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매거진253호=오경근 칼럼니스트) 서울에서 47번 국도를 타고 선바위길로 난 과천 방향으로 들어오면 트럭터미널 앞 삼거리에서 다시 직진해 울양곡도매시장을 지나게 된다. 그 다음 만나게 되는 두 번째 삼거리에서 좌회전으로 바라보면 ‘과지초당(瓜地草堂)’과 ‘추사박물관’이 서 있다. 이곳 인근에는 정우식물원과 아해박물관, 천지식물관과 경마공원 등이 위치해 있어 날씨가 따뜻한 봄날이면 가족 단위로 많이 찾아오는 탐방 명소다. 특히 추사 김정희의 생부 김노경이 마련한 과천의 별장 ‘과지초당’은 단아한 조선 선비의 정신과 사색, 분위기 등을 체감해 볼 수 있는 ‘두이(二) 자형’ 나란한 가옥이 있어 인상적이다. 또한 그곳에 추사 김정희가 직접 항아리를 묻어 우물을 만들었다는 독우물 옹정(甕井)이 있어 인간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아울러 과천의 <추사박물관>은 추사의 학문과 예술을 주제별로 구분하여 교유한 인물들과 그 사연을 소개하는 1층 ‘추사의 학예실’은 물론 추사의 삶을 시기별로 나누어 각 시기별 중요한 사건을 해설하고 작품을 전시한 2층 ‘추사의 생애관’ 그리고 추사 연구자였던 일본인 후지츠카와 그의 아들 아키나오 부자의 학문적 성취와 추사 관련 유물의 기증을 기념하는 B1 ‘후지츠카 기증실’이 마련돼 있다. 특히 2006년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 환수를 이끌어낸 모범적 사례로 손꼽히는 과천의 <추사박물관>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사진_이관우 기자]

명문가문 & 왕실가문 자손인 김정희 출생
추사 김정희는 1786년(정조 10) 6월3일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노경과 어머니 기계유씨 사이에서 3남매 중 첫째다. 하지만 8세 무렵에는 대를 잇지 못하는 큰아버지 김노영의 양자로 들어가 상우와 상무 2남을 낳는다.
추사 김정희의 집안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경주김씨 명문가다. 먼저 그의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은 영조임금의 딸인 화순옹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다. 고로 김정희의 할아버지인 김이주는 영조임금의 외손자로 왕실의 특별한 보호와 관심 속에 높은 벼슬을 지냈다.
이후 김이주는 김노영과 김노경 형제를 낳고, 차남 김노경은 김정희와 김명희, 김상희 3남을 두었다. 그중 장남인 김정희를 형 김노영의 집안에 양자로 보낸다. 때문에 김정희는 가문의 대를 잇는 한편, 멀리 떨어져 있는 생부 김노경과 동생들을 그리워하며 서간을 띄우기도 했다.
“삼가 살피지 못했습니다만 한여름에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사모하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소자는 어른을 모시고 책 읽기에 한결같이 편안하오니 다행입니다. 백부께서는 이제 곧 행차하시려는데 장마가 아직도 그치지 않고 더위도 이와 같으니 염려되고 또 염려됩니다. 아우 명희와 어린 여동생은 잘 있는지요?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만 살펴주십시오. 아뢰어 올립니다.” - 계축년(1793년) 6월10일 아들 정희 올립니다 -

연경(북경) 꿈꾸는 추사 김정희의 젊은 시절
추사 김정희는 김노영의 양자로 입적된 후 북학파의대가 박제가의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박제가는 3회나 연경(베이징의 옛 이름, 현재 북경)에 다녀온 인물이다. 박제가는 청나라의 앞서가는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파 주장을 펼쳐 김정희에게 지대한 영향을 펼친다. 그러던 중 1809년(순조 9) 24세 때 생원시에 합격한 김정희는 생부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가게 된다.
당시 호조참판이던 김노경이 동지부사로 연경에 가면서 김정희를 청나라에 수행원으로 데려간 것이다. 김노경 일행은 1809년 11월16일 조선 의주에서 출발하여 책문과 요야, 백탑보와 심양, 여양과 산해관, 계주를 거쳐 40여일만인 12월24일 청나라 연경에 도착한다. 그리고 연경에서 40여 일 머무르며 황제와 정치 관료는 물론 문인과 학자 등을 만난 뒤, 1810년 2월3일 출발하여 약 30여 일 후 1810년 3월4일 의주로 돌아온다. 왕복 1,600km가 넘는 대장정이었다.
이를 통해 김정희는 연경에서 평소 만나고 싶어 했던 청나라 고증학의 대학자인 78세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 청나라 관리이자 고증학을 이끌어간 44세 완원(阮元, 1764~1849)을 만난다. 이들은 젊은 청년 추사의 총명하고 해박한 지식에 놀라며 ‘해동에서 제일가는 학자’라고 칭찬하며 고증학뿐만 아니라 금석학, 경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전수한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옹방강의 아들과 의형제를 맺는다.
무엇보다 연경을 떠나던 날, 청나라 학자 겸 예술가 주학년(朱學年, 1760~1834)의 초청을 받아 법원사에 간 김정희는 송별모임에서 스승인 완원을 비롯해 이임송, 옹수곤 등 총 9명의 청나라 학자들에게 이별을 아쉬워하는 칭송을 받는다. 머무는 동안 추사의 학문과 인품이 청나라에서 인정을 받은 데 따른 것이다.

금석학과 어사 김정희의 출세가도
추사 김정희는 조선으로 돌아와 서신으로 청나라 학자들과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학문에 대한 견해를 나누었다. 특히 편지와 함께 책, 그림, 탁본 등을 전달했다. 그의 스승 옹방강이 큰 도움을 주었으며, 김정희 역시 청나라로 가는 사신에게 여러 모로 도움을 주었다.
이후 김정희는 청나라에서 배운 금석학을 토대로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는 모든 옛 비석들의 글씨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조사를 하고 공부를 할수록 비석에 새겨진 단순하고 힘찬 글씨체에 매력을 느낀 그는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잠시 미루고 금석학 연구에 몰입한다.
그의 성과는 1816년(순조 16) 친구 김경연과 함께 북한산에 올라가 <북한산진흥왕순수비>를 발견해내는 쾌거를 이룩한다. 신라 진흥왕이 한강 이북까지 영토를 넓힌 일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었음을 알아낸 것이다. 이듬해 친구 조인영과 다시 찾아가 탁본을 뜨고 68자를 판독하며 신라시대 비석임을 확정적으로 밝힌다.
또한 1817년 무장사 터를 찾은 추사 김정희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무장사비의 다른 한 조각인 <무장사아미타조상비>를 발견하고 신라시대 소성왕비가 남편의 명복을 빌고자 부처를 만들어 경주 무장사에 둔 과정을 밝혀낸다.
이후 1819년 34세 때 과거시험 대과에 합격한 김정희는 생부 김노경의 뒤를 이어 여러 높은 관직과 벼슬에 추대된다. 특히 1826년(순조 26) 2월 충청우도 암행어사가 되어 100여 일간 파견된 그는 충청지역과 관리 55명, 경기도 관리 4명을 순찰했다. 당시 순조에게 올린 추사의 암행어사 보고서의 사본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그의 암행어사 공적을 기린 <어사김정희영세불망비>가 충남 서산에 세워진 까닭이다.

김정희 ‘추사체’와 <세한도>의 백미
하지만 그의 일생에도 찬란한 서광만 비춘 것이 아니었다. 1940년(헌종 6) 55세 때 정치적인 사건으로 모함을 받아 제주 대정현에 유배된다. 왕의 외가라는 신분과 정승판서가 배출되던 명문가에서 귀하게 자란 김정희는 승승장구 출세가도를 달리던 데서 낙오돼 제주의 바닷가 초가집에서 9년간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귀양살이의 고단함 속에 김정희는 자신만의 독특한 글씨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하게 된다. 역관 제자 이상적이 가져온 청나라 책들을 받아보며 공부와 예술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며 학문의 경지를 높여간다. 그리고 1844년(헌종 10) 59세 때 추사의 대표작인 <세한도(歲寒圖)>와 <일로향실(一爐香室)>이 제작된다. 특히 이상적에게 그려준 ‘세한도’는 <논어>에 나오는 “추운 겨울이 지난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라는 뜻을 담아 여백의 간명한 구도와 메마른 붓질로 분위기를 살렸다.
제자 이상적은 뛸 듯이 기뻐하며 <세한도> 그림을 청나라로 가져가 학자들에게 선보였다. 이에 감동받은 청나라 학자 16명이 찬사의 글을 부쳤고, 또한 후대의 서예가이자 언론인이며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인 오세창과 동아일보 논설위원인 정인보 등이 그림의 왼쪽 끝 부분에 발문을 달았다.
그러한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는 일생동안 여러 번 변화했다. 수많은 연습과 변화를 통해 추사의 글씨는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 서예 역사상 어느 사람도 시도하지 못한 추사만의 특징을 갖게 된다. 특히 초년의 글씨는 법도에 맞는 단정하고 아름다운 글씨체였다. 24세 때 연경을 다녀온 후 스승 옹방강의 글씨체와 비슷했다. 더욱 31세 때 쓴 ‘이위정기(以威亭記)’는 옹방강의 글씨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그러나 중년의 글씨는 제주유배를 통해 인간적으로 성숙함을 나타낸다. 자신만의 특징을 구사하며 다양한 맛과 뛰어난 구성미를 보여주는 추사체의 백미를 보인다. 그리고 노년의 글씨는 예서와 행서가 특히 돋보인다. 강철처럼 굳세고 힘찬 붓놀림과 각지면서도 굵고 가늘기의 차이가 심한 글씨에서 추사만의 파격적 형식을 보여준다. 그의 독창성은 기교가 배제된 피나는 수련과 연구의 결과로 평가된다.

과천에 마련한 ‘과지초당’, 김정희의 안식처
1849년(헌종 15) 제주유배에서 풀려난 뒤 서울 용산에서 지내던 김정희는 2년 후 다시 모함을 받아 1851년(철종 2) 7월 함경도 북청으로 1년간 유배를 간다. 이전 제주유배의 ‘위리안치’는 가시울타리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 반면, 이번 북청유배는 ‘주군안치’로 고을 권역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했다.
이때 추사 김정희는 친한 후배인 윤정현(尹定鉉, 1793~1874)이 함경감사로 오게 되어, 그와 함께 황초령에서 발견된 진흥왕순수비를 원래의 자리인 진흥리로 옮기게 된다. 그리고 비석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비각을 세워 보호에 힘쓴다. 또한 후배 윤정현의 부탁으로 <진흥북수고경>이라는 현판을 써서 붙인다. ‘진흥왕이 북쪽을 순시한 옛 영토’라는 뜻의 글씨로 대단한 높은 기예의 서예 작품이다.
이듬해인 1852년(철종3년) 8월, 67세의 나이로 북청유배에서 풀려난 추사 김정희는 그의 생부 김노경이 과천에 마련한 별장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말년을 보내게 된다. 정원과 숲이 빼어나고 아름다운 연못을 갖춘 곳으로 소문난 이곳에서 약 4년간 머무르며 추사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완성시켜 나간다. 그리고 71세 되던 해 편안히 이생의 눈을 감는다. 그가 이곳 과천의 과지초당을 좋아한 이유는, 과거 1824년(순조24)에 생부 김노경이 지은 별장이었다는 것 외에 1837년(헌종 3)인 52세 때 생부 김노경을 여의고 이곳 가까운 청계산 옥녀봉에 장사한 후 삼년상을 치른 아픔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 과천시절 추사 김정희의 글씨는 자유자제로 여러 작품을 남기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촌로의 가장 큰 즐거움을 표현한 ‘대팽두부과강채’는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채소’라는 문장이고, ‘고회부처아녀손’은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자라네’란 뜻이다. 또한 좋은 붓과 이름난 꽃을 칭송했는데 ‘무쌍채필산호가’는 ‘더 없이 좋은 붓에 산호 붓걸이’란 뜻이며, ‘제일명화비취병’은 ‘제일가는 이름난 꽃에 비취 꽃병’이란 뜻으로 명필 김정희의 평온한 노년을 엿볼 수 있다.