나 마트, 기념품점 입구에도 한글로 된 광고 문구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우리의 국력이나 경제여건이 그만큼 좋아졌다는 반증이 아닌가 싶다.
‘블라디보스톡’에는 1870년대부터 한인의 인구가 늘어나자, 시 당국에서는 1893년 한인들만 집단으로 거주하도록 하는 구역을 설정하였다. ‘카레이 스카야슬라보드카(한인촌)’ 혹은 ‘개척리’라 부르던 이 지역에서 1911년 러시아당국은 페스트 창궐을 계기로 ‘위생실행위원회’ 결의를 거쳐 ‘개척리’를 강제로 철거시켜 이 일대를 기병대 숙소로 삼았다.
‘개척리’에서 북쪽으로 2㎞ 정도 떨어진 곳, 아무르만이 내려다보이는 산비탈에 한인들은 신개척리를 건설하여 새로운 한국을 부흥시킨다는 의미로 ‘신한촌’이라 명명하였다. 1915년경 에는 ‘신한촌’의 한인의 수는 약 1만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신한촌’은 항일민족지사들의 집결지였고 국외 독립운동의 중추기지로 발전해서 한민족의 의기가 충천하게 되었다.
이곳으로 망명해서 활동한 인물로는 이범윤, 홍범도, 유인석, 이진룡 등의 의병장을 필두로 하여 국내․외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하던 인물들이 모여들었다. 이곳에 모인 ‘항일 민족운동가’들은 한인사회의 지도급 인물인 최재형, 최봉준, 문장범, 김학만 등과 협력해 1910년대 국내외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일제는 ‘신한촌’ 외곽 1㎞ 지점에 영사관을 두고 ‘신한촌’을 중심으로 한 항일민족운동의 동태를 감시한다.
우리 답사반 일행은 ‘항일 독립운동 기념탑’에 참배를 한 뒤, 약 2시간 가량 이동해 역사의 숨결이 살아 있는 현장 ‘우수리스크’에 도착했다. ‘우수리스크(Ussuriyk)’는 ‘블라디보스톡’ 북쪽 112㎞ 지점, ‘한카호(湖) 남쪽 저지대에 위치하며, 동해로 흘러드는 우수리강 지류에 자리하고 있다. 시베리아 철도와 하얼빈․무단강(牧丹江)․둥닝(東寧)을 연결하는 철도와의 분기점으로 극동지역의 경제적 중심지를 이루고 있는 산업도시이며, 연해주를 중심으로 펼쳤던 독립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했던 곳이다.
우리 일행은 ‘우수리스크’에 도착해서 ‘한인이주 140주년 기념관’을 방문하고 안중근 의사 기념비에 참배를 한 뒤 독립운동의 대부라 불리 우는 최재형 선생의 생가와 헤이그 특사의 정사였던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를 방문 참배를 하면서 가슴속에 묻혀있던 태극기의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1917. 3. 2 이 곳 연해주에서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신 이상설 선생은 동지들에게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자신을 수이푼 강가에 화장하여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기시고 돌아가십니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자신의 육체와 함께 자신이 연구하고 쓰고 입고 있던 모든 자료와 물품 등을 함께 태워 달라는 부탁을 하여 현재까지 선생의 업적을 연구하는데 난항을 겪고 있다.
훗날 선생을 추모하는 ‘광복회’와 ‘고려 학술문화재단’에서 2001.10.18일 러시아 정부와의 협조를 통해 이곳에 비석을 세웠지만,
너른 벌판에 비석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어 사후에도 조국의 땅이 아닌 타국에 남겨진 그리고 관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독립운동가의 안타까운 운명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이번 답사에 참석한 류희태 회원은 74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에 ‘일문구의사(一門九義士)’추모행사를 열고 있다. ‘일문구의사’는 혈연관계에 있는 한 가문의 가족 모두가 의병활동에 나서 항일운동을 펼쳐 건국훈장과 애국훈장을 수여받은 가문 뿐 아니라 지역의 명예를 드높이신 분들이기도 하다.
9분의 의사는 고흥 류씨 문중으로 류중화를 비롯 류연청, 영석, 연풍, 태석, 연봉, 명석, 준석, 현석 씨 등이다.
이들 의사들은 의군단을 조직하고 비봉면 소농리 불당동에 무기제작소를 차리고 고산, 익산, 여산과 멀리 금산 등지에서 일경을 습격하는 등 활발한 의병 활동을 펼쳤다.
‘일문구의사’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까지는 어려운 일이 많았었다. 이들 중 준석, 연풍, 연봉 씨는 아예 절손되었고, 나머지 후손들도 전국에 흩어져 궁핍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후손들이 뒤늦게 찾은 판결문에는 살인범 등으로 기록되어 있어 그 공과를 인정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난 82년도에 9분의 의사 사적비 건립운동이 일어나는 등 고산 주민들의 자발적인 추모운동이 거세지자 83년도에 정부에서 9의사 공적을 인정하여 독립유공자 훈장을 수여했다.
류중화 의사에게는 1990년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고, 8분의 의사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훈격이 높아졌다.
류희태회원은 ‘일문구의사는 전북의 자랑인 만큼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선열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길이 이어갈 수 있도록 하겠다’ 며 답사기간 중 9분의 활약상을 전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