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매거진/전북=오운석 기자] 광복회전라북도지회(지부장 이강안)는 5.27부터 31까지 5일간 광복회원 29명이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러시아지역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에 나선다.
시사매거진전북본부(본부장오운석)에서는 광복회전북지부의 회원이면서 시사매거진전북본부 자문위원 우정상씨의 답사기를 현지에서 송고되어 오는대로 6회에 걸쳐 선조들의 러시아지역 독립운동 유적과 후손들의 삶 등에 대해 게재한다.
<제1회, 출발 전>
1. 독립운동가의 후예들,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
‘광복회 전라북도지부(지부장 이강안)’에서는 독립유공자 유족으로 구성된 회원 29명과 함께 우리 선조들의 얼이 남아있는 러시아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 길에 나선다.
올해는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기념비적인 해로 전라북도에서 애국지사 유족 예우사업의 일환으로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계획을 마련하여 독립운동 발상지인 러시아 연해주 일대의 독립 운동 유적지를 답사하게 되었다.
이번 탐방은 5. 27(월)부터 31일 까지 5일간 실시될 예정이며, 인천공항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우수리스크→블라디보스톡→하바롭스크를 경유하게 되는데, 참석자들 모두가 여행이라는 들뜬 분위기보다는 아버지, 할아버지들께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셨던 곳을 방문한다는 엄숙 하고 경건한 마음이 더했다.
100년 전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시절,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국내․외에서 일생을 바치신 위대하신 선각자들로 인해 대한민국은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국력을 누리고 있지만, 선조들이 젊은 나이에 청춘을 바치면서 독립운동을 하셨기 때문에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현재에도 고단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반면 친일파의 후손들은 일제강점기 시절 조국을 팔아 축적해 놓았던 재산을 바탕으로 호의호식하며 편안한 삶을 살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특히 ‘광복회’의 경우에는, 회원의 자격이 ‘독립유공자 유족’(손자까지) 으로 제한되어 있어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발굴사업 추진에도 불구 하고 매년 회원 수가 줄어드는 안타까운 시점에서 이루어진 답사라 그 의미가 한층 더하고 있다.
이번 탐방이 ‘독립유공자 유족’들에게는 다소 위로가 되고, 또 후손들에게는 점차 잊혀져가는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기 위해 ‘시사메거진 전북본부(본부장 오운석)’에서 탐방기를 실어본다.
2. 러시아 연해주 지역 한인독립운동의 역사적 성격
러시아 극동지역은 한반도와 두만강을 접하고 있는 지역으로서, 한국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두만강 건너 연해주 곳곳에는 발해의 유적지들이 널리 퍼져 있으며, 1860년대 이후 이곳에 거주하였던 한인들의 숨결이 남아 있다.
또한 구한말 이후 지속적으로 전개된 항일투쟁의 열기와 유적지들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했던 동포들이 다시 돌아와 재정착하고 있으며, 구소련의 몰락 이후에는 많은 한국 업체들이 진출하고 있다.
러시아 극동지역은 1910년대 국내외를 걸쳐 민족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으로 민족운동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연해주에서는 1905년부터 1908년까지 두만강 건너인 연추(현재 크라스키노)지역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그 대표적 의병장으로서는 이범윤, 최재형, 홍범도, 안중근 등을 들 수 있다.
재러 동포들은 이들 의병장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에게 큰 위협을 가하였다.
특히,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이등박문을 포살함으로써 독립운동의 활성화 및 국내외 동포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하였다.
둘째)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을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한민학교 등 민족학교를 설치하여 동포 자제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신문 등을 간행하여 국내․외 소식전달과 항일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표적인 신문으로는 ‘해조신문’과 ‘대동공보’ 등을 들 수 있다. ‘해조신문’의 경우에는 국내에서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유명한 장지연을 주필로 초빙하였다.
셋째)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될 기미가 있자 연해주 한인들은 유인석을 중심으로 ‘13도의군’을 조직하여, 국내로 진공하여 일제를 몰아 내고자 하였다. 아울러 성명회 선언서를 발표하여 일제의 조선강점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선포하여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넷째) 1911년 연해주 한인들은 한인자치기구로서 권업회를 조직하여 한인들의 자치활동과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아울러 신채호, 이상설, 장도빈 등을 주필로 하는 권업신문도 간행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또한 이동휘 등을 중심으로 ‘대한 광복군정부’를 수립, 일제에 대항하여 한국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재러한인들의 이러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다섯째) 러시아지역의 한인들은 1919년 2월 국내․외에서 최초로 ‘대한 국민의회’라는 정부를 조직하였다. 대한국민의회에서는 문창범, 이동휘, 최재형, 김철훈 등이 중심인물로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만주와 국내 등지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고자 하는 한편 ‘상해 임시정부’와도 통합을 하는 등 발전적으로 해체하여 민족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여섯째) ‘대한 국민의회’는 1919년 3월 17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후 우수리스크를 시작으로 블라디보스토크, 크라스키노 등 여러 지역에서 3·1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특히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있는 한인들은 한민학교를 중심으로 활발히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일곱째) 3·1운동 이후 이 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들은 ‘노인동맹단’ 등 다양한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대일투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 중 ‘노인동맹단’ 소속의 강우규 의사는 1919년 9월 남대문역(현재 서울역)에서 새로 부임하는 조선총독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일제를 경악하게 할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
여덟째) 3·1운동이후 재러동포들의 활발한 대일투쟁은 1920년 4월 일제의 한인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으로 일시 정체상태를 보이게 되었다. 즉 일본군은 1920년 4월 4-5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우수리스크 등 한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습격하여 다수의 한인을 살상하는 한편가옥 등을 파괴하였다. 신한촌의 경우 300여명을 사살했다고 하며, 우수리스크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인 최재형을 사살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관련 자료 : 네이버 지식백과 >

3. 한인의 눈물과 항일투쟁의 역사가 살아있는 연해주
러시아의 땅, 그리고 극동 러시아 엄청나게 큰 땅 러시아는 총 85개 연방주체들로 구성된 연방공화국으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2개 연방특별시를 비롯해 22개 공화국과 9개 지방, 46개 주, 1개 자치주, 4개의 자치구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러시아 중앙정부는 지방에 대한 통제체제 확립을 위해 러시아 연방을 8개의 연방관구(Federal District)로 구분하고, 관구별 대통령이 임명한 전권대표를 파견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중 8개의 주체로 구성된 극동(Far East) 연방관구는 상당한 크기의 영토를 자랑하고 있다.
연해주(沿海州)는 말 그대로 ‘바다에 인접해 있는 지역’을 일컫는다. 실제로 바다에 접해 있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블라디보스톡을 주도로하고 있는 지역이며, 주요도시로는 고려인 마을이 있는 우수리스크와 더불어 나호드카, 아르쫌, 아르세니예프 등이 있다.
면적은 한국의 1.7배, 서쪽으로는 중국, 남서쪽으로는 한반도와 접경을 하고 있고, 인구는 191만여명에 달하는데 러시아인, 우쿠라이나인, 고려인, 우즈베키스탄인 등 다양한 민적이 살고 있으며 러시아의 여러지역 중에서 한국에 대해 가장 호의적이고 인지도가 높은 지역이다.
한인 이주 최초정착지는 지금… 올해는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기념비적인 해이면서 조선 후기 우리 선조들이 러시아로 처음 이주한지 155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미국 하와이 이민보다 40여 년이나 앞선 사실상의 첫 해외이주였다. 조선 후기인 1864년 1월 함경도 농민 14가구 60여명이 조선과 러시아 국경에 해당하는 두만강을 건넜다. 러시아 사료에 따르면 국경을 넘은 한인들은 현재 ‘하신’으로 불리는 지역의 ‘지선허’ 마을에 초가를 짓고 살기 시작했으며, ‘기선허’ 마을을 시작으로 연해주의 다른 지역으로도 이주를 계속한 한인들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조치 전에는 18만여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스탈린은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이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던 일본의 첩자 노릇을 할 수 있다며 강제 이주명령을 내렸으며, 한인들은 가축 수송용 기차에 실려 수천㎞ 떨어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황무지로 내몰려 한때 1,700여명의 한인들이 살았다는 옛 마을터엔
지금은 인가는 찾아볼 수 없고 한인이주 140주년 때 세워진 기념비만 우두커니 서있다.
이후 중앙아시아의 다른 지역과 러시아 등으로 재이주한 한인들은 타고난 근면성과 끈기로 사회 각 분야에서 성공신화를 일궈냈으며, 정계에서 상하원 의원이 나오기도 하였고 큰 돈을 번 기업인과 탁월한 예술인․운동선수 등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왜 고려인이라고 부를까?
소련 붕괴 이후 독립국가연합 전체에 거주하는 한민족이나 그들의 자손들을 ‘고려인’이라 부르게 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러시아어로 ‘카레이스키’라고 불린다고 알려져 있지만 러시아에서는 고려인을 ‘카레이스키’라고 부르지 않는다. ‘카레이스키’는 ‘한국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고려인이라 부르는 걸까? 이들이 연해주에 왔을 시기는 ‘조선’이라는 나라이었거나 ‘대한제국’이었는데 어째서 ‘조선인’도 ‘한국인’도 아닌 ‘고려인’이라 부르는 걸까? 왜 하필 ‘고려인’인지에 대해 알려진 바로는 ‘조선인’이라고 하면 남한에서 싫어하고, ‘한국인’이라고 하면 북한에서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러시아로 우리민족과 땅, 국가전반을 가리키는 단어가 ‘고려’에서 유래한 ‘까레야’이고, 중국어와 일본어에서는 ‘朝鮮’, 영어에선 ‘KOREA’가 이에 해당한다. 원래 ‘고려인’도 중국, 일본 등 나라의 동포들과 같이 ‘조선’이라고 했지만 자신들을 ‘고려인’이라고 공식적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88년 6월 ‘전소 고려인협회’가 결성되면서 부터였다.
1993년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련 조선인대표자회의’에서 정식으로 소련조선인의 명칭을 ‘고려인’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